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9:1-8절) 영혼의 숨 쉬기 밤에 바다를 항해(航海)하는 선원(船員)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밤안개가 잔뜩 끼어서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가운데 항해(航海)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앞에 암초(暗礁)가 있는지, 다른 배가 오고 있는지, 아니면 빙산(氷山)조각이 떠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주 조심조심 배를 운전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미국의 거대한 구축함(驅逐艦)이 밤에 유조선(油槽船)을 보지 못해서 들이받는 바람에 구축함에 타고 있던 수병(水兵)들이 여러 명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평소에 건강(健康)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암으로 수술을 받기도 하고, 뇌종양(腦腫瘍)이나, 심장(心臟)문제로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들이 가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病)중에는 위급한 병이 있는가 하면, 조금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병(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넘어져서 다리를 다치거나, 어떤 지병(持病)이 있을 때, 병원(病院)에 가서 치료를 받고, 수술(手術)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환자(患者)가 호흡(呼吸)을 잘 하지 못한다면, 가장 긴급(緊急)한 것은 숨부터 쉬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지 못하면, 그 환자는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어려움이나, 불확실(不確實)한 미래(未來)나, 육체적(肉體的)으로 위급(危急)한 병(病)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숨 쉬는 것 이상으로 긴급(緊急)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중요한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큰 병(病)에 걸리게 되었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병원(病院)에 가서 치료받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분에게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罪)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면, 그 환자나 가족들은 화를 낼 것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미친 짓을 한다고 우리에게 욕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엄청나게 비난(非難)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긴급(緊急)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罪) 용서 받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는 것을 우리 영혼(靈魂)이 숨 쉬는 것이라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많은 병(病)이 있을 수 있지만, 숨을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숨을 쉬기만 한다면, 그 뒤에는 수술도 할 수 있고, 더 큰 병원(病院)으로 옮기거나, 모든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罪) 용서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죄(罪) 용서받는 것을 숨 쉬는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일단 숨을 쉬기만 하면,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천사를 보내어서 전쟁(戰爭)의 위기를 막을 수 있고, 경제(經濟)를 살릴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숨을 쉬지 못한다면, 다른 것들을 아무리 도와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Ⅰ.한 중풍병자의 믿음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병(病)도 고치시고, 복음(福音)도 전하실 때, 한 중풍 병에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사지(四肢)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아마 말만 하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모든 병(病)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병(病)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어코 가족이나, 이웃 사람에게 자기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 간병(看病)을 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환자(患者)를 목욕시키는 것이나, 이동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병자의 집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지, 등에 업지 못하고, 자리를 구해서 네 명이 들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집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서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중풍병자는 자기 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와도 사람들이 꽉 차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병(病)이 악화(惡化)되어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집 지붕 위로 올라가서 그 집 지붕을 뜯게 했습니다. 집 지붕이라고 하는 것은 바람도 막아야 하고, 비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또 그 집은 남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信賴)했던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에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지붕을 뜯어서 거기서 중풍병자의 침상(寢牀)을 묶어서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감동(感動)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병(病)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宣言)을 하셨습니다. 9:2절)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아주 예외적(例外的)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대개 병자들이 찾아오면, 먼저 그들의 병(病)부터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그들의 믿음을 칭찬해주시고, 축복(祝福)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그렇게 힘들게 예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病)부터 고쳐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얼토당토않게 그 중풍병자에게‘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뇌졸중(腦卒中)의 증상이 있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빨리 병원(病院)으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하고, 주사를 놓든지, 수술을 해서 그 환자를 살리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차차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중풍병자는 그 병(病)이 얼마나 심각한지,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없었습니다. 등에 업혀 올 수도 없어서 들것을 만들어서 네 사람이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집에 사람들이 너무나 꽉 차서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이들은 실례를 무릅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덮은 것을 벗기고, 그 환자를 줄로 매여서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病)부터 고쳐주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부터 선언하셨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중풍병자의 믿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몸으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所聞)을 들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다른 많은 병자(病者)들을 능력으로 고치셨다는 소문(所聞)을 들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분이 다른 사람의 병도 고치셨다면, 내 병(病)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포기(抛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고, 강요(强要)를 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들것을 준비해서 네 명이 한 조가 되어서 그 침상(寢牀)을 들고,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꽉 차서 도저히 파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풍병자에게 다음에 오라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하면서 침상(寢牀)을 지붕 위로 들고 올라가서 거기서 지붕을 뜯고, 밧줄로 매어서 자기를 예수님에게 내려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예수님에게 가기만 하면, 이 병(病)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없었더라면, 벌써 포기(抛棄)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聖經)이나, 많은 신앙(信仰)서적(書籍)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인생이 변(變)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能力)의 종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천사(天使)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엄청나게 귀하게 사용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렇게 귀하게 될 수 있다면, 나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걸림돌이 있어도 신앙을 포기(抛棄)하면 안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 사람은 아주 불안한 인생이었고, 고통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심(安心)하라고 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이 사람은 영혼(靈魂)이 숨을 쉬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책임지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여기에 한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 이 사람의 모든 행복을 책임져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기만 했던 것입니다. Ⅱ.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난 논쟁 예수님께서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의 병(病)은 고쳐주시지 않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을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사람은 중풍병자 자신이었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남의 집 지붕까지 뚫고, 예수님 앞에 온 것은 병(病)을 치료받기 위한 것이지, 죄 사함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죄(罪)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급(急)한 것은 죄 용서가 아니라. 이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病)이 낫지 않으면, 계속 침상(寢牀)에 누워서 대소변(大小便)을 다 받아내면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고,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주시지 않고, 다른 것을 주셨습니다. 즉 이 중풍병자는 현실적(現實的)인 어려움을 해결받기를 원했는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병(病)이 낫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당장 필요한 것이며,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필요한지도 모르고, 죄 사함이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病)을 고쳐주시지 않았을까? 혹시 병(病)을 고칠 자신이 없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 그런데 더 놀란 사람은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집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왔을까? 그들은 모두 병(病)고침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병(病)고침 받으려고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더 이상 병(病)은 고쳐주시지 않고, 그 병자(病者)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기에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병(病) 고치는 일은 그만 두시고, 다른 일을 하겠다는 것과 같이 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화(禍)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병(病)을 치유하시는 능력을 나타내신다고 하니까 그것이 정말인지? 현장 조사를 하러 왔던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부흥(復興)이 일어나니까 병자(病者)들의 병(病)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총회(總會)차원에서 그것이 사실인지? 조사를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즉 병(病)이 나았다는 것이 소문에 불과한지? 아니면 진짜 병이 나은 것이지?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려고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성전(聖殿)에 양(羊)이나, 염소의 제물(祭物)을 가지고 가서 죄(罪)를 고백(告白)하고,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한 후에 제사장이 그 제물을 다 불로 태우고, 난 후에 죄 용서의 선언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제사(祭司)를 생략(省略)하고, 자신의 직권(職權)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죄 용서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웅성거리고, 비방(誹謗)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즉 죄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 사람의 병(病)을 고쳐주시지 않고, 죄 용서를 선언하신 것은 더 큰 소동(騷動)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환자(患者)는 병(病)이 낫지 않아서 실망(失望)했고, 서기관들은 예수가 신성(神性)모독(冒瀆)을 했다고 하며, 화(禍)가 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고, 질문을 이렇게 던지셨습니다. 9:4-5절)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화(禍)를 내고,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악(惡)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이상한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이 병 고칠 능력이 있으면 고쳐주시든지, 그런 능력이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는데, 엉뚱하게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은 자기들을 속이고. 기만(欺瞞)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舊約) 성전(聖殿)의 제사 제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우리가 말을 바꾸어서 생각하면,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중풍 병을 고칠 의술(醫術)은 없었습니다. 옛날 중국의 화타나, 우리나라 허준 같으면, 몰라도 이 당시 의술(醫術)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말씀 하나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할 사람은 온 천지(天地)에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죄(罪)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罪)가 뭔지도 모르고, 더욱이 죄(罪) 용서 받았느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왕(王)이라든지, 재판장(裁判長)이라면 몰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또 왕(王)이나, 재판장(裁判長)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죄(罪)가 있는 사람에게 죄 없다고 한다면, 주위의 반대(反對)가 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불행(不倖)은 죄에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죄(罪)의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審判)이고, 사망(死亡)입니다. 죄(罪)가 있는 이상. 하나님 앞에서 호흡(呼吸)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고, 기도해도 하나님께 들리지도 않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죄(罪)때문에 불안(不安)하게 살아가고, 죄(罪)때문에 망(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과 네 죄 용서를 받았느니라.’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우냐? 고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말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말씀 한 마디로 중풍병자를 일어서게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더 급(急)한 것은 이 사람이 죄 용서를 받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죄 사함이 진정 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조(久阻)나, 도움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직자(公職者)가‘우리는 영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요즘 영혼이 없는 사람들의 영화를 많이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영화들이 바로‘좀비’영화(映畫)입니다. 영혼이 없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좀비인데,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 습니다. 좀비들은 사람들을 아무 생각 없고, 공격(攻擊)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비들을 사정없이 총으로 쏘아 죽이고, 때려죽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현실(現實)은 오늘날도 이 사회(社會)가 영혼 없는 엘리트들, 영혼 없는 기업가들. 영혼 없는 목회자들, 영혼이 죽은 성공한 사람들을 무더기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반쯤 죽어있는 사람인 중풍병자의 영혼(靈魂)을 먼저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Ⅲ.영혼을 치료하는 권세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目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영혼(靈魂)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9:6절)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 죄(罪)를 도말(塗抹)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 순간 우리는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긴급(緊急)하고, 중요한 것은 영혼이 숨을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교회(敎會)도 안정(安定)된 건물이나, 재정(財政)을 위해서 몸집을 불리고, 우리는 계속 안정(安定)된 삶을 위해서 몸부림치고, 전쟁(戰爭)과 먹고 사는 문제나, 병(病)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 영혼(靈魂)을 살리는 권세(權勢)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증명(證明)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그 중풍병자에게‘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命)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중풍병자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의 마비(痲痹)되었던 사지(四肢)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서게 되었고, 팔로 자기가 들고 왔던 들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 영혼(靈魂)을 살리는 권세(權勢)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그 증거(證據)로 말씀이 능력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중언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서 역사할 때, 내 영혼(靈魂)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오직 말씀으로 그 중풍병자를 일어서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9:8절)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람들은 평소에 믿지 않던 영적(靈的)인 세계(世界)를 알게 되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영적(靈的)인 부흥(復興)이 일어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면서 죄를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 권세(權勢)를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임의(任意)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福音)을 전하면,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고, 영혼(靈魂)이 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社會)와 우리의 미래(未來)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영혼 없이 잘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살아봐야 좀비밖에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삶은 죽은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世上)적인 가치관(價値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유치한 생각들을 빨리 버려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숨을 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숨만 쉬기만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축복(祝福)하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오늘도 소중한 좀비 영혼(靈魂)을 살리고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 선교 설립 멤버(member)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찬송가 498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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