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관덕정(觀德亭) 벽화
대들보에 그린 제주 최초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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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풍상에 소실되며 훼손·변형…역사의 현장과 함께해
제주의 풍토를 중국 고사와 관련 해석·형상화 의의
제주 역사의 생생한 현장
관덕정(觀德亭)은 세종 30년(1448) 가을 안무사(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했다. 관덕정을 창건하게 된 전말(顚末)에 대해서는 당시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의 관덕정기(觀德亭記)가 있다.
관덕정은 당시 제주도 출신인 동지중추부사 고득종(高得宗)이 신석조에게 관덕정의 모습을 자세하게 알려주면서 창건기를 부탁했고 신석조는 신숙청과 종씨라는 이유로 관덕정기를 짓게 됐다. 관덕정의 편액은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그것은 소실되었고 현재 전해오는 것은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라고 한다.
관덕정은 원래 활을 쏘는 장소로 만들어졌다. 무술을 익혀 몸가짐을 바로 하고 덕을 쌓고자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관덕정은 제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관덕정은 광장으로서 제주의 중심 공간이었다. 폐주(廢主) 광해군의 눈에도 어리었고, 이재수의 장두 정신도 기억하고 있다. 4·3 발발의 원인이 된 3·1사건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임시도청 청사, 도의회 의사당, 미공보원 상설문화원으로도 사용하는 등 관덕정은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격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관덕정 광장은 탐라국 입춘굿 놀이가 벌어졌던 문화공간이었고 몸서리치는 공개처형의 학살 현장이기도 했으며 생산과 소비가 만나는 제주 풍물 시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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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덕정의 옛 모습
관덕정의 벽화
기록상 현존하는 15세기 제주의 회화로는 두 종류가 전해온다. 세종 30년(1448)에 그려진 관덕정 벽화와 세조 12년(1466) 이전에 그려진 내왓당 무신도가 그것이다. 이 두 회화는 제주도 화풍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관덕정 벽화에 대한 보고서로는 1973년에 발행된 「濟州道文化財 및 遺蹟綜合報告書」와 1995년에 간행된「觀德亭實測調査報告書」가 있다. 관덕정 벽화는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皓)'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홍문연(鴻門宴)'의 7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 벽화를 그린 화가를 제주인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거나 혹은 중국의 을파소(乙巴素)라고 추측 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희박하다. 따라서 관덕정 벽화의 작자는 미상으로 남겨졌다.
먼저 '십장생도'를 살펴보자. 십장생이라 함은 학·거북·사슴·소나무·대나무·불로초·돌·물·구름·해를 말한다. 이들은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하여 장수를 상징한다. 십장생도는 정월 초에 새해를 축하하고 만복을 기원하던 세화(歲畵)나 회갑연 등에서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상산사호'는 진나라 말에 불안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기 위해 상산에 숨어 살던 네 명의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기리계(綺里季)·녹리선생(?里先生)·하황공(河黃公)을 말하는데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희어서 이들을 사호(四皓)라고 불렀다. 이들은 상산에 살면서 영지(靈芝)를 캐 먹으며 살다가 한나라 조정에 등용됐다. 한고조가 태자를 폐위하고 척부인(戚夫人)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로 교체하려 하자 여후(呂后)가 장량의 계책을 이용하여 고조가 평소에 존경했던 상산사호를 불러들어 태자를 보필하게 했다. 고조가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상산사호를 소개하니 고조는 태자를 폐위하려던 생각을 바꾸고 척부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초가(楚歌)를 부르게 했다. 상산사호는 조선시대 곧잘 인용되던 설화인데 화가들이 자주 그렸던 소재이기도 하다.
'적벽대첩도'는 조조의 백만 대군과 손권, 유비의 연합군의 적벽 싸움을 그린 그림이다. 이 벽화는 일종의 전쟁 기록화인데 충절과 의리, 국난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후세 장수들의 귀감으로 많이 다뤄졌다.
'대수렵도'는 원래 호렵도(胡獵圖)라고 하여 북방 계통 호족(胡族) 복장을 입은 기마병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미 중국 북송 때부터 그려졌으며, 요·금나라 호족들이 생활의 일부인 사냥 장면을 많이 그렸다. 우리나라는 傳공민왕의 '天山大獵圖(천산대렵도)', 강희안의 '出獵圖(출렵도)'가 있으며, 제주 화공 김남길의 '橋來大獵圖(교래대렵도)' 등 조선 후기에 와 많이 그려졌다.
'진중서성탄금도'는 조조와 유비 양편에게 매우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던 가정성(街亭城)이 조조에게 함락되자 이에 당황한 유비가 홀로 말을 몰아 서성(西城)의 누각에서 태연자약하게 앉아 거문고로 태평곡을 연주하는 그림이다. 조조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고사를 표현했다.
'홍문연'의 홍문은 지금의 중국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동쪽에 있는 땅이름으로 항우가 거짓 항복을 한 유방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던 고사를 그린 것이다.
'취과양주귤만헌'의 화제(畵題)는, 1973년 「제주도문화재 및 유적종합보고서」에는 醉過楊州橘滿軒이라고 하여, '수레 헌(軒)' 으로, 1995년 「관덕정실측조사보고서」에는 醉過楊州橘滿轎라 하여, '가마 교(轎)'로, 그리고 현재 복원된 관덕정 벽화에는 '수레 거(車)' 라고 쓰였으니 어느 것이 원래의 화제(畵題)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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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장생도
두목(杜牧)의 벽화
지금까지 '취과양주귤만헌'의 화제(畵題)가 있는 그림은 두보(杜甫)의 일화라고 알려져 있다. 1973년 만농 홍정표 선생과 1995년 김봉옥 선생이 쓴 두 보고서에 두보의 일화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벽화는 두보의 일화를 그린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두보의 시나 행적을 찾아봐도 이 벽화의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당나라 때의 시인 두목(杜牧)의 삶과 예술이 이 벽화의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
落魄江湖載酒行
楚腰纖細掌中經
十年一刻楊州夢
嬴得靑樓薄倖名
강호에 넋이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내며
초나라 미인 가는 허리 손안에 품다보니
양주의 십년 세월이 짧은 꿈 같구나
얻은 것은 술집의 바람둥이라는 소문뿐이네
'추회(追懷)'라는 이 시는 두목이 양주에서 장안으로 떠날 무렵 지었다는 시이다. 두목이 양주자사(楊州刺史·지방 목민관)를 지내면서 남긴 일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취과양주귤만헌'이라는 벽화이다. 술에 취해 가마를 타고 지나가는 두목에게 기생들이 유혹하기 위해 귤을 던지자 두목의 가마에 귤이 가득했다는 내용이다. 두목(杜牧)의 자는 목지(牧之), 사람들은 그를 두목지(杜牧之)라고도 불렀다. 당나라 말엽 경조부 만년현(京兆府 萬年縣), 지금의 협서성 서안시(陜西省 西安市) 태생이다. 술을 좋아하는 호걸로서 이상은(李商隱)과 함께 이두(李杜)라 하며 두보(杜甫)의 시풍과 비슷하다고 해서 소두(小杜)라고도 불렸다.
두목의 '취과양주귤만헌'의 대표적인 일화는 판소리 '춘향가'중 이도령이 방자를 데리고 사또 몰래 광한루 구경 가는 대목에 "'취과양주귤만거(醉過楊州橘滿車)'의 두목지(杜牧之) 풍채로구나. 호호 거리고 나간다"라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또 순조~철종조에 활동했던 명창 신만엽(申萬葉)을 '광대가(廣大歌)'에서는 "신선달(申先達) 만엽(萬葉)이는 구천은하(九天銀河) 명월백로(明月白露), 맑은 기운 취과양주(醉過楊州) 두목지"라고 하여 두목에 빗댄 것도 두목의 기인 행각과 풍류를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관덕정 벽화는 15세기 창건 시기와는 다르게 풍상에 소실되면서 벽화가 많이 훼손되어 변형됐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15세기 회화의 분위기와 지방 화공의 솜씨를 살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귤과 사슴, 지초(芝草) 등 제주의 풍토를 중국의 고사(故事)와 관련시켜 작품을 해석하고 형상화 한 점은 관덕정 벽화의 변하지 않는 의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전은자: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 2009년 11월 10일 <제민일보>
첫댓글 그나마 덩그런히 남아있던 관덕정이라도 있기에 제주도에도 뭐가 있어구나 하고 육지사람들이 생각했을듯허다.
그러게,,,,
요즘 중국사람들이 좀 온다고 비수기 없는 제주라 우스대는 건 좀...ㅎㅎ
문화적이고 인문적인 자산이 빈약하고 빈곤한 역사를 메꿀 그 무엇을 잘 찾아야 할텐데...
맨날 강정이나 반대하느라 목매는 사람만 조명을 하는 언론도 있으니
호꼼덜 정신덜 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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