쑈(show)를 하다.
박 현 숙
난, 그 날, 영어 좀 한다고 큰아이 학교 선생님의 그물에 걸려 전 국민을 우롱(?)하는 일을 할 뻔 했습니다. 그것도 큰아이와 함께 말입니다. “엄마, 원래 티비는 다 속임수래.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고...” 뭘 안다고 큰아이는 한마디하며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것 같았지만 난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습니다.
강가에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소양강변에 앉은 그곳은 사람들이 꽤 즐겨 찾던 장소였던 거 같습니다. 내게도 그곳이 배경으로 떠올려지는 젊은 날의 추억이 있는걸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후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사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는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는지, 그곳이 겪은 이십년 넘는 세월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을 풀쩍 뛰어 넘어 그날 나는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영어를 쓰는 카페로 변해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방송국 피디 눈에 그곳이 띄였던가 봅니다. 그리고영어만 잘하면 뭔가 될 것 같은 요즘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옛 추억의 장소인 이곳을 살려보자는 생각을 이 피디께서 하셨나 봅니다. 어찌어찌하여 영어를 꽤 잘하는 모녀 설정에 나와 큰아이가 걸려 들었고 그것이 그곳에 가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설정이 문제였습니다. 나와 큰아이는 외국에 가 본적은 없지만 영어를 꽤 잘하는, 말하자면 이 카페의 단골고객이 되어야 했습니다. 나야 그렇다 치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영어가 모국어인 큰아이는 입만 벌려도 왠만한 사람이면 눈치를 챌 것 같은데.... 피디님은 큰아이에게 좀 더듬어 보라고 지시를 주었고 우리 모녀는 설정대로 태연하게 연기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영어를 아주 잘하시는데, 외국에 사신 적이 있으신가요?” 라고 피디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평소 영어에 관심이 있어 열심히... 어쩌구 저쩌구.” 내가 대답을 했습니다.
방송이 된다는 날은 다가오는데 뭔지 모를 불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흘러간 물이야. 내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니고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잖아? 내 잘못이 아니야. 그래도 설정을 바꾸자고 했어야 했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볼 수도 있을 텐데... <뭐야 저 여자,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할까? 아니면, <아니요. 과외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교과서 로 학교공부만 충실히 했어요. > 하는 입시철이면 흔히 듣게 되는 인터뷰처럼 시키는 대로 하는 거겠지 하고 생각해 줄까...’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혹은 자의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거짓을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 있기도 합니다. 딱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잘 포장하게 위해 사실을 과장되게 확대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의 결점과 잘못을 좀 가릴 수 있을까 사실을 빼거나 축소시키는 일도 합니다. 남한테 손해를 입히는 일은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거짓말을 하고도 잘못을 할 줄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남이 한 사소한 거짓말이 드러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펄펄 뛰고 흥분합니다. 내가 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몇 개 찾아 합리화시키고, ‘뭐 그 정도야 그럴 수도 있지’ 너그럽게 용서를 잘 해주면서도 말입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말이 꼭 맞습니다. 남한테는 좀 더 너그러워지고 내게는 좀 더 엄격해져야 하는데 늘 반대의 경우만 쉬이 되고 맙니다.
다음날, 여러 사람, 여러 선을 거쳐 담당 작가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인 터뷰한 것 중 사실이 아닌 것은 빼기로 했습니다. 그날 찍은 장면이 무리 없이 방영되었고 나는 즐겁게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나와 딸아이의 모습을 시청할 수 있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어 참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첫댓글 문창반 야외수업시간에 발표했던 글입니다. 그날 복사를 하지 못해 나누어 드릴 수가 없어서 이곳에 올려보았습니다.
간결, 섬세, 예민 등의 낱말이 떠오릅니다 -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졸작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쓰라는 격려로 받겠습니다.
쇼~ 잘 읽었습니다. 끝말이 습니다로 끝나면 한결 정겹고 부드러워 지지요. 아이와의 좋은 추억 쌓으셨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제가 그런 어투를 좋아하나 봅니다. 제 글들이 거반 그런투로 써지고 있는데...좀 지루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이란 역시 듣는 것도 좋지만 눈으로 직접 봐야 제 맛이 나는군요. 그리고 이 좋은 글을 계속 멏번이고 더 읽을 수 있으니
더욱 좋습니다. 동료 수강생으로써 모범답안 같은 수필을 읽게 되어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글보고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날 문배마을 오르면서 선생님과 나눈 잠깐의 대화 즐거웠습니다^^
문우님의 쑈 질읽었읍니다. 어차피 삶이란 쇼가 아닐까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것?. 그래도 문우님은 양심이 있는 부류에 속하셨네요. 계속 좋은글 올려주세요.
양심이 있다기 보다 남에게 보여졌으면 하는 이미지 하나 만들어 놓고 거기 맞추어 살려고 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첫발을 들여 놓았으니...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