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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11장 인류의 역사 | 12장~ 선민 열조의 역사 |
1:~2: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언약수립 3:~11: 언약자손을 보호하심 |
창세기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의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는 내용인데, 그 중에서 1장부터 2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언약을 수립하시는 내용입니다.
1장과 2장에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만드셔서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주시며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언약하시는가 하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언약을 세우시고 세우신 그 언약을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를 보내어 이루어 주시므로 하나님 스스로가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가 되심을 계시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대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됩니다.
1장에서 2장까지의 의미분석 | |
1장1절~1장25절 아담과의 언약수립 준비 | 1장26절~2장25절 아담과 언약 수립의 시행 |
1~ 8 하늘 위의 세계 창조 9~19 하늘 아래 세계 창조 20~25 각종 생물 세계 창조 | 1:26~2:3 3대 언약 수립 2:4~25 선악과 금식령 |
창세기 1장1~25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세 가지 언약으로 나라를 세우실 준비를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 여섯째 날에 지으셔서 그에게 세 가지 언약으로 나라를 세우실 준비를 하시려고 먼저 하늘 위의 세계를 비롯해서 하늘 아래 세계와 각종 생물의 세계를 만드시는 섭리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정복하여 다스리게 하시려고 모든 우주와 만물을 먼저 만들어 놓으심으로 그와 언약 세우실 준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1절부터 8절까지는 하늘 위의 세계 창조 내용인데 1절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언약을 수립하기 위해 먼저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말씀으로 시공의 세계에 드러내신 것이지 하나님께 없는 것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말씀으로 직접 만드신 시공의 세계를 통해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태초’는 영원 안에서 시간성을 갖기 시작한 우주 기원의 시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태초’라는 것이 영원 안에서 시간성을 갖기 시작하였다고 해서 이때는 현재의 시간 개념으로는 계산이 불가능한 때입니다. 이때에 있어서 또 하나의 시간적 용어는 낮과 밤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낮과 밤은 현재의 해와 달이나 별들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날에 창조된 빛과 어두움이 주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기 전에는, 영원한 세계에 영원 자존하시며 영원무궁토록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는 상태였는데, 그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들을 만드시기 전에는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시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저자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소개하셨고 알게 하시며 믿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계시 역사를 통하여 저자들을 사용하셨고 시대적 언어를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하심】
이어진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임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말씀은 창조 당시의 모습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처음 상태의 모습은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그리고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누십니다. 우주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3절)에서의 ‘빛’은 2절의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즉 어두움에서의 빛이요 구별입니다. 이때의 빛은 태양 빛과는 다른 것입니다. 천하계에 속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입니다. 이 빛은 하늘(궁창) 위, 즉 천상계의 빛으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빛입니다.
이 ‘빛’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6절에서, 장차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하고 생명의 빛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언약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사도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추었으나 어둔 세상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시며 또한 9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증거합니다.
‘빛’은 어두움에서 나타나고 어두움에서 증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함께 혼돈과 공허 그리고 혹암을 조성하시고 거기에 ‘빛’을 통하여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십니다(4절). 그리고 언약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상도 역시 어두움의 상태입니다. 이는, 죄로 인하여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는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실 참 빛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에 대한 언약이며 예표와 그림지와 모형입니다.
‘빛’이 밝혀지며 드러내지 않고서는 어느 무엇도 볼 수가 없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본다’는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 자신의 참된 모습, 즉 죄의 모습을 ‘참 빛’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참 빛에 의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생의 말과 글이라 할지라도 나를 죄에서 건져주지 못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해주지도 못합니다. 오직 참 빛되신 예수밖에 없으며 그 빛으로 부름받은 자가 참된 복을 받은 자입니다. 빛으로 나아가는 자가 진정 지혜자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께서 일을 하실 수 있을 때를 낮이라 하고 일을 하실 수 없을 때를 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낮과 밤은 태양이나 달과 별이 주관하는 천하계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하루와 같이 이십사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으로 계산이 가능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창조 첫째 날에 만들어진 천상계의 것과 같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빛이 그리스도의 예표라면, 그 빛에 의하여 만들어진 낮과 밤도 그리스도와 무관하지 아니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는 둘째 날, 궁창인 하늘로 아랫 물과 윗 물로 나누시는 내용입니다. 1절의 ‘천지’에서 물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땅(지)을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덮고 있는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서 궁창과 같은 공간을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궁창을 중심으로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차원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6,7절). 그리고 이 궁창을 하나님께서는 ‘하늘’이라고 칭하십니다(8절)
여기서 ‘하늘’은 첫째 날의 ‘천’과는 차원이 다른 하늘입니다. 태초에 창조된 하늘은 위의 물 세계 위에 있는 하늘이지만 둘째 날에 창조된 하늘은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사이에 있는 하늘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시편 기자가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148:5~5)고 찬양한 내용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수정같이 맑은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였습니다(계22:1). 그 생수의 강물이 바로 하늘 위의 물입니다. 하늘 아래의 물은 지구상에 있는 하천과 강과 오대양과 지하와 공중에 있는 물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현대 과학자들은 하늘 위의 세계인 천상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하늘 아래의 세계인 천하계만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9절부터는 하늘 아래 세계 창조의 말씀인데 9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셋째 날, 하나님이 천하 물에서 뭍이 드러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십니다(9,10절). 하늘 아래의 물이 물을 덮고 있는 상태에서 뭍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때의 뭍, 곧 땅은 첫날에 창조한 땅과는 차원을 달리해서 창조하십니다. 또한 계시록 22장1절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땅’과도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로 이루어진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좋으신 대로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11절에서 13절은 하나님께서 땅에 각종 식물이 나게 하시는 창조 섭리를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셋째 날에는 아직 태양이 없는 상태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현재의 저주가 덮힌 땅에서 자라는 식물은 태양 빛에 의해 자라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양 빛이 아닌 창조 첫째 날에 지으신 빛 아래서 식물이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 과학적인 식물학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흐르는 생명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달마다 실과를 맺는 것을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계22:1~2). 하나님께서 태양 빛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의 빛으로도 식물을 자라게 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 빛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방광체가 아니며 이것은 곧 첫째 날의 ‘빛’으로부터 받아 발광(發光)합니다. 그리고 첫째 날의 빛 또한 빛되신 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셨고 이것은 모든 과목이 각각 그 종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자들은 말하기를, 모든 종류의 생물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단계의 변천 과정을 거쳐 아주 다른 종류들로 진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허구입니다.
14절부터 19절의 말씀은 넷째 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을 지어 주야를 주관케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광명체들로 하여금 징조(徵兆)와 사시(四時)와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이 이루고, 또 그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고 명하셔서 그대로 되게 하십니다. 여기서 넷째 날의 광명은 곧 천상계가 아닌 천하계의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날’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원문으로 ‘욤(יום)’이라는 말로서 그것을 번역하면 지금의 이십사 시간 한 날을 의미한다 하여 창조 육일을 모두 똑같은 이십사 시간 하루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구십육 시간(첫째날~넷째날)에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였으며 그리고 사십팔 시간에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십사 시간 한 날은 넷째 날에 와서야 광명들에 의하여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어지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넷째 날 이전의 한 날은 첫째 날의 빛에 의하여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져 낮과 밤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의 한 날이 지금의 이십사 시간인지, 아니면 이천 사백 시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태양이 생기기 이전의 한 날과 이후의 한 날이 분명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넷째 날 만드신 태양 빛은 천하계의 것이며 첫째 날의 빛은 천상계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큰 광명, 곧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 곧 달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들어 그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십니다. 그래서 해와 달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궁창에 태양계를 만드셔서 천하계인 지구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지어 놓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좋으신 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구 안에서 살아가는데 이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20절부터 23절의 말씀은 다섯째 날, 물 속의 모든 생물과 공중의 새를 창조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에서 번성하는 수많은 물고기와 생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리고 공중에는 날개 있는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속의 그 수많은 물고기와 생물들이나 공중의 그 수많은 새들은 각각 그 종(種)을 달리하여 창조하신다는 말입니다(21절).
바다 속의 물고기들과 생물들의 생태계나 공중의 나는 새들의 생태계는 하나님께서 조화를 이루도록 정하여 놓으신 어류나 조류 세계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같은 생태계의 정해진 질서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여도 변하거나 바뀌어지지 아니합니다.
고등어가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자란다하여도 40센티를 크게 초과하지 못하며, 돌고래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산다 할지라도 없는 후각이나 제 일 뇌신경이 살아나지는 아니하며, 참새는 곡식을 쪼아 먹고 독수리는 작은 새 종류나 작은 들짐승을 사냥하여 먹이로 삼는 것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2절)고 하십니다. 이 명령에서의 핵심은 번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시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시며 번성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였으므로 반드시 번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스스로 하도록 명하신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며 하셨습니다. 앞으로 성경 끝까지 반복할 내용이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며 명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심이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과 25절 말씀은 여섯째 날, 땅은 육축과 짐승을 종류대로 내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여섯째 날에 마지막으로 창조하십니다. 이들 동물들 역시 처음부터 각각 그 종을 달리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즉 진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진화론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주관하는 시기- -해와 달이 주관하는 시기-
영 은혜에서출발 태 초 시공형의시작 천지만물창조 원 | 천상계(하늘 위의 세계) | 천하계(하늘 아래 세계) | 안 식 | ||||
첫째날(시간) | 둘째날(공간) | 셋째날 | 넷째날 | 다섯째날 | 여섯째날 | ||
천 빛 수면 | 웃 물 | ||||||
(종류별로) | |||||||
궁 창 | 육지 혼돈이질서로 바다 | 해 천체 창조 달 별 | 새 생물 창조 물고기 | ||||
흑암이 어둠으로 공허 혼돈 지 | 사람 | ||||||
아랫물 | 영혼창조 | ||||||
동물 |
공허⇒공간형성/혼돈⇒질서유지/흑암⇒광명주관/복⇒생육번성 /종류대로 번성
▪(첫째날) 천지: 천상계기준 흑암: 물리적.영적 어두움 빛: 성질이 지금의 태양빛과 다름
▪(둘째날) 공간: 형상과 형상사이. 형상은 곧 물체
●창조 정리 ※첫날의 빛과 넷째 날 창조된 햇빛은 서로가 다르다 - 첫째 날의 빛이 날을 주관 / 넷째 날의 해가 날을 주관 ※첫날의 수면과 둘째 날의 아랫물 또는 셋째 날 바닷물은 다르다 ※첫날의 하늘과 둘째 날 하늘(궁창)은 서로가 다르다 ※첫날의 땅(지)과 셋째 날 땅(육지)은 서로가 다르다 ⇨ 빛과 힘과 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 여호와. |
1장에서 2장까지의 의미분석 | |
1장1절~1장25절 아담과의 언약수립 준비 | 1장26절~2장25절 아담과 언약 수립의 시행 |
1~ 8 하늘 위의 세계 창조 9~19 하늘 아래 세계 창조 20~25 각종 생물 세계 창조 | 1:26~2:3 복주시며 나라에 대한 언약 2:4~25 선악과 금식령 |
26절과 27절 말씀은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언약의 대상인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며 언약 세우실 준비를 완료하시고, 언약의 대상인 사람을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것입니다(26절).
본문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우리’는 1인칭 복수 대명사인데, 성경에서 하나님에 관한 명사들이 대부분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같은 예는 크고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히브리 어법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엘로힘(אלהים)’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남성 복수명사로 되어 있으며, 이를 직역하면 ‘능력들’입니다. 그러나 ‘엘로힘’이라는 말을 ‘능력들’이라는 복수명사로 번역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라고 단수 명사처럼 번역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라는 하나님에 대한 대명사도 1인칭 복수로 사용한 것입니다.
다음은 ‘형상’과 ‘모양’입니다. 이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형상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실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형상’하면 단순하게 어떤 ‘크기’나 ‘모형’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 에베소서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크기나 모양이 아니고 내면세계, 영의 세계에 관한 것으로 사도 바울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고 하였는데, 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의 모습,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과 같은 내면적이고 신령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외형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만물을 다스릴 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는데, 여기서 ‘다스리게 하자’는 것은 곧 통치를 뜻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27절)라고 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에는, 사람이 피조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은 곧 하나님의 뜻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사람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8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나라에 대한 세 가지 명령으로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절)고 하십니다. 이는 명령이면서 언약입니다.
위의 세 가지 언약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라를 세우신다는 약속’입니다. ‘생육 번성’의 자손과 ‘충만과 정복’의 땅 그리고 ‘다스림’, 이 세 가지는 곧 백성과 영토와 통치입니다. 이 ‘나라 세우심’에 대한 언약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이어가는 맥입니다. 즉 첫째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명하신 나라에 대한 언약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표’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통치하는 왕으로 지어져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장차 오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예표로서의 언약적 의미를 지닙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아담을 왕적 기능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아담은 언약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신 분이십니다(요14:9).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언약하셨습니다. 이 ‘복주심’은 조건이나 행위나 상대적이 아니라 무조건이요 일방적이요 절대적인 복으로써, 그에 따른 명령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것에 대한 언약이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이고 절대적이기에 명령으로 주어지며 이것을 은혜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이 은혜 언약이 성경의 출발임을 밝혀줍니다. 이 은혜 언약이 12장부터 등 장하는,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지는 나라 즉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형적으로 보여주며, 이 은혜 언약이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로 실체적이며 완전하게 성취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땅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시며 먹을거리가 되게 하시고(29절), 모든 짐승과 새와 기는 모든 것에게는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십니다(30절). 하나님께서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에게는 채소와 열매를 먹거리로 주셨고, 짐승과 새 등에게는 푸른 풀을 먹거리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 지으신 것을 보시고 매우 좋았다고 하십니다(31절).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아담과 하와에게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에덴에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풍요한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이 또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라는 하늘의 양식을 공급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셨고, 요한복음은 이를 생명의 떡으로 오신 그리스도 사건으로 해석합니다(요6:31~33).
요컨대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양식을 공급하심으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을 에덴에서는 생명 나무의 열매로 보이셨으며 이것이 실체적으로 계시록 2장 7절에서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로 말씀하십니다.
창조 내용에서 다시 한번 구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날의 빛은 넷째 날의 해와 차원이 다릅니다. 첫째 날의 수면과 둘째 날의 아랫물 또는 셋째 날의 바닷물은 다릅니다. 첫째 날의 하늘〈천〉과 둘째 날의 하늘〈궁창〉은 서로가 다릅니다.
첫째 날의 땅〈지〉과 셋째 날의 땅〈육지〉는 서로가 다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날’입니다. 넷째 날 이전의 날들은 넷째 날 이후의 날과는 차원이 다른 차원이 다른 날입니다. 해와 달과 별에 의한 날이 아니라 1절의 천지에 의한 날입니다.
창조 내용에서 중요한 것 하나를 정리입니다. 그것은 여섯째 날까지 반복된 ‘좋았더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이는 첫째 날 만드신 ‘빛’ 때문입니다. 이 ‘빛’으로 인해 태초의 상태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을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에 ‘좋았더라’고 하시다가 창조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신 전능자시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므로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물에 대해서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 세계에서 작정하신 것을 시공간의 세계에 뜻대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좋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썩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좋았더라’라는 것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전해지는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인류의 조상인 첫째 아담을 만드신 여섯째 날의 ‘심히 좋았더라’에서 증거됩니다.
첫째 아담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첫째 아담을 세상에 만드신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작정하신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기 때문에, ‘심히 좋았더라’는 것은 약속하는 ‘하나님의 기쁘심’이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육일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육일의 창조 섭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한다는 것을 바울은 설명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6,17)
여기서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는 것은 창조의 섭리 역사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한 여섯째 날 만드신 아담에게 복주시며 ‘나라’(번성,정복,다스림)에 대하여 명하신 것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나라’ 세우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