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가장 많은 연구 논문을 남긴 나라는 일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이고, 그 다음이 훈적비가 서 있는 중국이며, 그 주인인 우리나라와 북한은 오히려 이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연구가 적다. 숫자적으로만 적을 뿐만 아니라 훈적비의 주인인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주체적인 연구 부분이 빠져 있다. 오늘 발표가 이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그 핵심적 문제점만 요약해본다. 첫째, 주인공에 대한 호칭과 비의 성격조차 하나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이 비에 의하면 고구리 19대 임금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되어 있는데, 교과서에서는 광개토대왕, 구리시 앞 기념광장에서는 광개토태왕, 『삼국사』에서는 광개토왕 등 여러 가지 호칭으로 쓰고는 있으나 바른 호칭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로 통일하지도 못하고 있다. 호태왕비가 어떤 성격의 비인지에 대해서도 묘비 또는 릉비(陵碑, 영희·이유립·이형구·박시형 등), 훈적비(문정창 등), 석비(김덕중) 또는 고비(古碑) 또는 그냥 비(碑, 나머지 다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따로 발견된 수묘비가 있으므로 능비는 아니고 장수왕이 아버지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훈적비’라고 해야 옳다.
▲ 경기도 구리시 광개토태왕 고아장에 있는 동상과 비석 ©편집부 | | 둘째, 일본의 비문 조작이나 왜곡에 대한 연구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그간 신채호, 문정창, 이유립, 이진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군부세력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만들기 위해 비의 내용 중 없어져야 할 글자는 의도적으로 파내고, 필요한 글자를 만들어 넣는 등의 조작을 했다고 주장해왔으나 정작 우리나라 제도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중국이나 일본 측 학자들의 주장에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다. 셋째, 현재의 제도권에서는 이 훈적비의 원문을 찾는 연구가 전무하다.현재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없어진 글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탁본과 석문을 비교·연구 한다면 상당히 원문에 가까운 석문을 찾을 수도 있다고 본다. 석문을 처음으로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주인 영희 조봉(榮禧 莜峰)이 1903년에 발표한 『고구리영락태왕묘비문고(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라는 석문에는 결자가 15자에 불과하며, 같은 만주인인 김육불(金毓黻, 1887~1962) 이 1934년 『봉천통지(奉天通志)』 금석편에 게재한 석문에도 일본인이 판독하지 못했거나 판독할 수 없다고 본 글자의 다수가 판독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귀한 자료들이다. 그리고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이 최소한 8개 정도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연구한다면 어느 정도 원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더구나 비 제도권 사람들이 찾아놓은 원문이 이미 오래 전에 발표되어 있는데, 이들이 그 글자를 그렇게 읽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1903년 일본이 우리나라 찬집청에 비문의 석문을 싣도록 압력을 넣는 과정에서 정3품의 자리를 박차고 퇴직한 후 현지에 가서 연구를 하여 원문을 복원한 창강 김택영(1922년), 그 제자로서 이를 보완한 소앙 조영은(1932년)이 있다.그리고 원석정탁본과 영희 및 앞 두 사람의 연구를 종합하여 고구리 한문(필자는 태학사문이라 함)으로 해석한 연구결과를 2014년 초에 발표한 김덕중 등의 자료가 있다. 또한 1926년에 석문한 것으로 알려진 이덕수와 이를 조금 보완하여 1987년에 내놓은 이유립의 석문도 있다. 그런데도 제도권에서는 이들의 연구 내용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원문을 찾으려는 연구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당시의 고구리식 한문으로 해석한 연구가 거의 없다.김택영의 『한국역대소사』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비문을 발견하고도 그 내용을 해석하지 못하고 만주인인 영희 조봉이 부분적으로나마 해석했다고 한다. 중국의 문사들이 해석을 하지 못했다면 중국식 문장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증거다. 그런데 김덕중 외에 대부분 우리나라의 제도권이나 비 제도권 학자들도 중국이나 일본 학자들과 똑 같이 현재 또는 중화식 한문법으로 해석하면서 구두점의 위치 등을 토의하는 선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르게 해석하게 되어 김덕중의 고구리 한문식 해석도 여러 해석 중의 하나로만 취급되고 있을 뿐 권위 있는 원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가야가 낳고 백제가 기른 저편 나라’ 일본은 가락국의 아들나라로 맥을 이어오며, 낳아주신 어머니 나라의 옴니를 조상신으로 모시고 오미가미(옴니 가미 즉 엄마神)를 믿고, 가야를 흠모하는 기미가요(‘가야여 영원하라!’라는 노래)를 지금까지도 국가로 부르면서, 어버이의 나라 구다라(百濟)가 망하고 난 후로는 구다라의 주류 혈통으로 권력이동이 되어 자연스럽게 구다라의 日本으로서 천왕제도를 이어오고 있지 않은가? 현재의 국호가 日本國(rìběn리밴 : 닛본고꾸 にっぽんこく)이지만 전통적으로 불러오던 젭섬 즉 저편 섬(Japen) 나라로 사용하고, 더더구나 자유민주주의의 첨단시대에서 선진국을 자처하면서도 굳이 천왕의 위상을 지키려하는 노력을 지켜보면서 실증사학자들은 느끼는 바가 없는 것인가? 이제는 우리글을 빌려다 쓰던 중화인의 문법으로만 해석하려들지 말고 왕조의 사대교린주의와 총독부의 반도사관에서 벗어나, 우리글을 우리의 어법으로 우리 조상들의 찬란했던 시절에 대해서 바르게 독해하여 호태왕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고한문과 고구리 한문, 우리의 옛말 등에 대한 연구와 함께 진행되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제도권 학자들은 최초 일본인이 내놓은 의도적 왜곡 해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연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이런 연구를 한 비 제도권의 연구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현재 일부 일본인들이 과거 자국의 선학들의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연구를 발표하고 있는 점을 참고하면서 일본의 석문에서 글자 일부를 다르게 보거나 구두점의 위치나 주어를 달리 보아야 한다는 정도의 문제 제기를 넘어, 왜곡시킨 내용을 바로잡아 우리의 고대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사료로 다시 살려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호태왕비문 연구회’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발표가 제도권이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을 지적한다는 정도의 성과라도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