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8,1.8-11; 2코린 5,14-17; 마르 4,35-41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안녕하셨어요? 뜨거운 날씨에 고생 많으셨는데, 비가 와서 어제오늘은 좀 시원한데요, 이번 주 다시 더워질 전망이라고 합니다.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기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욥기는, ‘죄 없는 사람의 고통’이라는 매우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욥은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청하는데, 그것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가게에서 따질 때, “여기 사장 누구야” “여기 매니저 나오라고 해” 이렇게 따지잖아요? 그처럼 욥은 이 세상의 매니저, 즉 하느님께 나타나시라고 줄곧 요구했는데, 마침내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폭풍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말이다.”
가나안 지방의 신화에 따르면, 바다의 거대한 폭풍우에는 바알 신이 개입되어 있었고, 바알은 자신의 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폭풍우를 제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셨고, 바다가 모태에서 나올 때 먹구름을 포대기로 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우주에 다른 신의 힘이 자리하지 않고, 당신께서 유일한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중에 욥은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욥의 고통은 여기서 해결이 되는데요, 왜냐하면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나의 고통은 정말 작은 것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구나’라는 깨침 속에서, 인간의 고통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아이는 길을 가다 넘어지면 울면서 엄마를 찾지만, 엄마가 달려와서 안아주면 점차 울음을 그칩니다. 이제 아픔이 지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아픔을 알아주어야 하는 존재, 바로 엄마가 나의 아픔을 알고 있고, 나를 달래 주리라는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이 걱정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고요해집니다.
여기서 풍랑은 악의 세력을 상징할 수 있고, 제자들이 겪는 환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제1독서에서 욥에게 나타나신 하느님, 즉 바다를 아이처럼 다루시는 분과 당신 자신이 다른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시사하십니다. 제자들의 질문이 의미심장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저는 2003년도에 40일 피정을 한 후에, 10주년을 맞이하여 2013년에 다시 한번 40일 피정을 했는데요, 원래는 2023년 즉 작년에도 하려고 했는데, 제가 하는 대신 보좌신부님을 보내드렸습니다.
긴 피정을 하다보면 내면에서 올라오는 아픔을 다루는 과정이 있는데요, 당시 제게 많이 올라온 것은 주로 사회적 아픔이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철거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다섯 분과 경찰 한 분이 돌아가시는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고, 이에 대해 진상 규명을 요구하던 선배 신부님들이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부당 해고에 항의하던 노동자들을 진압하던 과정에서 있었던 충돌의 여파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이 아픔들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지만, 큰 소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40일 피정을 하면서 이러한 아픔들이 내면에서 올라오는 동안, 마치도 욥처럼 하느님께 ‘왜 좀 더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고, 오늘 복음 말씀으로 기도드리기도 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피정을 마쳐갈 때 즈음, 기도 중에 문득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제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1서 말씀 역시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적 해답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줄 희망일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배를 타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호수를 건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해 여전히 해답을 찾으면서, 배에 들어차고 있는 물을 퍼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가끔,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고 있거나 혹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잠들어 계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작년 1월, 평일 미사 강론 중에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다시 인용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대가 욕을 듣는다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화가 치민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면 배가 위험에 빠지고, 그대 마음도 위험에 빠져 일렁입니다. 욕을 들으면 그대는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즐기면서 복수를 했다면 그대는 파선한 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대가 그리스도를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깨우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우고,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
유혹이 생기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대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그리스도를 깨우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https://youtu.be/pIkI6jwtTSU?si=FakITn4uQdieV9du
* 카를라 보노프, The water is wide.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 16세기 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