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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시대를 열기 위한 5,6월호 총평
진정한 삶의 복원, 삶과 동침하기
- <수필시대> 3,4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좋은 수필이 '정서'를 낯설게 만든다면, 철학은 '사유'를 낯설게 만든다. 새로운 실천, 새로운 삶을 위해 우리는 새로운 사유 그리고 정서와 맞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간과되어온 수필의 힘이다. 수필은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행동으로 밀고 나갈 '정서의 힘'을 내재하고 있다. 같은 예술이라도 차원이 다르다. 수필은 삶 속에서 생각해볼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삶에 유익하다.
수필은 문학의 여러 갈래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다. 누구나 기억하는 수필 한 줄 정도는 있을 것이며, 어린 시절 한 번 쯤은 혼자만의 수필을 써 본 경험도 있기 마련이다. 수필을 학문으로 접근하게 되면 어려운 대상일지 모르나, 태곳적부터 오늘날까지 세상과 삶을 노래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을 돌아보고, 세상을 비판하는 역할에 있어서 수필은 언제나 선두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첨예하게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과 공통점이다. 수필가와 철학자는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삶 속에 느낀 점을 편안하게 써내려간 수필은 쉽게 느껴질 것이고, 개념어가 즐비한 현대철학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 모든 것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수필과 철학 모두가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임을 역설한다. 이번 평은 바로 수필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인간의 삶을 쉽게 풀어내는 시간이다.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는 수필 속에도 내재된 철학은 있다. 그 숨겨진 의미를 우리 사회의 현실과 비교하며 차근차근 분석해 볼 이번 평은, 수필과 철학을 큰 호흡으로 횡단하며 수필가와 철학자의 고뇌에 동참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삶과 유리된 수필은 삶을 해친다.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의 추구는 삶의 질을 높이지 않는다. 인간행위의 모든 산물 삶과 격리되어 있지 않다 톨스토이는 지극히 단순한 마음, 평범한 사람이나 어린 아이도 알 수 있는 것, 남의 기쁨을 기뻐하고 남의 슬픔을 슬퍼하며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을 예술이라고 하였다. 진정으로 삶을 생각하고, 삶 속에서 삶의 길을 열어가는 수필 작품의 풍경을 자유롭게 음미해 보자.
II.
인생이란 세월을 전제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것과 시간의 흐름은 당연히 연속되는 사건을 만든다. 사건들은 인생의 긴 행로를 따라 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축적된다. 세월이 우리에게 나이만 무게를 보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년을 넘어서고, 노년으로 접어들면 우리의 등 뒤에는 세월의 부피만큼 온갖 기억들도 무겁게 쌓여간다. 삶이라는 것을 소재로 하여 생명감이 넘치는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내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세월은 끝자락을 펄럭이면서 더 빠르게 질주한다.
수필은 지나가버린 삶의 파편을 주워담는 작업이다. 기억의 창고 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있고, 너무 깊이 보관되어서 얼른 찾아낼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기억들은 시간의 줄에 꿰어져서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낱낱이 부서진 채로 파편이 되어서 흩어져 있다. 분명히 내게 실재하였던 삶의 편린이었는데도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것도 있고 더 선명해진 부분들도 있다. 수필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과거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쓰기다. 그렇다고 단순히 의미만 부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현재의 나에게 긍정적으로 보탬이 되는 성찰이 일어나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견디기 힘든 갈등을 안겨주기도 하고, 통과의례를 치르듯이 뼈아픈 시련도 감내해야 한다. 결국 삶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삶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권현옥의 <하루를 보내는 방법>에 주목한다. 이 수필의 축을 이루는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자기 응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수필을 통해 자기를 응시하고, 나아가 성찰을 도모한다. 중국에는 삶을 바로 세워 그 중심에 서고자 한다. 작가는 하루의 주요한 가치들을 뽑아 한 개씩 차례로 정리한다. (ㄱ) 잠을 위한, (ㄴ) 밥을 위한, (ㄷ) 시작을 위한, (ㄹ) 가열을 위한, (ㅁ) 관계를 위한, 순으로 해서 소항목으로 단락을 나누었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존재하는 것이 수필이라면 이 작품은 이런 조건에 아주 부합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하루를 사는 방법 안에는 인간적인 삶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표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주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사고와 선택의 여과 과정 속에서 진솔한 자기 노출의 호소성이 있어 성찰의 글로써 수필의 향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를 시간의 관성에 의해 살아가는 데 반해 작가는 하루의 가치를 위해 산다. 이 글은 사실이나 체험에 따른 자신의 생각이나 상념, 느낌 견해 등과 같은 감정이 문학적인 언어와 함께 나타나 있어 읽는 맛을 준다. (ㄱ),(ㄴ),(ㄷ),(ㄹ),(ㅁ) 단락에서 보이는 조형적 특성은 권현옥 수필의 압권이다. 이를테면 문단의 서두에 ‘잠을 위한.’으로 시작해서 문단의 마지막에, ‘남는 건 열 일곱 시간.’이라고 배치한 것이다. 계속 문단이 이어지면서 하루 24 시간을 삭감해 나가는 형식상의 전략의 돋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형식상의 전략화가 어느 정도 구성미학 차원에서 멋이 있다 하더라도 서두와 결말부에 놓인 것이 문장이 아니라 어구들이라는 것이다. 형식미를 통해 맛을 내려 했지만, 비문의 생성으로 바른 글의 가치를 놓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그렇다 치더라도 크게는 신비평의 관점에서 구성적, 전략적, 미학적 조형성을 위해 일반적인 형식으로부터 탈피하여, 수필의 형식 차원에서 낮설게하기를 시도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좋은 직품은 어떤 글이라도 복합적 통일성이라는 형식적 특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전제해서 볼 때, 이 작품은 말의 조직적 구조 면에서 특이성을 확보, 나름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고 하겠다.
만약 위에 열거한 가치에 따라 원칙적으로 삶을 영위한다면, 이 수필은 카타르시스를 주기는커녕 독자에게 답답함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수필이 안식과 위안을 주는 데 목적이 있는 만큼 작가는 이런 수필의 기능과 성격을 잘 안다. 그래서 결말부에 반전이 있다. ‘할 일의 기준은 스스로 정해놓은 것이니 스스로 깰 수 있는 것’이라 한 부분이다. 그래서 작가는 달콤한 잠과 맛있는 음식을 줄이지 못한다. 청소를 덜하고 사람을 덜 만나고 외출을 줄인다. 결국 작가 자신은 ‘외롭고 할 일을 남겨놓는 좀 지저분한 인간이 되어’간다고 고백한다. 이 수필이 주는 강점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 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작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나 단점까지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과감하게 노출시킴으로써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작가 권현옥이야말로 독자들이 수필을 통해 만나려는 사람이다. 빈틈이 없이 완벽하고 단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작가처럼 부족한 면이 있어 좀 지저분한 사람이기에 독자에게 친밀감을 준다. 결국 작가는 하루를 보내는 방법 속에서 결코 시간에 억압되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며, 시간 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즐기는 것이 하루 보내기의 비밀임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묘한 의운을 남긴다. ‘은밀한 행복을 감추고 나는 시간이 없다고 다시 말한다. 은밀한 것은 내세울 수 없는 것이어서 삶에 대처하는 숨은 방패로 써 먹는 것이다.’ 마지막은 대담하게 직설적이다. ‘이것이 하루를 보내는 방법이다.’ 궁긍적으로 수필은 삶에 대한 존재 규명과 방법의 모색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응시의 수단이기에 작가의 수필 쓰기는 구원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잇다고 하겠다.
조혜자의 <소중한 하루>도 위와 권현옥의 수필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대한 대상을 적은 글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만큼 소중한 것고 없고, 이에 대한 관심만큼 진지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조혜자의 수필은 어떤 수필보다 더욱 진지하게 읽힌다. 수필 ‘소중한 하루’는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해서 나를 바르게 세울 것인가 하는 본질의 문제를 내면으로부터 끌어들여 천착하는 글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여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삶에 대한 두터운 애정을 그리고 있는 글이라 하겠다.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영감을 받아 ‘소중한 하루’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엮어낸 듯하다. 어느 날 딸로부터 갑작스럽게 접한 한 젊은이의 죽음은 작가에게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안겨준다. 단순히 살아있는 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전경이라면 후경은 부부간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절한 모습으로 남겨진 남편의 쓸쓸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죽으면 내 남편도 저러 할 것이라 생각하니 부부가 함께 오래 살아 있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라고 한 진술은 죽음에 대한 다양한 체험에서 부부간의 사랑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설파하는 부분이다. 이 수필은 죽음에 임하는 작가의 생각과 그에 따른 반성적 성찰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글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체험과 그에 따른 느낌을 단순히 사실적으로만 그대로 그려내지 않는다. 그 하나하나에 대한 자신의 상념을 실어 글 속에 감정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어 평범한 소재지만 유쾌함을 준다. 그리고 이것은 같은 죽음의 비보를 접하더라도 그 상황이나 심리상태, 각오 등에 따라 사람의 느낌이나 생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체험에 따른 감정 표현에 의해 작품의 분위기나 맛은 물론 그 작품의 주제도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 수필을 통해 우리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이 겪는 정신적, 육체적인 아픔이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짧은 삶 속에서 부부가 사랑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자신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떠맡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함을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수필은 반성적 성찰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포근한 정감도 준다. 명징한 의식이 맑고 깨끗한 샘물처럼 잔잔히 솟아오르고 있음도 느껴진다. 특히 이 글은 ‘부부애’의 가치를 잔잔하지만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수필에서 가장 문학화가 잘 된 것은 체험의 구체화를 통해 깨달음의 일반화로 나아가는 데 있어 비유라는 문학적 방법을 쓴 부분이다. “자연의 위대함이나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대화는 내가 살아있다는 기쁨으로 다가온다. 봄이 오는가보다. 나무들이 파랗게 물이 오르고 따스한 햇살이 온 대지를 따듯이 녹이면서 평화로운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다. 만물이 다시 소생하면서 모두가 바빠질 것이다. 농부가 되어 나도 다시 밭으로 나가 씨앗뿌릴 준비를 해야겠다.” 위의 진술에서 ‘봄’과 ‘씨앗’은 하나의 상징이 되어 독자들에게 연상과 상상을 불러 일으켜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제목에 있는 ‘소중한’이란 형용사 때문에 수필의 주제정신을 노출되어 의미의 재구성이라는 감상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은 흠이 아닐 수 없다.
이당재의 <속현>에 주목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지만, 자식들의 이해 부족으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대로 거의 매일 같이 여러 가지 상처를 입는다. 작가는 혼자 사는 게 너무 외롭고 밥동무, 말동무, 등산, 여행 동무로 지내던 아내가 떠나고 가까이 지낼 동무가 못내 아쉽던 터라 마침 조건이 맞는 사람을 소개받고 이를 놓칠 새라 아내와 사별 후 6개월 만에 자녀들에게 재혼을 선언하고 성당에서 신부님에게 혼배성사를 받은 뒤 같이 살고 있다. 문제는 자녀들이 이 아버지를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이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애틋한 정을 잊지 못하고 재혼한 아버지를 불륜과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돼 마음 아픈 게 사실이다. 아들 며느리는 그래도 마지못해 안부전화라도 오지만 두 딸은 1년 넘게 전화 한 통화가 없었다.”는 진술이 가슴을 아프게 조여 온다. 복잡한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나 가치관의 대립, 부조리한 현실 등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지만, 작가의 경우는 그 갈등이 가족 간이라는 데 있으며, 작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이 딸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물론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서로가 밉다거나 괴롭힐 목적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아끼기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수필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다.
수필은 갈등의 연소다. 아내를 잃고 새 아내를 얻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데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이 수필은 자신의 변화에 대한 이해를 구하면서 삶과 그 삶을 위요한 환경을 생각하는 글이다. 어떤 일이 잇어도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의지를 수필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의 의지를 높게 평가받아 마땅한 것은 작가는 갈등의 현실 속에서도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속현 가족의 현실적인 갈등을 리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데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내보내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구현하는가에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작가는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위해 여러 배경 지식을 동원하였다는 점이다. 제일 먼저 주역을 인용하여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고, 다음은 토마스 프리드먼의 저서 <미국쇠망론>을 인용하여 가족간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마지막으로 박목월의 시 ‘가정’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려 한다. 이는 공감의 확대와 설득력을 위한 조치라 하겠다. 작가 자신의 입장을 가장 호소력 있게 나타낸 것이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알처럼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 진술이다. 작가는 결말부에 가서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면서도 결자해지의 자세로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온갖 욕망이 넘실되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게 요즘 아버지인 것 같아 마음만 복잡해진다. 표표히 떨어지는 낙엽에도 흔들리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말이다. 어쨌든 아들딸 사위 며느리들아! 그래도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속현 가족들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라며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심정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한 양심의 회복이 아니겠는가. 자식 이기는 아버지 없다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게 하는 수필이다.
윤혜선의 <봄이 오는 길목>에도 삶을 가꾸어 나가겠다는 희망과 의지가 엿보인다. 발단부의 ‘겨울 추위 채 가시지 않는 때, 입춘의 절기를 넣어 머지않은 봄을 기대하며 마지막 추위까지 잘 견디어 내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아닐까? 기다림을 잃었을 때에도 봄은 온다고 하였듯이 세월이 가고 계절이 바뀌는 것이야 자연의 법칙인 것인데 추워야 얼마나 추울까 싶다.’라는 진술을 보면, 작가는 운명 순응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윤혜선 작가는 불교 신자다. 불광사에선 2월 광덕대선사 추모 및 불광 법당 중창불사 음악회를 준비하느라 날이 임박해진 한 달 전부터는 일 주일에 두세 번 저녁 연습을 하느라 쉴 틈이 없다. 퇴근 후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여 달려간다. 이번 음악회에서 작가 자신이 작사한 곡이 불려지기 때문이다. 음악회에서 불려질 곡에 작사를 하게 된 것이 수필 창작의 동력이 된 것이다. 이는 문학은 삶에 대한 절실한 바람에서 꽃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소임을 다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삶의 중심을 파고 들 때 가능하다. 작가는 길가의 돌멩이를 보아도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디딤돌이라 한다. 누구에게든 똑 같이 넘나드는 시간에 후회하지 않고 헛되지 않게 세월과 좋은 벗 삼아 세월이 가도 언제나 약한 모습으로는 살지 말아야지 하며 먹었던 마음을 다잡는다. 이처럼 의연하게 살아가고자 그녀는 항상 삶의 가치를 지향한다. 삶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그녀의 자세는 문학에 값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녀의 수필은 인간에게 맡겨진 온갖 고뇌를 수용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노력하여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는 자성에 그 바탕으로 두고 있다. 작가는 누구보다도 가치 지향적, 목적 지향적으로 생을 영위해온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랜 만에 일에 몰두하며 생을 뒤돌아보니, 흰머리와 주름살만 늘어났다는 것이다. 직장에 매어 훌쩍 떠나지 못하는 지금도 작가는 마음 한구석에 예쁜 동백꽃을 가득 피워내곤 한다. 생태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동백꽃을 피워내면서도 주워진 일에 최선을 다 하며, 그녀는 삶을 지켜내었던 것이다. 이제 행사가 끝나면 섬진강 매화를 보러 가거나 선운사 동백꽃을 다시 보러 나서려 한다. 이 떠남에 떠남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아니면 조직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며 희생하며 모질게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때늦은 뉘우침이 아닌가 여겨진다. 작가의 내면적 나상 속에 들어 있는 붉은 동백꽃에 대한 그림자 형상이 수필의 제재로 선택된 것은 작가가 자신의 심층 무의식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품 속에 동백에 대한 기억을 묘사하게 되면 어떤 면에서 인생의 향기와 추억을 담을 수 있고, 인생을 밝고 화사하게 면모시킬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이 수필은 동백의 형상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서정성을 갖게 된다. 동백꽃에 대한 영상은 수필의 전반부에도 중반부, 후반부에도 계속 언급된다. 동백꽃이야말로 작가의 무의식에 영원히 살아있는 영혼의 안식처라 할 수 있다. 윤혜선이 생활의 불씨를 자연 생태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동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순수 내면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의 과거 지향적 추억 속에도 항상 동백꽃은 피고 지고 있다. 이 수필에서 꽃에 대한 자각은 곧 그녀에게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으로 나타난다.
III.
이외에도 김성렬의 <군불>은 향기가 빛나는 수필이다. 이 작품은 고전적 특성인 정의 문학이란 수필의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모닥불 불똥이 하늘로 튀어 올라 춥고 배고픈 세상에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제의식의 의미화 문장이 강한 여운이 되어 마음을 울린다. 멋진 작품이다. 조재현의 <완장>이란 수필은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빛나는 사회수필이라서 강렬한 눈맛을 준다. 수필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요구하여, 따라서 세계를 자아화하는 데서 생성되는 문학 장르다. 우리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여 쓴 수필이라서 독자의 측면에서 보면 발견은 읽을 만한 글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완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통해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완장이라는 장식품은 예제禮制와 관련이 있는 표지標識가 아니라 어떤 조직에서 인간의 행동을 규제, 감독하거나 권위 또는 지위를 표시하는 도구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장례 문화를 주도하는 장의예식장이 등장하더니 슬그머니 상례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지적이 날카롭다.
우리는 모름지기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자아를 희망적으로 가꾸어 가야 한다. 위에서 소개한 수필들은 전부 삶을 바로 세우려고 하는 수필들이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자 융의 말을 소개한다. “인간의 삶은 모든 예술품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희귀한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나는 목적을 지향하는 삶이 목적이 없는 삶보다 더 낫고, 더 풍요롭고, 더 건강하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역행해서 가는 것보다 시간과 더불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인간의 삶이 가장 고귀하고 희귀한 예술품이라는 융의 견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삶을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그 삶은 분명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삶을 복원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자의 삶에 대해 예술품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복원된 삶을 담아내는 수필이야말로 진정한 예술품이란 사실이다. 물론 구원의 차원에서 진정한 삶과 동침하려는 자세도 함께 따라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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