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확신하라(시편 91편14-16)
성경본문:시편 91:14-16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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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혼부부집사님의 가정에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답니다. 이 새는 결혼식 선물로 누군가가 준 것이었기에 새를 길러 본 경험이 없었지만 정성을 들여 키웠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다름 아닌 앵무새의 육성흉내 때문 이었습니다. 남편이 출퇴근 할 때마다 아내의 볼에 키스를 해주곤 하였는데 어느 틈엔가 앵무새도 그 키스 흉내를 내고 있었지요. 아파트의 문소리만 들리면 앵무새가 이들 부부보다 먼저 '쪽' 하고 소리를 낼 지경이 이르렀습니다.
그때즈음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대 심방 계획이 발표되고 드디어 심방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부는 몹시 곤혹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심방 중에 혹 앵무새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목사님의 심방 중에 앵무새는 여느 때보다도 더 명확하게 '여보! 키스해 주세요. '쪽'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그냥 연습된 대로 소리 내는 앵무새의 해위가 야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죠.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의 소리 내는 말의 의미는 모른체 익숙한 대로 연습한대로 지껄이는 앵무새의 모습에서 어쩌면 이미 익숙한 찬송과 기도와 또는 각종 종교의 의례들을 무의미 하게 습관적으로 해대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에 젖어들어 하나님의 실존적이고도 현재적인 역사와 동행하심 그리고 지키심을 잊은 채 생활하는 우리들의 신앙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합니다.
150여 편의 주옥같은 신앙고백으로 구성된 시편은 그 저자에 있어서도 실로 다양합니다. 다윗, 솔로몬, 고라의 자손들, 아삽, 헤만 에단 모세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무명의 기자들, 이것은 삶의 다양한 정황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귀중한 신앙고백이 시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나를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함께 하신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즉, 오직 인간문제의 해결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의 신분의 왕이든지, 문지기든지, 궁정의 악사든지간에 결국 하나님의 지키심 밖에서는 참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같이 인간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어떻케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I. 내가 저를 건지리라.
본문 14절 상반절에 '저가 나를 사랑한다 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를 건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를 건지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희랍어의 의미를 들어 몇 가지로 분류하여 사랑의 속성을 이해하여 시도해 봅니다. 그러는 사랑은 그렇게 관념적인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얼마 전 만화와 영화로 소개 되었던 '외인구단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주제가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눈에 띕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아마 이것은 청춘남녀간에 흔히 있는 졸렬한 사랑고백으로 처리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고백 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진실한 사랑 고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게 고백 해봅니다. '전 주님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이같은 고백이 진정 우리가운데 있다면 하나님은 성도들이 어디에 처하든지 건지신다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II. 내가 저를 높이리라.
본문 14절 하반 절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면식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어우러져서 대화를 나누고 교제하고 식사를 나누는 등 예수님의 표현대로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을 때' 비로서 [안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높아지기를 원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즉 격상되기를 모두 희망합니다. 지위, 명예, 재력, 지적능력, 인격, 신앙 등 모든 분야에서 희망을 지나 갈망하게 됩니다. 또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강구 하게 됩니다. 요즈음의 세태로는 정상적인 방법 보다는 부정한 방법이 일반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져 심히 염려되는 바입니다.
이런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격상을 위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저가 나를 안즉...'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경을 통해 인간 이성의 범주 속에서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계시하셨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는 일은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전하는 과정을 통해 광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그것은 곧 '내가 저를 높이리라'는 말씀의 성취를 가져 옵니다.
III. 내가 응답 하리라.
본문 15절에 '저가 내게 간구하리리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하나님을 어찌 확신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오늘 말씀에 서는 그 이유를 [간구]라는 말에서 찾게 합니다.
[간구]란 무엇입니까?
틀림없는 것은 기도의 한 모양인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기도 입니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목숨을 건 기도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일생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아직 한번도 [간구] 했본 일이 없다면 우리는 이 시간 문제를 높고 간구해야만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가 응답 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각 촌을 다니며 기적을 일으키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낙심하고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날 수 없다] 고 말씀하심으로 기도의 중요성과 능력을 일러 주셨습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 능력과 방법에 한계에 부딛힐 때 사람들은 곧잘 좌절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고 아주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이제는 기도실에서 응답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앵무새의 지껄임처럼 무의하게 길들여져 타성에 젖은 종교행사의 무능력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어떤 신분이든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만납시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할 때 우리를 진심으로 시키시며 우리가 그를 알기에 힘쓸 때 우리를 높이시므로 지키시고 우리가 그에게 간구할 때 우리에게 응답하심으로 지키심으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