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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편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시편 1편을 '성령께서 쓰신 서문"이라고 하는 어떤 사람들의
의견을 인용했다. 참으로 적절한 소개이다. 이 시편에서는 두 가지 주제가 도드라지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 두 주제는 다른 시편들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첫 번째 주제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뚜렷한 구분이다. 성경 전체, 그리고 특별히 지혜문학은
인간을 이 두 가지 절대적인 범주로 나눈다. 세 번째 부류는 없다. 시편 32 편 36편 그리고
112편 역시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두 번째 주제는 인간의 현재적 형통과 궁극적인 운명에 관한 것이다. 시편 1편의 처음과 마지막
단어는 선택의 길을 보여준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반면 경건치 않은 자는
망할 것이다. 이 '축복'과 '저주'의 과정은, 이 시편을 깊이 묵상한 것으로 보이는 예레미야에게도
나타나는데(렘 17:5-8), 이생의 삶에서도 이미 선명하게 나타난다.
시편 1편의 시인은 이 두 주제를 다루면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 즉 사람이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 아니면,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을 걸으리라는 말씀을 내다보고 있다(마 7:13-14).
의인의 번영 (1-3절)
의로운 사람은 먼저 소극적으로 묘사된 후, 그다음에는 적극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이 표현은 세 종류의 병행구들로 면밀하게 짜여 있다. 즉 따르다, 서다, 앉다', '꾀, 길, 자리
그리고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그것이다. 나아가 일종의 점강법이 적용된다. 경건한 자들은
악한 자들의 충고를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나아가서 경건한 자들은 결심하고 악을 행하는
무리의 곁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대놓고 하나님을 비웃는 냉소주의자들 가운데 내내 섞여
지내는 일은 더더욱 없다.
경건한 자들은 저러한 사람들에게 이끌리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자신들의 규범으로 삼는다
(2절). 이 율법(토라)은 십계명만을 말하거나 모세 율법의 모든 규례들과 규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나침반이 되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말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어졌지만 여호와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의로운 사람의 기쁨이다. 이 기쁨은 신생의 척도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8:7)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내면에서 이루시는 역사, 즉 다시 나게 하시는 역사의 결과로,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명확한 요구들을 거슬러 행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 존재는
율법을 입증하고 보증한다(시 19편 408 1121 119편을 보라), 경건한 자들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가운데 주야로 율법을 묵상, 혹은 정독한다.
오래된 라틴어 성경의 저자인 히에로니무스는 시편 1편을 애송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주야 묵상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먼저는 사막에서, 후에는 전승으로 알려진 베들레헴 예수
나신 곳 근처의 작은 동굴에서 거의 35년간 성경을 쉬지 않고 연구하였다.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인의 경험을 일부 나누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경 묵상은 끝나지
않는 기쁨이다.
그렇다. 이것이 의로운 자들의 특성이다. 매일의 행위와 관련한 지침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여론이나 경건함이 없는 세상의 믿을 수 없는 추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묵상한다. 그 결과 그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된다(3절).
이 은유는 성경에서 흔히 나온다. 어떤 나무를 연상하건 간에, 나무는 사시사철 푸름과 우거짐,
계절마다 열리는 열매,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도 시들지 않는 잎사귀를 뽐낸다. 나무가
뿌리로 물과 양분을 쉴 새 없이 흡수하는 것처럼, 의로운 자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매일
묵상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채움을 받는다. 이러한 나무는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심겨 있다. 여호수아와 같은 자들은 무엇을 하든 형통한다.
악인의 멸망 (4-6절)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그들의 현재 상황과 미래의 운명은 아주
다르다.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나무와는 달리, 그들은 마치 마르고 성가시기만 한계와 같다.
물가에 심기우기는커녕, 바람에 휩쓸려 간다.
이 은유는 성경 시대와 성경 지리에서 익숙한 것이었다(비교 시 35:5; 사17:13: 마 3:12),
타작마당은 보통 언덕 위 딱딱하고 평평한 곳, 바람이 잘 닿는 곳에 펼쳐진다. 밀을 커다란 키
혹은 삽으로 퍼서 허공으로 던진다. 그러면 알곡은 아래로 떨어져서 수북이 쌓인다. 가벼운 겨는
사방에서 부는 바람에 날리고 만다.
악한 자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들은 바짝 말라있고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쉽게 바람에 흩날린다. 악인을 뜻하는 히브리 단어의
배후에 있는 기본 개념은 '가만있지 못함' (참조 사 57:20-21)이다. 나무는 튼실하게 심겨 있지만,
겨는 불안정하다. 하나님이 당대에 베푸시는 심판을 통해 그들을 체질하기 시작하실 때, 특히
마지막 심판이 다가올 때,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경건한 남은 백성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절은 전체 시편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이다. 이 절로써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갈린다.
여호와께서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고 만다.
묵상을 위한 질문
● 시편 기자는 우리의 인생에 오직 두 가지 길만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외에 제3의 길처럼 보이는 길은 없었는가?
성경은 왜 두 가지 부류의 사람(길)만 이야기하는가?
● 시인은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가? 소극적인 진술 적극적인 진술로 나눠서
생각해보라.
● 의로운 자들의 가장 큰 특성은 무엇인가? 그러한 특성이 내 삶에는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는가?
- 존 스토트 저, 김성웅 역, ‘내가 사랑한 시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