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의 서정에서 회심과 신앙은 중생에 앞서는가?
구원의 서정에서의 중생, 회심, 신앙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1)회개하여 (2)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3)죄 사함을 얻으라 (4)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회개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 : 죄 사함을 얻음 – 성령을 선물로 받음
그렇다면 회개는 죄사함의 구원, 성령을 받음보다 앞서는 것인가?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1)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2)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가로되 (1)너희가 믿을 때에 (2)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행 19:2)
그렇다면 신앙(믿음)은 성령을 받음보다 앞서는 것인가?
1.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 거듭남(중생)에 있게 하신다. 그로 말미암은 새생명에 의한 인식으로 회심과 신앙에 있게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강조된다.
2.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를 통해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회심에 있으므로 믿음의 고백에 있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복음에 의해 인식하고 회개와 신앙에 있게 된다. 그러한 것에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을 것을,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회개하고 믿음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성령 세례에 의한 중생으로 있는 일이다.
3. 그러하긴 하지만,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각각 견해를 달리 해 왔다. 이에 대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1)
(1) 펠라기우스는 ①회개(죄인의 자력으로) ②순종을 말하였다.
(2) 로마가톨릭교회는 ①충족의 은혜 ②협력 은혜 ③주입 은혜(성례)로 보았다.
(3) 알미니안파는 ①소명 ②회개 ③신앙 ④칭의(의의전가) ⑤중생 ⑥성화 ⑦견인의 이해에 있어왔다.
(4) 웨슬레는 ①은혜의 역사 ②칭의 전의 회개 ③칭의와 죄의 용서 ④신생 혹 중생 ⑤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⑥완전 성화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①선행 은총 ②회개(깨닫는 은총) ③칭의 ④성결의 순서로 말하기도 하였다.
(5) 루터와 루터파는 ①소명 ②조명 ③회심 ④중생 ⑤신앙 ⑥신비적 연합 ⑦갱신 ⑧보전이라는 순서에 의해서 이해를 가져왔다.
(6) 칼빈은 ①소명 ②신앙 ③중생 ④회심 ⑤성화 ⑥칭의 ⑦예정 ⑧부활의 이해에 있어 왔다.
(7) 개혁주의 신학은 ①소명(召命) ②중생(重生) ③회심(悔心) ④믿음(信仰) ⑤칭의(稱義) ⑥수양(收養) ⑦성화(聖化) ⑧견인(堅忍) ⑨영화(榮化)의 서정의 견해에 있어 왔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학자들에게서도 구원의 서정은 통일되어 있지를 않았다.
(8) John Murray : ①소명 ②중생 ③믿음과 회개 ④칭의 ⑤양자 ⑥성화 ⑦견인 ⑧영화
(9) Louis Berkhof : ①신비적 연합 ②외적 소명 ③중생과 유효적 소명 ④회심 ⑤신앙 ⑥칭의 ⑦성화 ⑧성도의 견인
(10) A. Kuper : ①칭의 ②중생 ③소명 ④회심 ⑤신앙 ⑥성화
(11) H. Bavinck : ①소명 ②신앙과 회심 ③칭의 ④성화 ⑤영화
(12) Charles Hodge : ①소명 ②중생 ③신앙 ④칭의 ⑤성화
(13) 박형룡 : ①소명 ②중생 ③회심 ④신앙 ⑤칭의 ⑥양자 ⑦성화 ⑧성도의 견인 ⑨영화로 보아 개혁주의 신학에 의한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는 견해에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침에 있은 학자들 간에도 각각의 이해를 달리하는 견해에 있어왔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중생을 회심, 또는 신앙 앞에 순서를 두고 있다.
2. 성경적 관점에 의한 구원의 서정으로 가장 옳은 것은 무엇인가?
이 중에서 성경적 관점에서 가장 옳다고 여겨지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견해이다. 루터는 회심을 중생 앞에, 칼빈은 신앙을 중생 앞에 각각 두고 있으나, 이는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에서가 아니라, 죄의 회개에 의한 하나님의 용서가 말해지는 회심이 있는 것에서 중생을, 또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그에게 있는 중생을 인식하는 것에서 이다. 즉, 회개한 자는, 또한 주께 믿음을 가진 자는 자신에게 새생명이 주어졌음을 비로소 앎에 있는 것에서 이다.
그럼에도 중생 이전에 회심과 신앙을 두게 될 경우에 중생 없이 – 새생명이 주어짐이 없이 – 회심이, 그리고 신앙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된다. 그렇다보니 회심준비론자들의 경우에서는 회심의 은혜를 받아들임에 있는 자와 이를 거부함에 있는 데 따른 인간 자력(자유의지) 문제가 대두된다. 루터와 루터파는 회심을 인간 자력(자유의지)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회심이 성령을 받기 전에 있는 일임을 말하면서도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것인지 아니면 회심에 있는 인간이 회심의 주체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러한 루터와 루터파는 다만, 반드시 회심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만을 다루며 이를 강조한다. 그 이유는 율법의 용도 이해에 따른 때문이라고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를 깨닫게 하고(율법의 제1용도), 그리고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감에 있게 되며(율법의 제2용도),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있게 된다(율법의 제3용도)고 보는 때문이다. 그러한 것에서 죄를 깨달음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믿음의 주로 받아들임에 있는 중생, 신앙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인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칼빈이 신앙을 중생 앞에 두는 것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한 신앙을 말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믿음의 의를 말함에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인간 자력(자유의지) 문제가 대두되지 않고 배제된다. 또한 구약시대의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필요와 역할에 있는지에 대하여 율법의 용도를 말하되, 율법의 용도를 구원의 서정의 이해에 의해서 갖지는 않는다.
루터와 루터파, 그리고 칼빈이 갖는 구원의 서정의 견해가 이러한데, 개혁주의 신학의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한 자에게서 회심, 그리고 신앙을 말하게 됨은 혹 있을 수 있는 논쟁을 불식시키는 가장 성경적 관점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칼빈주의 구원의 서정의 특징2)
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서정은 인간의 영적인 상태는 그의 지위, 즉 율법과의 관계에 의존하며, 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근거로 하여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괴적인 죄의 영향력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전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서정에서의 각 항목마다에 하나님의 역사(은혜)를 배제하지 않으며,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칭의'는 논리적으로 우선하며, 중생이 회심보다 선행한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도 구원을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역사라는 것을 강조하며(29-30문) 성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칭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만을 주장하며(33문),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의 순서에 있어서는 구원론의 후반부에 위치하는 '예정론'이 실제로는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우선적인 구속 사역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제 2스위스 신앙고백서」의 10장 "하나님의 예정과 믿는 성도들의 선택에 관하여"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순은혜로 사람의 그 무엇을 조건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의지하시는 믿는 성도들을 예정 혹은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지 우리를 직접 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이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도 칼빈주의적 특성인 중생과 회심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즉 철저하게 구원과 관계하여서 그 출발점과 마지막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맡겨진 것이지 인간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4.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양자의 차이점3)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있어서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중생과 회심의 순서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점이다. 이것은 사소한 차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차이점인 것이다. 이 순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개혁주의와 비개혁주의 신학의 많은 지류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구원에 있어서 그 절대적인 주권을 갖고 이끄시는가? 아니면 인간이 주도해 가는가? 하는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이런 차이점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교회실정이다.
그 중요한 차이가 되었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칼빈주의자들에게서는 부르심을 중심으로 중생을 회심 앞에 두어서 구원의 출발과 마지막은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결정하심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구원을 결정하게 되는 핵심을 회심으로 잡고 이것을 중생되기 전에 앞에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결정은 결국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칼빈주의 교리 중에 예정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차이점을 더욱 자세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을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선택의 섭리는 신앙이나 선행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신적인 의지는 그 활동에 있어서 외부로부터 동기지어지지 않으며 오직 내부로부터 은총이나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유기에 대한 섭리는 버림받을 만한 아무런 특별한 결점이 없어도 그렇게 정해진다. 그는 그의 죄에 있어서 또는 그 죄에 의하여 구별되어지지 않는다. 그가 버림받게 되는 것은 단순히 본성과 습관의 죄성 때문인데 이러한 죄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므로 모든 인간들은 동일하게 죄책과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비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견해가 가지는 윤리적인 불완전성을 강조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이 선택적이든, 유기적이든간에 철저하게 조건적임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그의 예지에 의해 최종적으로 믿음을 가질 자들은 선택하시고 불신앙을 가질 자들은 유기하신다. 신의 예지는 그의 의지적인 결단들에서 추론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직관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 하나님이 알고 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인식되어져야 하지는 않다. 이처럼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의지에서 시작된 것과 인간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되어지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게 되었다.
더욱 회심에 대한 부분에서도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 모두 이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필요충분적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영혼에 직접 작용하여 생기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알미니안주의는 신적 행위는 진리를 통해 중재되며 따라서 신체적이고 강제적인 것과 구별되는 도덕적이고 설득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회개와 중생의 과정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은총도 종국적으로는 거부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는 이들은 신앙은 의롭게 하는 매개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켜 주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완전한 것처럼 자비롭게 받아들여지는 불완전한 의로서 간주되었다.
결국 이런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생각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지만, 그 은혜란 그것에 대한 사람의 수납 여부의 결정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할 뿐이지, 결정적이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구원에 관한 궁극적 선택이란 사람 자신에 의한 것" 이라 하여, 하나님의 개인의 택정은 그분의 주권적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권 안에서 그분의 예지에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차이점은 선을 행할 수 있는 타락한 인간들의 능력을 부당하게 격상시켜서,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훼손시키려는 자들이며 그들이 카톨릭이건 개신교이건 간에 이에 대항하여 칼빈주의자들은 계속적으로 싸웠던 것이다.
칼빈도 중생을 회심 전에 두는 중요한 이유를 그의 로마서 8장 주석에서 부르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경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선택하여 그의 특별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그들이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우리가 선택받게 된 원인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시고 선하신 뜻 외에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 즉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정을 입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그의 강요에서 더욱 확고하게 밝히고 있다. 즉 믿음이 회개에 앞서는 것이지 회개로 인해서 믿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회개의 근원이 믿음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회개를 하게 만들기까지에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데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칼빈주의적 독특성은 다른 비개혁주의에서 나타난 부분과 매우 다름을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칼빈주의를 제외한 다른 사상에서는 그 공통성이 인간론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유일하게 칼빈주의만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칼빈주의적 구원개념만이 가진 그 독특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칼빈주의적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공통된 소리는 구원의 서정이 단독적으로 분리돼서 언급되어서는 안 되며 전체적으로 함께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야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게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 자신도 이 부분에 있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소명, 칭의, 그리고 마침내는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주의적 독특성의 중요성을 바르게 세워야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해 주신 구원의 참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만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가 바르고 겸손하게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자세하게 가르쳐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찬양받으시게 하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할 것이다.(*)
........................................
1) http://cafe.daum.net/cgsbong ; https://blog.naver.com/jkp5733/222743200661. (2023. 12.1. 인용)
2) jkp5733님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kp5733. 2023.12.1. 인용.
3) jkp5733님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kp5733. 2023.12.1. 인용.
첫댓글 글 잘읽었습니다.
근데, 회심이 회개+믿음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