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이 고개를 들고 서 있다. 돌로 된 108계단에서는 숨소리도 덜컹거렸다. 심장이 벌떡였다. 숨조차 내 것이 아니다. 아이는 업어달라고 생떼를 쓴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인사말에 대꾸도 못 하고 고개만 꾸벅거린다. 그들은 완성(이룬)자의 여유를 보이며 성큼성큼 내려온다.
산길로 들어섰다. 나뭇잎 사각 이는 아우성이 정적을 깬다. 마라톤 경기처럼 시작은 같아도 어느 순간 앞뒤가 생긴다. 가지 사이로 뻗은 햇살이 길게 눈을 흘긴다.
‘낮잠을 한숨 잘까? 밀린 집안일을 할까?’ 산행을 시작할 때마다 망설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별별 유혹이 많다. 집을 나서기까지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사실 등산을 시작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폐 질환을 앓았던 나는 자주 숨이 가빴다. 빠르게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특히, 산을 오르는 일은 그 누구보다 힘든 일이었다. 5년간의 병원 치료로 겨우 고비를 넘겼다. 등산은 경쟁 없이 나만의 페이스로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나만의 세계에 빠질 수 있는 순간이다.
갑자기 비가 ‘투둑’거리는 날이면 당황스럽긴 했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금세, 눈앞이 젖어왔다. 잎 넓은 후박나무 밑으로 후다닥 숨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오밀조밀 모여들었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서로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옷은 묶은 땀내를, 땅은 먼지 냄새를 풍겼다. 언제 준비했는지 우산을 펼치는 사람이 부럽다. 광고지라도 하나 있으면 얼굴이라도 덮으련만. 수줍음이 많은 청년은 점퍼를 펄떡이며 전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긴다. 콧등 죄어오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눈물을 짜듯 끔뻑 눈을 감는다. 묵은 시선이 벗겨지는 청량감이 눈꼬리를 부풀린다.
‘별거 아냐. 맞으면 되지. 공해에 찌든 빗물도 아닌데.’ 산길에서 만나는 인연이 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숲길에는 곧은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굽은 길로 돌아갈 수도 있다. 특이한 복장의 등산객을 만나면 입가에 참지 못할 미소를 떠올리기도 한다. 동물들의 바스락거림이나 새들의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동행이 있을 때는 조금 더 용기 있게 거친 삶을 떠벌리기도 한다.
길은 상큼한 풀 냄새로 가득 찼다. 빗물 자국 따라 부엽토도 흐르다 멈추었다. 소나기가 대지 위에 그린 그림을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움이었다. 길은 펄썩거림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주는 자태로 수많은 짓밟힘을 견뎌냈다.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면 무서웠다. 굵고 가는 가지들이 사정없이 잘리는 공포로 어둠을 재우지 못했다. 그래도 산길은 말없이 누워 모든 역경을 받아냈다. 나뭇잎은 초록 이슬을 머금고 햇빛을 맞이했다. 부드러운 바람도 계절 마중 중이다. 찌든 마음도 덩달아, 때를 벗었다.
옆 사람이 찍 미끄러진다. 한눈을 팔았나보다. “어이쿠” 털썩 주저앉았다. 발목을 쥐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오가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준비가 철저한 자칭 진정한 산악인이 부목을 대 준다. 미끄러지기만 해도 됐을 걸, 팔목을 다치거나 발목을 접질린다. 두어 달 죽은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야 한다. 한 계절을 감옥에 갇혀 흘려보내야 한다. 한편으로는 휴식의 귀한 시간이 주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숨이 차기 시작했다. 힘들다 포기하려 들면, 숲길은 보드라운 허리를 선보였다. 흙이 발가락을 만져주고 낙엽은 푹신한 융단 위를 걷는 착각을 주었다. 어디에선가 신선한 산야초 향기가 날아와 코를 간질였다. 땀에 젖은 목덜미와 걷어 올린 팔도 바람을 만났다.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눈을 길게 감았다. 몇 번째 오르막이었던가? 온몸이 정지된 감각으로 숲을 맞이한다. 짜릿한 공기가 폐를 깊숙이 찌른다. 낯모르는 사람도 괜스레 웃어주며 살아있음을 증명받는 순간이다. 가지보다 더 억센 뿌리가 꿈틀거리며 길을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밟혀서 뺀질거리는 뿌리를 타고 다람쥐들도 저잣거리 구경에 나섰다. 봄은 쉼 없이 꽃을 피우고 새잎을 만들어냈다. 낭떠러지 아래의 계곡은 푸른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우르러기도 한다. 청록빛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깔딱 고개였다. 좁은 길을 비키느라고 꺾인 내 팔뚝을 ‘툭’ 쳤다. 아야!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발을 내디딘다. 뭐가 그리 당당할까 째려본다. 나의 어깨가 씨근거렸다. 그만 가던 길을 포기하고 싶다는 유혹으로 목이 탔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에서 땀처럼 범벅이 되었다. 순식간에 기운이 빠져 다리가 휘청했다. 오금이 저려오고 허벅지는 파업을 시작했다. 돌멩이에 부딪는 발의 느낌도 냉정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쇳덩이를 달고 있는 듯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답답함에 겉옷을 벗어젖혔다. ‘뭐하러 이리 힘든 일을 시작했을까?’ 짜증을 낸다. ‘그만 돌아 내려갈까? 조금 쉬었다 올라갈까?’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다.
시선을 떨어뜨린 채 땅을 보며 걸었다. 이제 와서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 아무 생각이 없다. 힘들면 앞선 사람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올라갔다. 아무런 의도 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기회다. 나의 뒤를 따라 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르지 않는가. 삶에서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을 생각했다. ‘어떻게 그 순간을 지나 보냈던가?’ 되새김하기도 했다. ‘그 또한 지나가리라.’ 수없이 되뇌었다. 기억을 묶어 추억을 만들었다.
잠시, 터럭 바위에 기대앉아, 펼쳐지는 능선 위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잰걸음의 다람쥐를 눈으로 좇으며 상념에 빠졌다. 생각이 많아 생각을 멈췄다.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도 예쁘고, 초록은 더 황홀했다. 솔향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하산길 사람들을 피해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처박는다.
“야호” 상기된 함성이 들렸다. 푹 숙인 고개를 드니 정상을 알리는 팻말이 보였다. “다 왔어!”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고 하늘이 ‘툭’ 트였다. 막바지 언덕이었다. 없던 힘이 절로 생겨났다. 거친 바람이 허공을 달려와 사선으로 내려꽂혔다. 가슴이 탁 트여오고, 고통의 울타리를 벗어난 해방에 마음이 들떴다. 잔잔한 세상이 가슴 속에 들어와 앉는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더 작은 일에 마음 졸였다. 찰나의 짧은 환희를 위해 긴 혼란을 감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생 여정이란 숲길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행복도 패배도 아닌 크고 작은 굴곡이었다.
하산하는 길은 구르듯 쉬엄쉬엄 갈 것이다. 힘참보다는 느긋함이, 기대보다는 마무리가, 막막한 희망일 것이었다. 새 소리에 한 번 더 고개를 젖힐 것이고 약수터에서는 쉰 목을 축일 것이다. 팔굽혀펴기로 몸을 기대고 벤치에 앉아 힘없는 여유도 즐겨 볼 거다. 그래도 그 어느 순간보다도 눈 깜짝할 사이, 길이 끝나 있을 것이었다.
“이제 다 왔어요. 정상이어요. 힘내세요.”
산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일과 같아서 선의의 거짓말로 막을 내릴 것이다.
첫댓글 멋진글 동감합니다ㅡ
인생이란 숲길을 오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오르락 내리락, 비도 오고 밝은 태양도 만나고. 기쁨에 젖었다가 갑자기 비도 쏱아지기도 하지요. 그리고 오르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지요.
등산길에서의 느낌과 생각을 통해 인생길의 굴곡을 느껴집니다.
굴곡이 있어서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