베란다 콘서트
고미화
초가을에 들어선 토요일 오후다. 한가한 주말 오후 시간이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오디오를 켜고 클래식 음악 방송 주파수에 맞춘 후,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잡음인가? 고운 선율을 비집고 어디선가 다른 소리가 끼어든다. 전화벨 소리도 아니다. 마치 솔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청아하다. 소리의 진원지를 좇다가 문득 며칠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읽었던 게시글을 떠올렸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열리는 ‘베란다 콘서트’ 안내문이었다.
열려 있는 주방 창문을 내다보았다. 35층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평면적이다. 키 큰 나무에 가려진 1층 정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갈등이 생긴다. 하던 일을 멈추고 생생한 현장으로 달려갈 것인지, 이중 창문을 닫고 집중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런데 귓가에 부드럽게 감기는 고운 화음을 거부하기엔 왠지 아쉬운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호의를 외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놀이터가 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조경을 비롯해 편의 시설을 제법 잘 갖춘 놀이터다. 몇 개의 동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광장의 꼴을 갖추었다. 넓은 터 중앙에는 각종 놀이기구와 작은 구기 종목 코트가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 사이엔 따스한 체온을 기다리는 벤치도 곳곳에 있다. 햇빛이나 비를 피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형태가 다른 공간(Tee House)도 세 곳이나 있다. 공연 무대는 티 하우스 중에 가장 너른 곳에 마련되었다.
'베란다 콘서트’는 청주 시립합창단에서 기획한 공연이라고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친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공연 적합성 확인을 거친 몇 군데의 아파트가 선정되었다고 들었다. 우리 아파트도 수혜를 본 곳 중 한 곳인 모양이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즐기는 음악 감상이라니 참 근사한 기획이다. 문득 언젠가 바르셀로나 여행 중에 접했던 광경이 떠오른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람블라스 거리, 발코니에서 맥주를 마시며 생동감 넘치는 길거리 풍경을 즐기는 그들이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연을 즐기고 있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가족들, 캠핑 의자를 펴고 앉은 사람들, 운동기구에 걸터앉은 이들, 미끄럼틀에 올라가 줄줄이 앉아 있는 아이들, 테이크아웃 커피를 앞에 두고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는 젊은 부부 등 모두 자유로운 모습으로 무대를 향해 시선을 모으고 있다. 햇살이 내려앉은 잔잔한 바다를 보는 것처럼 평화로운 정경이다. 마침 비어 있는 벤치 모퉁이가 눈에 띄었다. 흰 구름 마주 보며 손짓하는 푸른 바다를 떠올리며 그 자리에 앉았다. 솔로와 합창, 테너와 소프라노, 알토와 바리톤으로 이어지는 소리 예술이 풍요롭다. 어느새 내 안에는 솔숲과 나란한 바닷가가 펼쳐졌다. 무대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파도 소리처럼 다가와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한때 생의 기로에서 부유했던 적이 있었다. 삶을 지탱하던 뿌리가 흔들리고, 신념과 가치관이 표류하던 시간이었다. 육체와 영혼이 유리된 듯한 시기였다. 몸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정신은 아득한 곳에 매여 있는 나날이었다. 관계의 사각지대에서 그저 하나의 점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소속된 어떤 단체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서성였다. 가장자리에서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소속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작과 끝이 어우러져 순환하는 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람에 일렁이던 물결은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밀리고 밀려 다다른 곳이 바다의 끝자락이다. 파도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파도는 생의 변방에서 마주한 장벽 앞에서 물러서기를 거부한다. 좌절할 줄도 모른다. 거대한 암석도, 견고한 방파제도 파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장렬한 투신만이 파도가 선택한 길이다.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 생애 절정인 양 눈부신 꽃으로 하얗게 산화한다. 바위에 몸을 던진 파도도, 모래톱에 부딪혀 흩어지는 포말도 다시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바다의 리듬에 맞춰 물결의 율동에 합류한다. 파도가 일렁이지 않으면 제 이름을 잃는 것이다. 밀려나고 부서지는 도전을 멈춘다면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가곡과 가요로 짜인 프로그램이 어느새 중반을 넘었다. 합창으로 듣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곡이 색다르게 들린다. 서로 다른 음색 하나하나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고운 화음으로 울려 퍼진다. 형체 없는 맑은 소리가 감성을 깨우고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40 여분의 콘서트가 끝났다. 하얀 파도의 포말과 고운 화음의 여운이 발걸음을 이끈다. 아파트를 둘러싸고 조성된 산책로를 걸었다. 절정을 지난 나무들이 가을맞이 채비를 하고 있다. 돌 틈과 잔디밭 군데군데 노란 민들레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제철을 잊고 피어난 해맑은 얼굴이 밝은 미소를 건넨다. 맑고 푸른 하늘이 편안함을 더하는 오후, 하얀 뭉게구름이 어린 민들레 꽃을 다독이듯이 천천히 흐른다. 초가을 하모니가 평화롭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엔 아파트단지가 최고 문화공간인 것 같아요. 수십 년 동안 외딴 집에 살다보니 이젠 아파트에 살고 싶은 생각이 밀려오는군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주거 공간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글을 쓰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전원 주택의 풍경이 더 풍부한 소재를 담고 있을 것 같기도 해요. ^^
코로나가 낳은 새로운 콘서트이지요.
베란다로 내다봐야하니 당첨된 아파트는 광장을 두고 둘러싼 아파트가 유리하지요.
그래서 제가 사는 아파트는 불리해요.ㅎ
잔잔하니 선생님 음성처럼 들리는 음악같아요. 이를 테면 키라 나이틀리가 엘리자베스로 분한 오만과 편견, 책을 읽으며 목가적인 풍경에 소니타 피아노 음악이 첫장면에 나오는데요. 마치 그것을 형상화한 느낌같은 이미지가 떠올라요.
선생님의 바닥짐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또다른 예술 작품과 동행한다는 것은 선생님의 지적 감성 재산이 많다는 의미이겠지요.
다음 학기에 만날 선생님의 작품 기다릴게요.
고맙습니다.
잔잔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주제는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야할텐데...
아직도 요원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