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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대가 사도실마을과 의성김씨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47 14.05.29 14: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가 칠봉리 사도실마을과 의성김씨 이야기




<동강과 한강>


 성주군 소재지에서 포천계곡 가는길 중간에 대가면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훌륭한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지명도 大家라고 한다.  성주사람들은 성주를 빛낸 사람을 말할 때는 많은 인물 중에서 흔히 兩岡이라고 대답한다.

 

양강이란? 첫째 寒岡 정구鄭逑(1543~1620)선생과 東岡 김우옹金宇?(1540~1603) 선생을 말한다.

동시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두사람은 벼슬살이도 하였지만 학문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성리학의 大家이다.

 

동강은 칠봉리 사도실(思道室)마을에서 태어났고 한강은 칠봉리 유촌(楡村)에서 태어났다.

 

한강선생은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뒷산 재넘어 수륜면 쪽에 산소를 쓰고 3년간 여막을 지키게 된 인연으로 수륜면 갓말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갓말마을에 한강 종택과 사당이 있고 한강선생을 배향한 회연서원((檜淵書院)도 대가천 건너 양정마을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동강선생을 배향한 청천서원(晴川書院)과 청천서당(晴川書堂) 또 그의 사당은 태어난 고향인 사도실 마을에 있다,



<청천서원>

 

 (청천서원 전경)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은 대가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난 913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왼쪽의 마을길로 들어서면 나온다. 입구에는 청천서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산언덕에 청천서원이 새로 복원되어 있고, 마을길을 따라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다 왼쪽으로 꺾어들면 心山 金昌淑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앞으로 곧장 보이는 건물이 사당과 청천서당이다.


   청천서원은 1729년(영조 5)에 건립되었으며 문정공(文貞公) 동강 김우옹을 봉향(奉享) 하다가 1738년(영조 14) 西溪(서계) 김담수(金聃壽)와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을 함께 종향(從享) 하였다. 청천서원의 현판은 백범 김구선생이 쓴 글씨라고 한다.

  

 

  (청천서원 현판)

 

  청천서원(晴川書院) 장판각에는 속자치통감강목판목(續自治通鑑綱目板木)이 보관되어있는데, 동강이 기축옥사(己丑獄死,1589)로 함경도 회령(會寧)에 유배(1589~1592)되었을 때 저술한 글을 판각(板刻)한 것이다. 판목의 재료는 배나무로 제작 되었고 규격은 대략 25×34cm로 모두 673매이다.


  초고(草稿) 상태로 전해오다가 1771년(영조 47) 왕명에 의해 내각활자(內閣活字)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목판본은 1808년(순조 8) 왕명을 받은 사림의 주선으로 청천서원에서 목판을 새겨 출간하였다.


   속자치통감강목(續自治通鑑綱目)은 36권 2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송나라 태조 원년(960)부터 명나라 태조 원년(1368)까지 408년간의 중국역사를 적은 것으로 조선시대 주자학 연구의 심화와 함께 대의명분과 정통론을 강조하는 사림의 역사의식이 잘 반영된 서적이다.


<청천서당>

 

   (청천서당 전경)

 

   1991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된 청천서당(晴川書堂)은 청천서원의 후신으로 동강의 12대손이며,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의 아버지인 김호림(金頀林)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세운 것이다.


   그 후 1910년에는 심산 김창숙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청천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星明學校)로 사용하였다.


   건물은 동향으로 배치된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 온돌방이 있고, 오른쪽에도 1칸 온돌방이 있다.

청천서당 바로 옆에는 동강의 불천위(不遷位)를 모신 사당이 있다.

 

  (동강선생 불천위 사당)


<동강선생의 벼슬살이와 학맥>


  동강 김우옹은 고려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太子詹事) 김용비(金龍庇)의 후손으로 의성김씨 성주입향조 절제사(節制使) 문절공(文節公) 김용초(金用超)의 7대손이다. 삼척부사를 지낸 칠봉 김희삼(七峰 金希參)의 넷째 아들로 1540년(종종 35),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思道谷)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하며 정통 성리학(性理學)의 맥을 이어받았다. 


 1552년(명종 7)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7년(선조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572년(선조 5)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입시(入侍)하여 임금으로서 지녀야할 흥학(興學)의 마음가짐을 극진히 강론(講論)하여 왕의 총애를 받아, 조정의 요직(要職)을 두루 거쳤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즉 정여립(鄭汝立)모반사건에 연루(連累)되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당시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김우옹과 정여립을 같이 천거한 일로 서로의 친분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2년에 걸친 기축옥사의 처리를 담당한 책임자는 서인(西人)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이였는데, 당시 노수신도 정승에서 쫓겨났으며 동인(東人)세력 1,000여 명이 화를 입었다고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의 위관으로 임명된 정철의 잔혹함으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많은 선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소고기를 칼로 난도질해서 다질때 철철철~~~~하면서 다질 정도로 정철에 대한 원한이 수백년 지난 후 까지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김우옹 선생도 아무 관련 없이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이 풀려 병조참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후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따르는 학자들이 많았다. 1603년(선조 36) 11월, 향년 64세로 돌아가셨다.


 사후(死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숙종 때 문정(文貞)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행장(行狀)은 동향 친구 한강 정구가 기록하고,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그 끝에 행적과 선생의 기개(氣槪)를 덧붙였다.


여정인홍절교(與鄭仁弘絶交)


山人不可見 산속의 나를 찾을 것 없네.


山路黑如漆 산길은 어두워 칠흑과 같고


何以贈夫君 아무 것도 그대에게 줄 것 없으니


巖頭一片月 산머리 조각달이나 바라보게


 이 시는 동강 김우옹이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과 절교하면서 쓴 시이다. 절교를 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시를 보내어 관계를 끊는 것을 보면 동강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두 사람은 남명 조식의 제자였는데, 어찌하여 같은 스승을 모신 두 사람이 절교까지 하게 되었을까?


 평소 남명 조식은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경의검(敬義劍)이라는 검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경의검 안쪽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바깥쪽에는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문(名文)이 새겨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 즉 불의를 척결한다는 것은 의(義)라고 하여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만년에 성성자는 동강 김우옹에게, 경의검은 내암 정인홍에게 주었는데, 두 사람의 성정(性情)을 파악하고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일찍이 정인홍을 평하여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정인홍은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많은 선비들로부터 절교를 당하였다.


 한강 정구는 1603년 남명집(南冥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인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배척하자 그와 절교하였다.


 정온(鄭蘊, 1569~1641)도 정인홍과 정구의 문인이었으나 정인홍이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고 절교를 했으며, 대암(大菴) 박성(朴惺, 1549~1606)도 정인홍과도 친하였으나 남명집의 발문에서 이황을 배척한 어구를 보고 "세상에 선정을 욕하는 군자를 본 일이 없다"라고 하고 절교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동강 김우옹도 같은 이유로 절교했을 것이다. 시를 보내어 점잖고 운치있게 절교를 통보한 것이다.


 동강 김선생은 남명선생의 문하에 있으면서 남명선생의 권유(?)로 선생의 큰외손녀와 혼인을 하였는데 망우당 곽재우 장군도 남명선생의 둘째 외손서가 되니 곽재우 장군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즉 남명 조식선생의 사위가 상산김씨 김행지(金行之)이며 김행지의 큰딸이 동강선생의 부인이다. 김행지의 둘째딸은 곽망우당선생의 부인이 된다.


 동강선생의 비문은 대가면 옥화리에 있는데 해서체(楷書體)로 되어 있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글을 짓고,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을 집자(集字)하였다. 앞면과 뒷면은 각 27행, 측면은 7행으로 새겨져 있다.

 

 

 

  (김우옹 선생 신도비)

 

 

<심산 김창숙 선생>

 

  (김창숙선생 생가)

 

 사도실 마을에는 동강선생의 13대 종손 심산 김창숙(1879~1962)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심산 선생은 구한말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로서 초대 성균관장을 지냈으며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신 분이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 선생은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과 함께 대궐 앞에 나아가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고종황제에게 올렸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술로서 나라 잃을 설움을 달래기도 했고 학문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1919년, 독립선언서에 유림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선생은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뜻을 같이하는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보냈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됐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맡았다.


 1925년, 의열단원(義烈團員) 나석주(羅錫疇)에게 폭탄을 주어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폭파하고, 독립군 양병에 힘쓰는 한편, 주만독립군(駐滿獨立軍) 군사고문으로 활약하다 치질이 재발해 수술 가료중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어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선생은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가 되어 앉은뱅이 불구자가 되었는데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활동을 하다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서 평생 그리던 해방을 맞았다. 선생은 자신뿐만 아니라 두 아들도 독립운동의 재단에 바쳤다.


 1946년, 선생은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1953년, 성균관(成均館) 초대 관장과 성균관대학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나 이승만 독재를 반대하자 문교부는 김창숙의 이름으로는 신입생 모집 불허 방침을 통보했고, 1957년, 결국 총장직도 사임한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하야경고사건(下野警告事件)으로 자유당 정권의 부정을 국민들에게 알렸으며, 40일간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나온 후 반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이승만이 집권연장을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악하자 사퇴권고문을 보내는 등  반독재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1962년 5월 5일, 박정희 장군이 5?16에 성공한 후 병석의 심산을 찾아왔으나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돌아누웠으며, 5월 10일, 8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셨다.


 요즘 지도층 사람들은 개인의 부와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되어있는 이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받친 의성인 김선생의 숭고한 정신은 백세의 사표가 될것이다.


 지금의 사도실 마을의 종가에는 김창숙 선생의 90이 넘은 며느리만 홀로 쓸쓸히 지키고 있어 독립운동 하신 후손들의 어려운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게 했다.



* 이글은 네이버블로그 赤松子 선생의 글과 문화저널21의 사진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내가 알고 있는 보잘것없는 견문을 보태어 작성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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