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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여행 후기 스크랩 아름다운 경관에 따뜻한 민담, 역사까지 품은 남지 개비리길(’18.4.16)
갈하늘 추천 0 조회 522 18.04.23 04: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지 개비리길

 

여행일 : ‘18. 4. 16()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남지읍 일원

걷기코스 : 창나루주차장마분산마분산갈림길영아지전망대개비리길 종점야생화쉼터창나루주차장유채꽃단지남지철교(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산악회 : 좋은 사람들

 

특징 : ‘남지 개비리길은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와 신전리를 잇는 낙동강의 강변을 따라 난 길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벼랑길이다. 여기서 '비리''벼루'에서 온 말로 벼랑, 즉 절벽을 뜻하며, ''는 강가를 뜻하는 '갯가'의 줄임말이다. 고로 '강가 벼랑 위에 난 길'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라 여기면 되겠다. 길이가 2.4쯤 되는데 창녕군에서는 이게 짧다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2015년 마분산의 산길을 연결해 6.4짜리 순환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인공적인 길이 아니라 본디부터 지녀온 서정적 정서를 보여주겠다면서 말이다. 둘레길마다 사연을 담고 있지만 유독 남지개비리길은 토속적인 이름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민담과 임진왜란, 6·25전쟁 등 상흔을 담은 이야기 길이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전투가 있었던 역사적 현장이며, 한국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등록문화재 제145호인 남지철교와 함께 우리민족의 상흔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다 낙동강의 뛰어난 풍광이 더해지면서 등산객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다. 그 덕분에 인근 마을을 오가는 주민 외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던 한적한 오솔길이 요즘은 찾는 이들로 붐빈다고 한다.

 

트레킹의 들머리는 창나루주차장(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144-1)

중부내륙고속도로 창녕 IC에서 내려와 TG를 빠져나오자 우회전하여 1022번 지방도를 타면 중간에 남지읍 시가지를 지나서 창나루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오늘 트레킹의 들머리이다. 주차장에서 강둑 위로 오른 뒤, 100m 정도만 더 걸으면 먼지 털이용 에어 컴프레서(air compressor)’까지 설치되어 있는 남지 개비리길의 시작점이 나온다. 이정표(창나루 전망대0.36Km, 마분산정상 갈림길 1.69Km/ 마분산 갈림길()2.21Km/ 창날마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길이 이곳에서 둘로 나뉘나 두 방향 모두 남지 개비리길이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진행하면 될 일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개비리길을 한 바퀴 돌고 난 후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게끔 길이 나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남지수변공원에 만들어놓은 전망대부터 먼저 둘러보기로 한다. 남지수변공원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생겨난 남지읍 남지리와 용산리 사이의 낙동강 둔치 1768000에 조성됐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60%에 해당하는 드넓은 공원이다. 그 북쪽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게 남지 수변 억새전망대이다. 이 일대는 물씬 풍기는 가을 정취로 유명한 곳이다. 창녕군에서 주차장 앞 낙동강 둔치에 수만의 억새밭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수변 억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이다. 억새와 수변공원, 낙동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라는 것이다. 억새 명소로 손꼽히는 화왕산의 억새를 낙동강 변으로 옮겨, 그 명성을 잇고 있는 셈이다.




전망대는 두 개의 전망타워를 세우고 두 타워와 강둑을 데크로 연결시켰다. 가운데에 생겨난 공터에는 스테인리스로 제작된 예쁜 조형물을 배치했다. ‘억새라는 이름의 작품인데, 억새축제로 유명한 화왕산(火旺山)’과 인접한 남지에 낙동강 4()’이자 억새를 주제로 한 테마공원을 조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단다. 그러고 보니 억새를 형상화한 작품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억새 위에서 날개짓을 하고 있는 저 나비는 무슨 의미일까? 인근에 유채꽃 단지까지 조성해 놓았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전망대에 오르면 두물머리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지금은 억새를 볼 수 없지만, 남강이 낙동강에 합쳐지는 지점이 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강과 강의 섞임은 자연스러울 따름이지 요란스럽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의 섞임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침목 계단을 오르면서 남지 개비리길의 트레킹이 시작된다. 계단이 놓인 산길은 경사가 가팔라서 거의 등산에 가까울 정도다. ! 들머리에 이정표 외에도 낙동강 남지 개비리길안내도가 세워져 있다는 걸 깜빡 잊을 뻔 했다. 발길을 재촉하지 말고 찬찬히 살펴본 뒤에 출발하는 지혜를 발휘해 보자. 그리고 붉은색의 탐방로가 마분산을 비켜가고 있음을 머리에 기억해 놓자. 그래야만 마분산의 정상을 올라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그러니까 트레킹을 시작한지 10분이 지났을 즈음이면 벤치 두 개를 놓아둔 첫 쉼터를 만난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잠시 쉬었다 가라는 배려인 모양이다. 옆에는 마분산(馬墳山)과 창나리(倉津) 마을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도 세워 놓았다. 그 내용은 조금 있다 거론해 보기로 하자.



몇 발작 더 걷자 이층으로 지어진 팔각정이 길손을 맞는다. ‘창나루 전망대란다. 정자의 앞에는 '곽재우 장군의 토성과 말 무덤'에 대한 안내판을 배치했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장이 마분산에 토성(土城)을 쌓아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왜적을 맞아 백전백승했다는 것이다. 이 토성은 작은 규모이나 정상에 공간을 두어 강에서는 보이지 않게 설계되었으며, 산을 힘들게 올라온 적과의 육탄전에서 유리하게끔 정상 안쪽에 흙으로 성을 쌓았는데, 430여 년의 풍상에 토성은 허물어졌고 이젠 그 흔적만을 겨우 남기고 있단다. 마분산으로 이름이 변한 이유도 적혀있으나 그 내용은 이따가 오르게 될 마분산의 정상에서 다시 거론해 보겠다.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에 만났던 안내판의 내용을 떠올리며 눈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정리해 본다. 저 강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거기다 물길 두 개가 합쳐지는 지점이었으니 전략적 요충지였음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그러니 이곳에 신라군(新羅軍)이 주둔했었을 것이고, 그들이 먹을 식량을 저장하는 창고도 있었을 게 분명하다. 요 아래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창나리(倉津)’가 된 이유이다.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탐방로는 소나무로 뒤덮인 능선을 따른다. 남지개비리길의 절반을 차지하는 마분산 능선은 6·25전쟁 당시 최후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박진지구의 한 곳이기도 하다. 195086일부터 104일까지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은 북한군 제4사단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고 한다.



산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경사 또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거기다 바닥까지도 보드랍기 짝이 없는 흙길이다. 편안한 산길을 걷게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게 얼마간 진행하자 안내판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다섯 갈래로 갈려나간 소나무에 대해 설명을 해놓았는데 ‘6남매 나무라는 특이한 이름표를 달았다.



다섯 주간(柱幹), 즉 줄기가 다섯 개로 갈려나간 소나무의 밑동 한가운데에 산벚꽃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수종은 다르지만 소나무의 밑동을 통해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소나무와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서 ‘6남매 나무(六男妹樹)‘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그렇다면 양자를 들인 셈이다. DNA가 완전히 다른 남매이니 말이다. 그게 아니면 소나무 엄마가 바람이라도 피웠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능선을 따른 지 15분 여, 앞서가던 일행들이 서성이고 있는 게 보인다. 길이 둘로 나뉘는데 이정표(영아지 전망대 1.48Km/ 창나루 주차장 1.57Km)는 한 방향만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분산 정상 갈림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들머리로 다시 돌아가 보자. 붉은 색 탐방로가 마분산을 살짝 비켜나있는 게 보일 것이다. 이젠 들머리에 세워진 안내도를 꼼꼼히 살펴보라고 했던 이유를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고 창녕군에서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명색이 마분산 정상 갈림길이란 이름표까지 달아놓은 이정표라면 마분산 정상의 방향표시를 해놓는 것은 기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이를 빼먹은 행위는 질책을 받아도 싸다.



왼편에 보이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방향표시도 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의 흔적까지 희미해서 망설일 수도 있겠지만 의심하지 말고 일단은 들어서고 보자. 몇 걸음 걷지 않아 묘역(墓域)이 나타나고, 그 뒤에 봉긋하니 솟아오른 마분산 정상이 보일 것이다. 참고로 이곳 마분산의 정상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곽재우장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이 합장되어 있는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무덤의 둘레가 20m에 높이는 5m, 기단부는 돌을 쌓아 둘렀으며 내부에는 석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4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전면에는 개인 무덤이 들어서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들머리에서 정상까지는 30분 남짓 걸렸다.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하긴 이정표에 방향표시까지 빼먹은 창녕군청에서 그런 생각까지 폭을 넓혔을 리가 없다. 그저 누군가 매달아 놓은 정상표시(마분산 179.9m)’ 코팅지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을 따름이다. ! 국제신문 근교산행 팀의 산행대장을 역임했던 최남준씨가 매달아 놓은 표지판도 보인다. 하지만 이곳이 마분산의 정상이라는 것은 빼먹었다. 해발고도가 180m인 화왕지맥의 한 지점으로 표기해 놓았을 따름이다. 참고로 마분산의 원래 이름은 창진산(倉津山)’이었다고 전해진다. ‘창나루 뒤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이곳 마분산 일대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왜병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곳이다. 왜적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했던 곽 장군은 말꼬리에 벌통을 매달아 적진을 향해 달리게 했고 벌떼로 적진을 교란해 승리를 거뒀다. 그 와중에 말이 죽자 곽 장군은 말의 사체를 거두어 산에 묻고 장사를 지냈단다. 이를 계기로 산의 이름이 마분산(馬墳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반대방향으로 몇 걸음 내려서면 아까 정상으로 올라오면서 헤어졌던 탐방로(이정표 : 마분산 갈림길()0.3Km/ 창나루 전망대1.02Km)와 만난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자 목동의 이름을 새긴 돌이란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주변에 널린 납작한 돌들의 표면에 글자들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는데 60년대 이곳이 민둥산이었을 당시 소를 치던 목동(牧童)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적은 것이란다. 주변에 널려있는 포탄의 파편과 철갑탄의 탄두를 도구로 이용했음은 물론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만나게 되는 삼거리봉 갈림길’(이정표 : 영아지 쉼터1.0Km/ 도초산1.7Km/ 창나루 주차장 1.4Km)을 지났다 싶으면 또 다른 안내판이 고개를 내민다. 이번엔 전설의 마분송(馬墳松)’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마분송(馬墳松)이란 마분산에 널려있는 소나무들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한 그루의 소나무가 밑동에서 여러 갈래의 줄기로 나뉘어 자라는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장군이 이 나무들에 옷을 입혀 허수아비로 만들어 의병의 숫자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다. 이름표에 전설(傳說)이라는 낱말을 붙인 이유일 것이다.



잠시 후 마분봉 갈림길()’이라는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그런데 이정표(임도0.08Km/ 마분봉 정상 갈림길0.3Km)가 보는 이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목표 지점으로 삼아오던 영아지라는 지명 대신에 임도라는 생소한 지명이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다. 확신이 서지 않기에 왼편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앞선 일행의 뒤를 일단 따르고 본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덕분에 우린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내려갔다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다시 되돌아오는데 20분 가까이나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알바구간에서 물웅덩이를 만났다. 흙탕물이 일고 있기에 멧돼지의 공중목욕탕이 아닐까 궁금했었는데, 잠시 후 멧돼지와 마주쳤을 때의 대처 요령을 적어놓은 안내판을 보고나서는 내 추측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20분 만에 마분봉 갈림길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임도 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몇 발작 더 걷지 않아 임도(이정표 : 영아지 쉼터0.77Km/ 마분산 갈림길()0.08Km)에 이른다. 깔끔하게 시멘트포장이 되어있는 걸 보면 ‘MTB마니아들을 위해 길을 내었는지도 모르겠다.



굳이 임도를 따를 필요는 없다. 임도와는 별로로 능선에다 탐방로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오르내리는 것이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햇볕을 피할 수 있어 탐방객들에게는 오히려 낫지 않나 싶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진행하자 아까 헤어졌던 임도와 다시 만나게 되는 지점인 개뚜골고개(이정표 : 영아지 쉼터0.3Km/ 우슬봉1.0Km/ 도초산2.5Km/ 마분산2Km)’에 내려선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뉘지만 다 무시하고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임도를 따른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길가에 세워놓은 팔각정을 만나는데, 이정표에 나와 있던 영아지 쉼터가 바로 이곳이다.



이정표(영아지 전망대0.21Km/ 영아지 마을0.89Km/ 영아지 앞산0,3Km/ 임도 입구0.77Km)가 가리키고 있는 영아지전망대 방향으로 향한다. 중간에 방향을 틀기도 하지만 영아지전망대 가는 길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두어 곳에 세워져 있으니 찾는 데는 불편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잠시 후에는 영아지전망대에 이른다. 이층으로 지어진 팔각정이다.



명색은 전망대이지만 조망은 별로이다. 낙동강이 내다보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들어찬 나무들로 인해 전체 풍경의 반()의 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쉼터로나 이용하면 제격이 아닐까 싶다. 눈에 담을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정자 앞에 세워놓은 안내판이라도 살펴보자. 이곳이 낙동강전투의 최후 방어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어 놓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물밀 듯이 쳐내려오는 북한군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을 이곳에다 치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는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해 아군은 전체적인 전세(戰勢)를 역전시킬 수 있었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젠 내려왔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 그렇게 잠시 걸으면 영아지 목제계단 갈림길’(이정표 : 영아지 주차장0.32Km/ 영아지 전망대0.12Km)이 나오고, 곡선이 아름다운 나선형의 목제계단을 잠시 내려서면 영아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화장실은 물론이고 원두막까지 지어 쉼터의 역할까지 겸하도록 했으니 잠시 쉬면서 주변 경관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싶다. 지형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흐르는 낙동강의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본래의 개비리길‘, 즉 옛길을 따른다. 경상도 지역의 지명에 종종 등장하는 '개비리'''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사투리로 강가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 ‘남지 개비리길은 새끼를 향한 애틋한 모정(母情)이 찾아낸 가슴 뭉클한 길이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민담(民譚) 하나를 옮겨본다. 개비리길이 발견되지 않았던 먼 옛날 영아지(현재 신전리) 마을에 살던 황씨 할아버지의 어미 개가 새끼 11마리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다른 새끼들에게 밀려 어미젖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유독 약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인 용산마을로 시집간 딸이 친정에 들렀다가 병약한 새끼를 키우겠다며 시댁으로 데려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며칠 후 친정의 어미 개가 와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미 개가 매일 젖을 주려고 산을 넘어 두 마을을 오간 것이다. 그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용산마을에 나타났고, 하루에 꼭 한 번씩 새끼 개에게 젖을 먹이고 가더라는 것이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어미 개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따라가 보니 눈이 없는 낙동강 절벽을 따라 다니더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 고개를 넘는 수고로움 대신 어미 개가 다니던 이 길을 이용하게 됐으며, 길의 이름 또한 '개비리'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벼랑길 아래에 꼬맹이 배 몇 척이 정박해 있다. 그래서 이곳을 영아지 나루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은 개비리옛길의 끝이며 돌아가야 할 반환점이기도 하다.



길은 절벽 위로 나있다. ’개비리길의 들머리에서 만났던 안내판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라고 했다. 안내판은 또 수십 미터의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어도 될 정도로 폭이 넓었고, 강과 맞닿는 벼랑은 서슬이 시퍼럴 정도로 높지도 않았다. 옳은 표현도 있기는 했다. 길을 걸으며 낙동강의 눈부신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개비리길은 강물이 산을 안고 돌면 같이 돌고, 휘어져 들어오면 깊숙이 함께 물러난다. 물길 따라 산과 강을 거스르지 않고 난 길이라는 얘기이다. 원래 이 길은 지금보다 산 위쪽에 있었다는데 행인들이 가파른 산길을 버거워하면서 강가로 길이 형성됐다. 덕분에 벼랑 따라 낙동강을 발아래 두고 걷는 아찔함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매력이 합쳐지는 개성 넘치는 길이 되었다.



그렇게 15분 정도를 걷자 야생화 쉼터가 나온다. 강을 향해 파고드는 강기슭에다 전망데크를 만들어 놓았다. 낙동강의 강줄기를 실컷 구경해보라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쉼터라기보다는 전망대라는 이름표를 달았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야생화를 심어놓은 듯한 공터의 가에다 벤치 두어 개를 놓아두었다. ’야생화 쉼터라는 이름이 붙게 된 근거이지 싶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길손을 맞는다. 높게 자란 왕대들은 햇살을 몰아내고 충충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숲 안으로 간신히 이어진 길은 길이 아니라 근근이 이어지는 흔적처럼 희미해 선뜻 들어서기가 무서울 정도다. 그래선지 탐방로는 대숲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서 나있다. 대숲의 가장자리, 낙동강과 맞닿은 강변에는 죽림쉼터란 간판을 달고 있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낙동강물이 휘돌아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위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 곁에는 하트 모형을 배치해 젊은 연인들이 좋아 할만한 포토 죤(photo zone)’으로 꾸며놓았다.





대나무를 소재로 한 여러 시설들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강바람에 못 배긴 울음소리가 그립기라도 한 듯이 대나무 대롱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았는가 하면, 눕는 의자도 서너 개 놓여 있다.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을라치면 바람에 대숲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아니 새소리까지 보태져서 들려온다. 천지간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다는 곡우(穀雨)가 나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뱃살 측정기가 아닐까 싶다. 8개의 대나무 기둥을 세우고 20(17)에서 시작해 10년 간격으로 60(23)까지, 그리고 빅 사이즈답 없음7개 공간을 만들었다. 자신의 나이에 해당되는 공간을 통과해보라는 것이다. 시험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60대인 나와 집사람은 각각 50(21)30(19)에 해당되는 공간을 너끈히 통과했기 때문이다.



대나무 쉼터를 지나자 길은 조금 더 넓어진다. 길이 자연스러워 걷기에 편하다. 길을 정갈하게 닦아놓았을 뿐 인공적으로 조성된 흔적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낙동강 쪽에다 안전용으로 밧줄난간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산길이란 게 원래는 이랬을 것이다. 뜻이 발길을 재촉하고 발길이 쌓이고 쌓여 길을 내는 것 말이다.



주변 경관에 취해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덧 옹달샘 쉼터이다. 하지만 옹달샘은 눈에 띄지 않고 탐방로 옆 언덕에 화단만 덩그러니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옛날 제 자식에게 젖을 물려주러 다니던 황씨 할아버지네 개가 이 길을 오가며 목을 축이던 옹달샘이 이곳에 있었다. 이후 이곳을 지나다니던 동네 사람들도 자연스레 이용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신작로가 뚫리면서 인적이 끊기자 옹달샘 또한 자연스레 메꾸어져 버렸단다.> 이런 스토리텔링(storytelling) 하나쯤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탐방로는 이제 차량이 다녀도 좋을 정도로 확연히 넓어졌다. 그렇게 12분쯤 걸으면 용산정수장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도로나 다름없는 널따란 길을 따라 15분 남짓 더 걸으면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남지수변 억새전망대에 이르게 된다. ‘개비리길의 트레킹이 종료되는 것이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10분이 걸렸다. 길을 잘못 들어 허비한 시간과 간식을 먹느라 쉬었던 시간을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2시간 30분을 걸은 셈이다. ! 이 구간의 특징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가에 처음 보는 가로수가 쭉 늘어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수양벚꽃이란다. 꽃은 이미 지고 없지만, 능수버들처럼 가지를 축 늘어뜨린 게 여간 운치 있는 게 아니다.



길이 6.4Km개비리길이 짧다고 생각된다면 남지철교까지 2Km 정도를 더 연장할 수 있다. 이 구간은 둑방 위로 난 도로를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둔치로 내려가 볼 것을 권한다. 10년 전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생긴 둔치인데, 관할 지자체에서 이를 정비해 수변공원이란 이름으로 탈바꿈 시켜놓았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담아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조경은 물론이고 조형미를 가미한 산책로까지 깔끔하게 내놓은 것이다. 이 산책로를 이용할 경우 눈요기까지 즐길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길 양편으로 유채 꽃밭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유채꽃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도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고성의 솔섬과 완도의 청산도, 부여의 백마강변 등 전국에는 제주 못지않은 유채꽃 명소들이 즐비하다. 이곳 남지에 조성된 유채꽃밭도 그중 하나이다. 아니 그 면적이 110에 달한다니 단위면적으로는 국내 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찌나 넓은지 유채 밭을 돌아보는 순환 셔틀버스가 있을 정도라는 기사가 떴을 정도이니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게 너른 유채단지에 샛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고 상상해보라. 거기다 거울처럼 잔잔한 낙동강이 꽃길 가로 흐른단다. 황홀함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노란색으로 물든 들녘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어느 기사에선가는 이곳의 유채꽃 만개시기를 15일부터 20일 사이로 보았었다. 오늘이 16일이니 우리가 때를 맞춰 잘 찾아온 모양이다. 그나저나 온통 노란색으로 물든 유채 꽃밭이 낙동강의 푸른 물결과 더불어 한 폭의 대형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유채꽃은 그렇게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유채꽃의 노란 군무(群舞)는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녔다. 아니 완상(玩賞)의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벚꽃과는 달리 서서히 왔다가 서서히 가기 때문이다. 축제를 보려고 온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유영하면서 유채의 바다를 휘젓고 다닌다. 시원한 낙동강 강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가 폐부를 파고든다. 꿀에 맛들인 벌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꿀을 모으려고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사람들 정도는 성에 차지도 않는 모양이다.



유채 꽃밭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면 축제장에 닿게 된다. ‘자연과 사람의 만남을 주제로 한 13회 창녕 낙동강 유채축제인데 지난 13일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7일까지 5일간 열리는 이번 축제는 군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낙동강 용왕대제를 시작으로 열린 콘서트와 군수배 농악경연대회, 다문화가정 전통혼례식, 유채꽃 한복 패션쇼, 낙동강 가요제, 유채꽃 라디엔티어링, 미술대회 등의 특색 있는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불꽃놀이와 전국 직장인 밴드 페스티벌, 유채 가래떡 뽑기, 프러포즈 음악회, 다문화가족 노래자랑, 예술단 공연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린단다. 그나저나 행사장에는 붐비는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다. 하긴 지난해 4월 한 달에만 124만 명이 다녀갔다니 이를 말이겠는가.



행사장에는 대형풍차와 초가집, 가축 등 여러 가지 조형물들을 설치해 탐방객들이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도록 했다. 한반도 튤립 정원, 태극기 정원 등 이름도 예쁜 공간들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쉬엄쉬엄 행사장을 둘러볼 수 있도록 원두막 쉼터 등을 곳곳에 마련해 놓았음은 물론이다. ! 깜빡 잊을 뻔했다. 자전거를 대여해서 유채꽃 단지를 둘러볼 수도 있다고 한다.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전동차도 보인다.




유채의 바다를 빠져나올 즈음이면 국가등록문화재 제145호인 남지철교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1933년 개통한 남지철교는 창녕군 남지읍과 함안군 철서면 사이의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근대식 트러스 구조의 철교(鐵橋). 길이 391m 너비 6m 높이 6m. 교각 부분의 트러스를 높이 설치해 물결치는 듯한 모습이 일품이며, 한강철교와 압록강철교에 이어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세 번째 강철 교량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다리는 6·25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9509월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 전투 과정에서 철교의 중간 부분 25m가량이 폭파됐다. 미군이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고 폭격기로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당시의 전투는 남지철교 아래의 낙동강 물이 붉게 물들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리로 전세가 역전돼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됐다. 전쟁이 끝난 1953년 복구돼 교량 기능을 되찾았으며, 1994년 차량 통행이 금지되기까지 60여 년간 사용됐다. 그 뒤 2007년 비슷한 모양의 새로운 남지철교가 가설돼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의 눈엔 나란한 옛 남지철교와 새 남지철교가 헷갈릴 수도 있다. 옛 남지철교가 너무 깨끗하게 단장된 반면 새 남지철교는 더 고풍스러운 외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색이 옛 남지철교이고, 붉은색이 새 남지철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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