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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스타들의 소소한 과거 이야기’ 11편 – 카 입니다.
* 평어체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동영상은 유투브 펌
카 – 코치(Coach)
이번 ‘카’ 코너에서는 코치, 즉, NCAA와 NBA, 양 리그에서 모두 지휘봉을 잡은 감독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NCAA와 NBA는 농구라는 종목만 같을 뿐 사실상 다른 리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상이한 샷 클락(NCAA : 45초 → 35초 → 30초, NBA : 24초)과 경기 시간(NCAA : 전후반 20분씩 40분, NBA : 12분씩 4쿼터 48분), 그리고 개인에게 허용되는 파울 개수도 NCAA는 5개, NBA는 6개로 다르며 NCAA는 팀 파울에 따른 자유투도 *원 앤 원(One & One) 제도를 적용하는 등 다른 부분이 상당히 많다. 즉, 이 두 리그에서 감독으로써 모두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성공 사례보다 실패 사례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서두에 미리 알리는 바이다.
* 원 앤 원 : NCAA는 전 후반 각각 7번째 팀 파울부터 팀 파울에 의한 자유투가 주어지는데 7~9개까지는 자유투 1개를 먼저 넣어서 들어가면 두 번째 자유투까지 던질 수 있고 실패하면 자유투 기회는 거기서 끝나는 제도. 10번째 팀 파울부터는 기본값으로 두 개가 다 주어진다.
래리 브라운
NBA : 30시즌, 10개 팀
올해의 감독상 4회(1973, 1975, 1976, 2001)
우승 1회(2004, 디트로이트)
NCAA : 11시즌, 3개 팀
전미 올해의 감독상 1회(1988)
우승 1회(1988, 캔자스)
래리 브라운은 현재까지 NCAA와 NBA, 양 리그에서 모두 우승을 한 유일한 감독이며 미국 농구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레전드 감독 중 하나이다. 1940년 생으로, NBA와 NCAA 도합 41시즌 동안 감독직을 수행했으며 70대 중반의 나이까지도 NCAA의 SMU에서 지휘봉을 잡는 열정을 보여준 래리 브라운은 그 이후로는 특별히 적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도 공식적으로 은퇴 선언을 한 상황은 아니다.(80대 중반을 바라보는 지금 시점에서 복귀는 사실상 쉽지 않겠지만..)
72-73시즌, 32세의 나이로 당시 ABA의 캐롤라이나 쿠거스의 감독으로 첫 커리어를 시작한 브라운은 그 이후 덴버 너게츠를 거쳐서 1979년, NCAA의 최대 명문팀인 UCLA 감독으로 NCAA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첫 해부터 팀을 파이널 포에 보냈으나 부정 리크루팅으로 이 시즌의 파이널 포는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며 UCLA에서 두 시즌을 보내고 다시 NBA의 뉴저지 네츠에서 두 시즌을 보낸 후 83-84시즌부터 다시 NCAA의 캔자스 대학교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부임 5시즌째인 1988년, 본인 감독 커리어 첫 우승이자 캔자스 학교 역사상 두 번째 우승을 달성한다.
그리고 래리 브라운은 우승 직후에 바로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직을 수락하면서 다시 NBA에서 도전을 이어가며 LA 클리퍼스, 인디애나, 필라델피아, 디트로이트, 뉴욕, 샬럿까지 70세가 될 때까지 약 2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NBA 감독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2004년, 디트로이트의 배드보이즈2를 이끌고 LA 레이커스를 파이널에서 무찌르면서 63세의 나이에 NBA 우승까지 달성, 현재까지도 유일한 NCAA와 NBA에서 모두 우승한 감독이 되었다. 70세의 나이로 샬럿에서 물러난 브라운은 그 이후에도 바로 NCAA의 SMU 감독을 맡아서 2015년에는 SMU를 22년 만에 토너먼트에 진출시키기도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렉 포포비치와의 관계
래리 브라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그렉 포포비치’일 정도로 브라운과 포포비치는 멘토와 멘티이자 베스트 프렌드, 라이벌로써 40년 가까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1940년생인 브라운과 49년생인 포포비치는 9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 포포비치가 디비전 III의 초무명 학교에서 지휘봉을 잡던 1980년대 중반, 브라운의 코칭 스킬을 배우기 위해 자원봉사 코치 개념으로 캔자스 대학 코칭 스태프에 합류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1988년 캔자스 우승 직후, 브라운이 샌안토니오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당시 코치였던 R.C.뷰포드와 그렉 포포비치 등을 함께 코칭 스태프로 데려갔다. 훗날 뷰포드와 포포비치가 단장과 감독으로 샌안토니오 왕조를 구축하게 되는 출발점이 바로 래리 브라운인 것이다.
브라운과 포포비치는 둘도 없는 절친이지만 성향은 판이하게 다른 것도 재미있는 사실인데 브라운이 다소 즉흥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스타일이라면 군인 출신답게 포포비치는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본인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철두철미하게 움직이면서 결과를 내는 스타일이다. 이는 이 둘의 커리어나 사생활에서도 드러나는데, 브라운이 3명의 부인과 결혼생활을 하는 등 다소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긴 반면 포포비치는 평생 1명의 부인과 살았고 2018년 4월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5년이 넘게 지났지만 현재까지도 재혼에 관한 기사나 소문은 일절 나오지 않는 지고지순한 결혼생활을 했다.
감독으로 걸어온 길만 봐도 완전히 대조적인데 브라운은 NCAA, NBA를 통틀어서 가장 긴 시간 한 팀의 지휘봉을 잡은 것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보낸 6시즌에 불과한 반면, 포포비치는 96-97시즌 도중에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으로 부임해서 이번 23-24시즌까지 한 번도 팀을 떠나지 않고 28시즌 동안 스퍼스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종전 기록이었던 제리 슬로언 전 유타 재즈 감독의 23시즌을 훌쩍 뛰어넘는 NBA 역대 단일 팀 최장 부임 감독이다.
그리고 이 두 사제지간은 2005년, 파이널이라는 꿈의 무대에서 상대팀으로 만나기도 했는데 직전 시즌 우승팀이었던 디펜딩 챔피언, 래리 브라운의 디트로이트와 2시즌 전 우승팀이었던 포포비치의 샌안토니오가 맞붙었으며 전략 전술의 대가들답게 극강의 수비농구로 두 팀은 혈전을 펼쳤고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샌안토니오가 승리, 포포비치는 커리어 세 번째 우승을, 브라운은 커리어 두 번째 준우승을 하게 된다.
[사제 지간의 외나무 다리 승부, 2005년 NBA 파이널 7차전 하이라이트]
철저한 팀 농구, 수비 농구를 펼친다는 점에서 색깔은 비슷했으나 샌안토니오에는 팀 던컨과 마누 지노빌리라는 내, 외곽에 크랙이 각각 1명씩 있었던 반면, 디트로이트는 혼자 경기 흐름을 바꿀 정도의 선수는 없었던 것이 승패를 갈랐다.
팀 던컨 7차전 기록 : 25점 11리바운드 3어시스트 2블락
마누 지노빌리 7차전 기록 : 23점 5리바운드 4어시스트
브래드 스티븐스
NBA : 8시즌, 1개 팀(2013 ~ 2021, 보스턴 셀틱스)
NCAA : 6시즌, 1개 팀(2007 ~ 2013, 버틀러)
준우승 2회(2010, 2011)
현 보스턴 셀틱스 단장을 맡고 있는 브래드 스티븐스는 래리 브라운과 함께 NCAA와 NBA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사실상 유이한 감독으로 꼽힌다. 브라운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우승 트로피를 단 한 번도 들어올리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아직 젊은 인재인 만큼 언제든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서 우승을 시킬 수 있는 역량은 충분한 감독이다.
스티븐스는 아주 독특한 과거 이력으로도 화제가 되었는데, 먼저 스티븐스는 고등학교 때까지 농구 선수를 하였으며 인디애나 주 내에서는 꽤 두각을 드러냈지만 신체적인 한계 탓인지 장학금 제의는 거의 받지 못했고 결국 디비전 III, 고향인 인디애나 주의 아주 작은 학교인 드포(DePauw) 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만 4학년 시즌에도 평균 5점에 그칠 정도로 대학 무대에서는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결국 농구선수로써의 브래드 스티븐스는 거기가 끝이었다. 그리고 스티븐스는 졸업 후 미국 굴지의 제약회사이자 고향인 인디애나 주에 본사가 위치한 ‘Eli Lilly and Company’에서 꽤 높은 페이의 샐러리맨 제안을 받으며 안정적이면서 풍족하고 평범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이 더 앞섰다.
결국 스티븐스는 버틀러의 무보수 어시스턴트 코치로 들어가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고생길을 시작한다. 그리고 2000년부터 7년 간의 고난길 끝에 2007년, 30세의 나이에 버틀러의 감독으로 승진하는데 연봉 18,000달러(한화 약 2,400만원)의 박봉 어시스턴트 코치 시절에도 하루 14시간씩 비디오 분석을 하는 노력과 농구에 대한 열정이 맺은 결실이었다.
물론, 스티븐스가 맡기 직전 시즌에도 토너먼트 16강까지 오를 정도로 버틀러 대학교가 당시 약한 팀은 아니었지만 스티븐스는 감독 첫 시즌에 정규 시즌에서 단 3패만을 하는 엄청난 성적을 기록하며 7번 시드로 2년 연속 팀을 토너먼트에 진출시켰고 토너먼트에서 1승을 하면서 데뷔 시즌부터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리고 대망의 09-10시즌, Horizon 컨퍼런스 일정 18전 전승을 거두며 5번 시드로 토너먼트에 진출한 버틀러는 무려 결승전까지 오르는 최고의 신데렐라 학교가 되며 결승에서도 최강 듀크를 상대로 거의 승리를 할 뻔 하는 등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브래드 스티븐스라는 이름은 대학 농구 젊은 명장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된다.
10-11시즌, 에이스였던 고든 헤이워드가 NBA로 진출하면서 지난 시즌 대비해서 정규시즌 퍼포먼스는 훨씬 떨어졌고 결국 8번 시드로 겨우 토너먼트에 진출한 버틀러 대학교는 그러나 토너먼트에서 1번 시드 시라큐스, 2번 시드 캔자스 스테잇, 5번 시드 미시간 스테잇까지 연달아 잡아내며 2년 연속 결승전에 오른다. 비록 결승에서 코네티컷에세 패하며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치기는 했으나 스티븐스는 이제 버틀러라는 미드 메이저 컨퍼런스 소속 학교가 담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 되었고 비시즌마다 감독을 필요로 하는 메이저 컨퍼런스 학교 후보군에 오르면서 NCAA를 대표하는 명장 반열에 오른다. UCLA가 스티븐스 영입을 위해 년간 3M까지도 오퍼했다는 루머까지 퍼졌지만 의외로 스티븐스 감독의 선택은 NBA였고 그것도 최고 명문팀, 보스턴 셀틱스였다.
셀틱스의 금액은 6년 22M로 연간 4M 가까이 되는 큰 금액이기는 했으나, 대학 무대에서 NBA로 큰 장기 계약을 받고 옮긴 과거 선배 감독들(존 칼리파리, 릭 피티노 등)의 사례 등에서 NBA에서 선수는 커녕 어시스턴트 코치 생활도 해본 적이 없는 스티븐스에게 너무 과한 금액과 기간이 아니냐는 혹평이 잇따랐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스티븐스는 감독 2년차 시즌, 40승 42패로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 것을 시작으로 이메 우도카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고 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매 시즌 플레이오프로 팀을 이끌었으며 컨퍼런스 파이널 3회 진출이라는 업적을 남겼다.(파이널 진출 0회는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 누구보다 스마트하지만 선수단 장악, 카리스마 등에서 2%의 아쉬움을 남기면서 본인 스스로도 현장 수장인 감독보다 Office의 수장인 단장이 어울린다고 판단한 스티븐스지만 개인적으로 스티븐스 감독의 현장 지휘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근거는 하나도 없는 무모한 예측이지만 대학교 무대로 돌아가 Blue Blood 팀의 수장으로 그 대학교를 우승으로 이끄는 스티븐스 감독의 모습이 10년 이내에 펼쳐질 것만 같기도 하다.
[2010 NCAA 결승전 버틀러 vs 듀크 하이라이트]
정확히 하프라인에서 던진 고든 헤이워드의 버저비터 슛이 한끗 차이로 빗나갔는데 이게 들어갔다면...?
프레드 호이버그
NBA : 4시즌, 1개 팀(2015 ~ 2018, 시카고 불스)
NCAA : 9시즌, 2개 팀(아이오와 스테잇 5시즌, 네브래스카 4시즌 - 현재진행형)
Big 12 올해의 감독상 1회(2012)
프레드 호이버그 감독은 NBA 감독 선택이 지금까지의 감독 커리어를 놓고 봤을 때 다소 독이 된 케이스이다. 2010년, 30대 후반의 나이로 모교인 아이오와 스테잇 감독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호이버그는 5시즌 동안 115승 56패, 승률 67.3%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첫 시즌을 빼고 4시즌은 모두 팀을 토너먼트에 보냈으며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고는 토너먼트에서도 매해 1승 이상씩을 거두는 등 아이오와 스테잇의 중흥기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기, 조지 니앙과 몬테 모리스라는 NBA급 선수들도 키워내면서 감독으로써의 주가를 높였다.
호이버그 감독은 15-16시즌, 본인이 선수 시절 전성기 나이 때 4시즌간 뛰기도 했던 시카고 불스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NBA 감독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2010년대 초반, 탐 티보듀 감독 체제 하에서 매 시즌 우승을 노릴 정도의 강팀이었지만 르브론 제임스라는 거대한 산에 막혀서 파이널 무대 한 번 밟아보지 못하고 티보듀 감독을 경질한 불스가 호이버그라는 NBA 감독 경력은 일천한 인물을 감독으로 선임한 것은 꽤 의외의 선택이라는 평이 많았으며 첫 시즌 지미 버틀러와 파우 가솔, 데릭 로즈가 모두 건재했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이는 불스가 이어오던 7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마침표를 찍는 다소 실망스러운 성적이었다.
16-17시즌, 불스는 가솔과 로즈가 팀을 떠나고 새로 영입한 드웨인 웨이드와 지미 버틀러를 중심으로 팀을 개편, 호이버그는 시카고에서 보낸 4시즌 중 유일하게 이 시즌, 플레이오프에 팀을 진출시킨다. 8번 시드였던 불스는 1번 시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원정 첫 2경기를 모두 잡아내며 깜짝 이변의 주인공이 되나 했지만 주전 포인트가드이자 구심점인 라존 론도가 부상으로 3차전부터 내리 결장하며 결국 3~6차전을 모두 내주고 1라운드 탈락하고 말았다.
한계를 느낀 시카고 구단은 30대 노장들이었던 론도, 웨이드, 버틀러를 모두 처분하고 잭 라빈과 라우리 마카넨 등을 중심으로 한 20대로만 구성된 로스터로 팀을 완전히 갈아엎었고 일각에서는 대학 무대 감독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호이버그에게는 이런 팀 구성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이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호이버그는 17-18시즌 27승 55패, 그리고 18-19시즌 5승 19패를 기록하고 2018년 12월에 경질되면서 NBA 무대를 떠났다.
호이버그 감독은 불스에서 경질된 이후, 아이오와 스테잇에 비해서 농구 프로그램이 훨씬 열악하다고 할 수 있는 네브래스카 대학 감독으로 NCAA 무대에 복귀하는데 복귀 첫 두 시즌 동안 14승 45패를 기록하는 등 지금까지 네브래스카에서 40승 83패, 승률 32.5%를 기록하면서 대학 무대에서 명성을 날렸던 지휘력도 아직까지는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7 플레이오프 2차전 시카고 불스(8) vs 보스턴 셀틱스(1), 시카고 빅3 하이라이트]
(아마도) 호이버그 감독이 NBA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가장 행복을 느꼈던 경기일 것이다.
지미 버틀러 : 2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4스틸 2블락
드웨인 웨이드 : 22점 4리바운드
라존 론도 : 11점 9리바운드 14어시스트 5스틸
존 칼리파리
NBA : 3시즌, 1개 팀(1996 ~ 1999, 뉴저지 네츠)
NCAA : 32시즌, 3개 팀(메사추세츠, 멤피스, 켄터키 – 현재진행형)
우승 1회(2012)
NCAA에서 무려 30시즌 넘게 지휘봉을 잡으며 파이널 포 6회(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기록은 4회), 우승 1회 등의 업적을 남겼고 현재까지 총 승수 790승으로 역대 NCAA 감독 최다승 14위에 랭크되어 있기도 한 존 칼리파리는 2000년대 후반부터 원앤던(1학년만 마치고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것)을 장려하고 리크루팅에 적극 활용하며 5스타 신입생들을 대거 싹쓸이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감독이다. 실제로 Top 고교 유망주들을 항상 데려가서 1학년만 마치고 NBA에 보내는 전략으로 현재 NBA에서 뛰고 있는 많은 선수들이 칼리파리의 제자들이며 이 때문에 NCAA를 전혀 모르고 NBA만 보는 팬들도 칼리파리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을 정도이다.
하지만 실제로 칼리파리가 NBA 감독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텐데, 칼리파리는 메사추세츠에서 8시즌 동안 좋은 성적을 남긴 후 1996년, 당시 NBA 감독 최고 대우이자 감독 겸 단장이라는 파격 조건으로 5년 15M의 계약을 체결하고 뉴저지 네츠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1959년 2월 생인 칼리파리의 당시 나이가 37세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조건은 더욱더 파격적으로 느껴지는데, 첫 시즌인 96-97시즌, 26승 56패로 직전 시즌보다도 4승이나 낮은 성적으로 마감한 칼리파리는 97-98시즌을 앞두고 과감한 트레이드를 통해 전체 2번 픽으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된 대형 루키, 키스 밴 혼을 데려온다.
당시만 해도 이례적인 3점슛을 쏘는 빅맨이었던 밴 혼은 데뷔 시즌부터 19.7점 6.6리바운드를 기록한다. 케리 키틀스, 제이슨 윌리엄스, 샘 카셀, 켄달 길 등 올스타급이 되기에는 한 끗 모자라지만(물론, 카셀은 말년에 1회 선정되긴 함), 자신의 롤에서 욕심내지 않고 이타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20대 선수들을 모아놓자 칼리파리의 진가가 나오기 시작했고 칼리파리는 43승 39패로 4년 만에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비록 이 시즌 우승팀인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를 만나 1라운드에서 스윕패를 당하고 말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팀으로 네츠의 컬러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며 ‘역시 칼리파리’라는 찬사까지 듣게 된다.
하지만 98-99시즌, 파업으로 평소보다 4개월 가량이나 늦은 2월에 개막되어서 단축 시즌으로 펼쳐진 이 시즌에 뉴저지는 첫 20경기 3승 17패라는 믿기 힘든 성적표를 받아들며 완전히 와해되고 칼리파리 역시 계약기간을 한참 남은 시점에서 경질되고 만다. 그리고 99-00시즌, 필라델피아 세븐티 식서스에서 잠시 어시스턴트 코치를 한 칼리파리는 00-01시즌부터 멤피스 대학의 감독으로 NCAA 무대로 복귀, 2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NCAA 무대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칼리파리는 NCAA에서도 명암,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스타일의 감독이기는 하다. 원앤던으로 인해 ‘육성과 성장’이라는 대학 농구 본연의 전통을 망쳤다는 혹평도 듣지만 반대로 이러한 전략으로 전국구 스타를 싹쓸히하는 ‘리크루팅의 귀재’라는 닉네임도 따라붙는다. 또, 빅맨들에게 슛과 1대1 공격을 철저히 봉인하는 다소 꼰대 같은 철학으로 칼리파리 산하에 있었던 빅맨들(ex – 앤써니 데이비스, 칼-앤써니 타운스 등)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본인이 키워낸 슈퍼스타 가드들, 데릭 로즈나 존 월 등에게는 유로 스텝을 적극 장려해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번 2023 드래프트에서 켄터키의 케이슨 월라스가 전체 10번으로 OKC에 지명되면서 무려 16년 연속 본인 제자 중에 1라운드 픽 선수를 배출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월라스가 칼리파리 산하 선수들 중 19번째 Top 10픽 선수가 되면서 마이크 슈셉스키(24명)에 이어 해당 분야 2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슈셉스키 감독이 은퇴한 현 시점, 칼리파리가 1위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이며 논란 여부와 별개로 칼리파리가 대학 무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빌리 도노반
NBA : 9시즌, 2개 팀(OKC 5시즌, 시카고 4시즌)
NCAA : 21시즌, 2개 팀(마샬 2시즌, 플로리다 19시즌)
컨퍼런스 올해의 감독상 4회(1995, 2011, 2013, 2014)
우승 2회(2006, 2007)
현 시카고 불스 감독인 빌리 도노반 역시 NCAA와 NBA에서 모두 감독직을 수행한 경력이 있으며 특히 대학 무대에서는 명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먼저, 도노반 감독은 릭 피티노 감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도노반은 프로비던스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도노반이 3학년 시즌이던 85-86시즌, 릭 피티노 감독이 프로비던스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도노반이 4학년이던 86-87시즌, 프로비던스는 6번 시드로 파이널 포 무대까지 최대의 신데렐라 팀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비던스의 에이스가 평균 20.6점 7.1어시스트를 기록한 베테랑 가드, 도노반이었으며 이 시즌의 파이널 포 행으로 피티노 감독도 전미를 대표하는 젊은 명장으로 떠오르게 된다.
파이널 포 행으로 전미를 대표하는 스타가 된 도노반은 1987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22번, 전체 68번으로 유타 재즈에 지명을 받지만 재즈에서는 데뷔를 하지 못하고 웨이버되며 고향 팀인 뉴욕 닉스에 재입단하지만 87-88시즌, 44경기 평균 2.4점을 넣는데 그치고 결국 선수로써의 도노반은 여기까지였다.
5-11(180cm), 171파운드(77kg)의 도노반은 성인 프로 무대에서 뛰기에 피지컬의 명확한 한계가 있었고 결국 1989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바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다. 은사인 릭 피티노 감독이 89-90시즌부터 맡게 된 전미 최강팀, 켄터키 대학교의 코칭스태프로 합류한 도노반은 1993년, 피티노 감독과 함께 켄터키의 파이널 포 행에 일조하고 빌리 도노반의 리크루팅 능력과 지도력에 감명받은 마샬 대학교가 1994년에 도노반을 감독으로 선임한다. 이때 도노반의 나이는 만 28세로, 부임 당시 디비전 I 대학교 역사상 가장 어린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마샬 대학에서 비록 팀을 토너먼트 무대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두 시즌 연속 60% 이상 승률을 기록한 도노반은 메이저 컨퍼런스인 SEC의 플로리다 감독으로 선임되어서 본격적인 명장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플로리다는 1994년 론 크루거 감독이 파이널 포에 한 번 진출시키기는 했으나 농구에서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학교로 도노반 감독 부임 전까지 학교 역사상 토너먼트 진출 횟수가 5회에 그치고 있던 팀이었다.
도노반 감독은 96-97시즌부터 19시즌 동안 플로리다에 있으면서 토너먼트 진출 14회, 파이널 포 4회, 우승 2회(2006, 2007 백투백), 통산 승률 71.5%라는 경이로운 업적을 쌓게 된다. 그리고 백투백 우승은 NCAA 역사상 도노반 포함 단 6명의 감독만 기록했으며 플로리다의 2006년과 07년 백투백 우승 이후 현재까지 16년째 백투백 우승한 팀은 없다. 그리고 도노반 감독은 조아킴 노아, 알 호포드, 브래들리 빌, 데이비드 리와 같은 올스타 선수부터 우도니스 하슬렘, 마이크 밀러, 맷 보너, 도리안 핀리-스미스까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팀에 큰 보탬이 되는 알짜 선수들까지 수많은 NBA 리거를 길러내며 NCAA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오른다.
20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50대 초반까지 NCAA 무대에서만 20년이 넘게 감독 생활을 하던 도노반은 2015년, 최고의 선수 구성이지만 항상 아쉬움을 남기던 OKC의 감독으로 발탁되어 NBA 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그리고 첫 시즌인 15-16시즌, 55승 27패로 서부 3위로 팀을 이끌었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당시 73승 팀이던 골든스테이트를 상대로 4차전까지 3대1로 앞서며 첫 시즌부터 대형 사고를 칠 뻔 했으나 한끗 차이(아 클레이 탐슨...!)로 파이널 무대를 밟지 못했고 에이스였던 케빈 듀란트가 이 시즌 이후 팀을 떠나며 결국 OKC는 우승 후보에서는 한 걸음 멀어지고 말았다. 도노반 감독은 이후로 4시즌 더 OKC를 맡았으나 OKC는 이 4시즌 동안 모두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고 결국 20-21시즌부터는 OKC를 떠나 시카고 불스 감독을 맡게 되었고 현재까지 불스를 이끌고 있으나 올 시즌 전까지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1회, 승률 5할 미만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개인적으로는 도노반 감독은 대학교에 더 어울리는 감독이라고 보고 있고 곧 60대가 되는 나이까지 감안할 때 시카고 불스 감독직을 내려놓게 되면 대학 무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OKC vs GSW 2016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6차전 하이라이트]
* 이 경기를 OKC가 잡고 파이널에 올라갔다면 도노반 감독의 커리어는 물론 NBA 역사가 바뀌었을 수 있다..!
릭 피티노
NBA : 6시즌, 2개 팀(뉴욕 2시즌, 보스턴 4시즌)
NCAA : 36시즌, 7개 팀(현재 진행형)
23-24시즌, 71세의 나이로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열정 가이, 릭 피티노 역시 이 카테고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78년, 26세의 나이에 보스턴 유니버시티(보스턴 칼리지랑 다름) 감독으로 부임해서 82-83시즌, 학교 역사상 2번째이자 25년 만의 토너먼트 행을 이끈 피티노는 NBA로 자리를 옮겨 뉴욕 닉스 어시스턴트 코치를 2시즌 하고 1985년, 프로비던스 감독을 맡는다. 그리고 프로비던스 감독 2년차 때 6번 시드로 토너먼트에 올라 8강에서 1번 시드인 조지타운을 꺾고 파이널 포로 팀을 이끌면서 젊은 명장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피티노는 NCAA 명문팀이 아닌 NBA 무대로 다시 자리를 옮긴다. 뉴욕 닉스 감독직을 수락한 피티노는 첫 시즌인 87-88시즌부터 두 시즌 연속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고 88-89시즌에는 1라운드를 스윕으로 통과하는 등 NBA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고 NBA 감독으로 자리를 잡나 싶었으나 1989년 5월, 본인은 대학 무대 코칭을 더 선호한다는 발표와 함께 명문, 켄터키 대학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NCAA로 돌아간다.
그리고 피티노 감독은 91-92시즌부터 6시즌 연속 켄터키를 토너먼트로 이끌었으며 이 중 3시즌(1993, 96, 97) 파이널 포, 1996년에는 우승컵까지 들어올리며 감독으로써 최전성기 시절을 보내게 된다. 1997년 역시 결승전에 올라 2년 연속 우승에 도전했으나, 결승에서 루트 올슨 감독의 애리조나에게 패한 후 피티노 감독은 보스턴 셀틱스와 무려 10년 70M이라는 당시의 물가와 선수들의 샐러리를 고려하면 초대형 계약을 맺으며 다시 NBA에서 도전을 시작한다.
감독 커리어에서 루징 시즌(승률 5할 미만 시즌)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피티노에게 보스턴 셀틱스 감독 시절은 유일한 오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첫 시즌 43.9%의 승률을 시작으로 38.0%, 42.7%의 승률을 각각 기록했으며 4번째 시즌 12승 22패를 기록하고 결국 10년 계약의 1/3 가량만을 채우고 사퇴하게 된다. 피티노 감독 부임 직전 보스턴 셀틱스는 15승 67패를 기록할 정도의 완전 암흑기였고 당시 초특급 유망주였던 팀 던컨을 대놓고 노렸지만 로터리 픽 추첨의 불운으로 3픽(천시 빌럽스 지명, 루키 시즌 도중 트레이드)이 걸리면서 감독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로스터가 아니었음은 감안해야 하지만 어쨌든 피티노 감독은 보스턴에서의 완전한 실패 이후 다시는 NBA 무대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NCAA에서 피티노는 여전히 수십개의 학교에서 찾는 명장이었고 2001년 1월 사임한 이후 채 2개월도 되기 전에 차기 행선지를 발표한다. 쇼킹하게도 이 행선지는 피티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겨준 켄터키의 주 내 라이벌 학교인 루이빌이었으며 피티노 감독의 루이빌 부임 이후 이 두 학교는 전미 최고의 라이벌리를 형성하게 된다.
루이빌에서도 피티노는 부임 4시즌 째인 2005년, 파이널 포를 이끌며 가는 곳마다 단기간에 파이널 포 행을 달성하는 ‘파이널 포 청부사’로 이름을 떨치고 그 이후로도 승승장구하지만 부정 리크루팅(향응 접대 등)으로 NCAA에서 강력히 제재하고 있는 불법 행위가 적발되며 2011년부터 2015년까지의 모든 공식 승수가 사라진다. 이로 인해 이길 줄 아는 감독이기는 했으나 존경할 만한 스승으로써의 이미지는 많이 실추되었으며 2017년 쫓겨나듯이 루이빌 감독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몇 년간을 야인으로 지내던 피티노는 20-21시즌, 고향 팀인 뉴욕의 아이오나 감독으로 복귀했고 3시즌 동안 토너먼트 진출 2회를 달성하며 이번 23-24시즌부터 빅 이스트의 세인트 존스 감독을 맡게 되면서 메이저 컨퍼런스로 복귀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NCAA 역사상 유일한 각기 다른 3학교(프로비던스, 켄터키, 루이빌)에서 파이널 포를 이끈 감독인 피티노. 비록 루이빌에서의 스캔들로 명예는 많이 실추되었으나 선수들을 리크루팅하고 원팀으로 만들어서 성적을 내는 분야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독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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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5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의 크랙은 천시 빌럽스였죠. 토니 파커가 빌럽스를 막다가 영혼까지 털리다시피 했습니다. 양팀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요인은(한끝차이 승부여서 뭐라 말하기도 어렵지만), 벤치에서 나와 X-팩터의 역할을 해줄 선수의 존재 여부였다고 봅니다.
2005 파이널은 제가 본격적으로 NBA를 보기 시작한 이후 첫 파이널이고 아직 농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도 없던 시절 + 너무 오래 되어서 기억도 또렷하지는 않지만 저도 빌럽스가 공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기억은 납니다. 특히 당시 애송이였던 파커가 영혼까지 털렸던 것도 기억하구요. 말씀하신 부분처럼 빌럽스를 크랙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시 던컨의 임팩트가 제 뇌리에 너무 강하게 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표현이 되었던 것 같고 빌럽스의 영향력을 격하하거나 무시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빌럽스가 스탯 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항상 승부처에서 해결사 역할을 해왔고, 2005 동부 컨파와 파이널에서는 특히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었죠.
전혀 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니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정성스러운 글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