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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사랑
제목 : 사랑이 기준입니다!
성경 : 고전 8:1~13
찬송 : 220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526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고전 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 8: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고전 8: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 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고전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1912년 32살의 나이로 우리나라에 온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 이름으로 서서평 선교사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평생 헌신하신 분입니다. 한번 전도를 떠나면 말을 타고 220km이상을 순회할 만큼 열정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과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조선간호부협회를 설립하고, 이일학교라는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를 설립한 서서평 선교사는 1934년 5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담요 반방,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뿐이던 담요도 다리 밑 가난한 자들과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죽으면서 자신의 시신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녀의 소식이 전해지자 수천 명에 이른 광주 시민과 나병 환자가 몰려나와 ‘어머니’를 외치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남겨진 침대 머리맡에는 그녀의 신조였던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고 섬기는 삶은 비단 선교사나 특별한 은사가 있는 자들에게 국한된 사명이 아닙니다. 이 계명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상숭배는 고린도 성도들이 직면한 여러 문제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요한 항구 도시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고린도는 각종 우상의 신전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음란한 제사, 그리고 방탕한 문화가 성행하던 곳입니다. 특히 우상에게 바친 제물 중 일부는 바치는 자 혹은 신전의 제사장이나 관리들을 위해 남겨졌는데, 이는 잔치 음식에 사용되거나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되파는 용도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를 비롯한 그리스-로마 문화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리스도인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간접적으로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생겨났고,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자유케 하신 믿음으로 음식을 먹었고, 어떤 이들은 그런 자들을 보면서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까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를 설명하는데, 8장에서는 사랑이 기준이 되는 일반 원칙을, 9장에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 사도의 권한을 포기했던 바울 삶의 예증을, 10장에서는 우상숭배를 피하라는 권면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적용을 보여 줍니다.
√바른 지식은 좋은 것이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 있는 이방 신전들은 희생 제물로 바쳐진 제물을 먹고 나누는 정육점 혹은 연회장 역할도 했습니다. 따라서 도시의 상점에서 팔리는 고기는 대부분 이방 신전에서 종교 의식을 치를 때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들이었습니다. 우상 신전에 바쳐진 제물은 아무래도 좋은 가축을 쓰기에 고기의 질도 좋고 가격도 비싸지 않을 테니 성도들은 그 고기를 사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사 먹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부정한 음식이 아닌지 의문을 가졌고 그렇다면 그 음식을 먹으면 우상 숭배에 동참하는 것인지 고민하여 바울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기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 앞에서 ‘지식은 교만’, ‘사랑은 덕’이라는 8~10장의 주제 문구를 제시합니다.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 우상에게 비쳤던 제물에 대하여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식이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거들먹거리게 만들고, 사랑은 사람들을 바르게 세워줍니다.(새한글성경)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제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바울의 이 설명은 앞으로 세장에 걸쳐 논의될 권면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해결책도 취사선택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성도의 권리 사용과 포기’라는 주제로 전환하여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그것을 위해 지식과 사랑을 대조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지식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면 그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을 얻은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반면에 사랑은 누구든지 실천하면 그것이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고전 8: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바울은 지식을 거부하고 사랑만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으로 나아가 공동체의 유익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식이 교만하게 한다고 해서 모든 성경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성경 지식과 교리로 신앙생활을 분별하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의 삶에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식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방향으로 적용해야 하는데, 인간적인 욕심과 죄 된 속성은 그 지식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 스스로 교만해지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충족을 넘어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도 안에서도 지식을 드러내며 서로 도전할 때보다 사랑을 중심으로 서로 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이 전제되어 지식이 겸비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로 가져야 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엇일까요?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우상은 아예 없다.”라는 것과 “하나님 한 분 말고는 신이 아예 없다.”라는 것을요.
고전 8:5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신’도 많고 ‘주’도 많이 있지요.
고전 8:6 그러나 우리에게 신은 하나님 한 분, 곧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우리 자신들이 존재하는 것도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또한 주도 예수 그리스도님 한분뿐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우리 자신들이 존재하는 것도 그분을 통해서입니다.(새한글성경)
이 단락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은 ‘우리는 알고 있다’(오이디멘)으로 시작하면서, 바울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길게 서술합니다. 실제로 그가 이 단락에서 서술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성부 성자에 대한 바울과 초대교회의 이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많은 신’(쎄오이 폴로이)과 ‘많은 주’(퀴리오이 폴로이)가 있다고 하지만,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단 한 분임을 설명합니다. ‘한 하나님’과 ‘한 주님’에 대한 바울의 서술은 고린도에 있는 많은 가짜 우상들에 견주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유일성을 대조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은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고 소비하는 일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지식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상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즉 우상 제물에 어떤 사악한 영적 기운이 스며들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건물이나 기물 또는 제사 음식 등에 영적으로 영향력이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 가르침을 옳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금지할 때에도 바른 지식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도 위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도들 가운데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형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8:7 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 그 지식이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을 섬기는 습관에 젖어 있어서 자기들이 먹는 고기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듯이 먹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렵혀집니다.(새한글성경)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희생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가르쳐준 지식을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지식과 현실의 대조를 강한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나’로 표현합니다. 고린도 교회 가운데 이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 온 배경과 문화 때문에 다른 신들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우상에 대한 습관’이 남아 있어 마음과 양심 속에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먹는 고기가 우상에 바쳐졌던 제물임을 알았던 이들은 그것을 먹는 행위가 우상 숭배라는 죄라고 생각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진다고 바울은 경고한 것입니다.
고전 8: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전 8:8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곁에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모자라게 되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넘쳐 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새한글성경)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스스로 제한할 것을 권면하면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8절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음식 자체가 각자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음식으로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닙니다. 음식 자체는 성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기에 음식의 섭취 여부는 성도의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음식을 먹는 것 자체보다 형제에 대한 관심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가 9절에 나타납니다. 믿음이 강한 성도의 권리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들이 걸려 넘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 8:9 그렇지만 주의하세요! 여러분의 이 권한이 약한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새한글성경)
‘너희의 자유’는 ‘너희의 권한’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조심하라’(블레페테)고 강한 어조로 권면합니다. 즉 형제를 넘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행위를 제한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다 형제를 넘어뜨린다면, 이는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른 지식을 소유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음식을 먹었다고 더 잘사는 것도 아니고 먹지 않았다고 못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믿음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에게 디딤돌이 될지언정 걸림돌 즉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국 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이 약한 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동 기준을 바르게 정립하라!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 그로 인해 형제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고전 8:12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형제자매들한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에 상처를 줍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그리스도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고전 8:13 바로 이런 까닭에, 음식이 내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고기를 아예 영원히 먹지 않겠습니다! 내가 나의 형제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새한글성경)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관계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 지식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포기하시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셨다면, 믿음이 강한 자는 음식 먹을 권리를 포기할 만큼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당시에도 ‘우상을 멀리하라’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행 15:19~20)이 있었지만, 바울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의 원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바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 곧 이기적인 욕망의 성취와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내려놓고,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을 자청하며, 낮은 곳에서 겸손히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깊어지고, 믿음이 견고해질수록 사랑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 더욱 드러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예수님이 사랑하신 형제자매와 이웃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은 ‘내가 사랑으로 섬기고 있는가?’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오늘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어 자문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 목회적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가장 큰 원칙을 고수합니다. 그것은 지식보다 귀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덕을 세울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냅니다. 연약한 이들도 사랑의 원리 아래서 보호를 받고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모든 은사를 시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하며(12:31, 13장) 그 자신이 먼저 사랑의 본을 보였습니다.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계명입니다. 우리 믿음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13:2). 또 사랑의 속성은 교만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13:4).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참된 지식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