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대산문화재단, 2018년 5월 3일.
【토론문】
제1주제에 관한 토론문
맹문재(안양대 교수)
1.
윤대석의 「해방 이전 김경린의 시와 시론」은 해방 이전까지 김경린이 추구한 시와 시론의 핵심을 고찰한 논문입니다. 또한 해방 이전에 김경린이 추구한 일본어 문학에 관한 고찰은 이 영역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김경린 외에도 조향, 김경희, 임호권, 김병욱, 이봉래, 양병식 등 전후 모더니즘 시인들도 일본 문단과 관련이 있거나 일본어 시를 창작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임종국은 ‘국민문학 제2기생’이라고 부르며 친일문학으로 파악했습니다. 윤대석은 일제 말기 모더니즘 시인들의 작품이 일본어로 창작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시국색을 띠지 않았고, 어떤 측면에서는 ‘국민시’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친일문학으로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김경린 등이 일본어로 창작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후 모더니즘 시를 낳는 원천 혹은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전후 세대 문학에서 일본어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와 전후 세대 문학 경향에 일제 말기 문학 활동이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의 관점으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김수영이 「시작 노트 6」에서 자신이 일본어를 사용한 것은 이상 시인의 경우와 다른 것이라고, 다시 말해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령을 사용하고 있는 것”라고 했습니다. 윤대석은 김경린이 일본어를 사용한 것은 김수영의 ‘망령’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상 시인과 마찬가지로 민족어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김경린에게 일본어는 이상 시인처럼 조선어와 호환 가능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인공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상 시인, 김수영 시인, 김경린 시인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일본어에 대해 어떤 자의식을 가졌는지 좀 더 설명해주시길 부탁합니다. 김경린의 전후 모더니즘 시에서 일제 말기 문학 활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이 되는 면이기도 합니다.
2.
김경린은 모더니즘 시를 추구하면서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와 언어와 언어의 새로운 결합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효과를 중시했습니다. 두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세계를 포착하는 보다 정확한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을 시의 의무라는 시론을 견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한시의 즉물적 비유, 에즈라 파운드의 이데오그램(ideogramic method)과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기타조노 가쓰에(北園 克衛)의 이데오플라스티(ideoplasty) 등의 시적 방법과 연관됩니다. 파운드는 한자나 일본어 등의 표의문자가 영어 등의 표음문자와 달리 대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회화적 언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미지를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관념이 생겨난다고 파악하고 한자적 방법이라고 불렀습니다.
김경린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자 공부를 했는데, 이것이 모더니즘 기법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의 모더니즘 시 추구의 원체험으로 한문을 배운 경험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면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부탁합니다.
3.
김경린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확고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와세다대학 부설 와세다고등공학교에 유학했습니다. 그곳에서 김경린이 발견한 것은 수준 높은 일본의 모더니즘 운동이었습니다. 기타조노 가쓰에가 이끌고 있는 보우(VOU) 동인이 그러했습니다. 김경린은 보우 동인이 에즈라 파운드,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 앙드레 브르통 등과 직접 교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 모더니즘 운동의 세계적 수준에 매료되었습니다.
1940년 8월 김경린은 보우의 동인이 되기 위해 작품과 약력을 써서 일본치과대학 도서관 관장으로 있던 기타조노 가쓰에를 찾아갔습니다. 그만큼 의욕이 컸던 것입니다. 김경린이 보우의 정식 동인으로 활동한 것은 『VOU』가 폐간되고 같은 동인에 의해 창간된 『新技術』(1941. 3) 이후로 보입니다.
김경린의 모더니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보우(VOU)의 역사를 비롯해 인적 구성, 특성, 일본 시단에서의 위치 등에 대한 소개를 좀 더 부탁합니다.
2018년_04월 11일(김경린론, 대산문화재단).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