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이 개안 후 가장 변한 것은 자연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피는 생명”이라며 일체의 육식을 하지 않았다. 독에 빠진 쥐를 건져주고, 자기를 문 지네를 풀숲에 놓아주었다. 그는 혹여 개미를 밟을까봐 길을 걸을 때도 조심스러워했고, 나무와 풀이 꺾인 것을 보고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이공은 말했다.
“세상엔 버릴 것이 없지라. 잡초만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지라우. 버린 돌이 집 초석이 되곤 한당께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째서 그것을 모른다요.”
이공은 죽음이 가까워오자 석 달 동안 곡기를 끊었다. 화학산 골짜기에 찾아온 다섯 명의 제자들이 마른 장작처럼 말라 거지 옷을 입고 있는 그를 둘러메자 그는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춤을 추듯 노래하며 눈을 감았다. 큰 재산가였던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은 땅 한 평은커녕 옷 한 벌도 없었다.
그의 유산은 말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만 전도하라 했던 그를 따랐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성녀 수락기댁, 소록도를 세운 나환자들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걸인들의 아버지 강순명 목사 등 수많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만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