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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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기독교, “전문인을 부른다”
오스만제국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생겨나면서 터키는 새로운 모습을 바뀌어 갔다.
터키의 탄생으로 이슬람 지역이었던 이 곳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로 변했다. 그러나 아직 이곳에 기독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동의 관문 `터키', 터키에서 기독교가 자리잡지 못한다면 중동의 선교도 길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 대부분 선교사들의 지적이다.
유럽과 중동을 잇는 터키의 선교를 장빌립 씨와 함께 풀어본다.〈편집자 주〉
1.오스만제국의 영역과 종교정책
2.제국 해체 이후 기독교의 현실
3.기독교의 재건지 `터키'
4.기독교·유대교·이슬람의 만남
1960년에 이어 1980년에도 터키군부는 무혈 혁명을 통해 국가를 장악했고 이어 1981년에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새로운 내각은 1961년에 인준된 종교의 자유를 재확인했다. 1928년 이래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될 때마다 법에 의한 종교의 자유는 늘 보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슬람이 더 이상 국가적 종교가 아님에도 다른 종교와 신앙의 표현에는 늘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아직도 신자들은 순교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직업을 잃거나 투옥되기도 한다.
이 군부 구데타 이후에 제 3세계와 서양의 많은 선교사들이 비공식적으로 이 나라에 들어왔다.
YWAM이나 Open Door 선교회, CCC 등이 그들로서, 이들은 국민의 98%가 무슬림인 나라를 상대로 새로이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은 일대 일 양육을 시작했으며 가정을 방문하거나 일정한 장소를 택해 주기적으로 만나 성경을 공부했다.
1980년대 초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가정교회의 숫자가 특히 이스탄불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선교사 200명에 현지인 신자 200명이 보고되었다.
1987년에는 현지인 교회가 공공장소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 핍박의 원인이 되었다. 교회건물은 일부 과격한 경찰이나 민중의 좋은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스트 모던 선교의 전환점이 1988년에 일어났다.
7개 대도시에 걸쳐 약 50여 명의 신자와 사역자로 구성된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의 리더는 대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그는 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 4주 간의 구금기간 중에 그와 네 명의 동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력히 그리고 집요하게 도전받았다. 8일 동안 사탄은 온갖 추악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그들은 감사하게도 그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더인 이 청년은 기도했다. “주님 왜 이런 일이 저희에게 일어납니까? 우리는 정부에 대하여 어떤 부당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터키인들과 터키무슬림 가운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8일이 지나서 그들이 법정에 나가게 되었을 때, 그들의 모습이 몇 개 신문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겨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터키공화국은 “터키인이 크리스찬이 되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기독교인 특히 서양의 기독교인이 무슬림이 되었다는 일방적인 뉴스만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일 이후로 터키 국민들은 이제 양면을 보게 되었다.
즉, 터키인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터키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종교에 대한 사람의 자유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고, 어떤 종교를 택해도 무방하며, 터키인들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후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아직도 박해는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크리스챤들과 선교사역에 대해 열려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터키기독교를 무너뜨리려는 비밀 계획은 경찰을 통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1989년에 이스탄불 바클쿄이에서 유럽인과 현지인의 예배를 중단시키려던 경찰의 시도에 대해 유럽의 의회는 이를 터키 정부에 항의했고 그 이후로 기독교에 대한 완화정책이 보여지고 있다. 즉 세례교인 5명이면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모임을 가질 수 있고, ID 카드에 종교를 변경 기재하는 절차도 간소화되었다.
1995년에 이스탄불에 적어도 10개 교회, 앙카라와 이즈밀에 2개씩, 부르사, 아다나, 안탈리아, 가지안텝에 각 1개소 등 전국에 400명의 선교사에 의해 400개의 교회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2000년에는 600명의 개종자가 집계되었고, 그 숫자는 6천 7백만 인구를 가진 터키 선교 역사상 가장 큰 숫자였다.
그러나 1960년에서 80년 사이에 선교사 50명에 신자의 숫자가 50명, 80년∼85년에는 선교사 200명에 현지인 신자 200명, 85년∼90년에는 각기 400명씩, 그리고 2000년에는 신자 600명에 대해 선교사의 숫자 또한 600명으로 보고되어 아직도 1:1 양육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히 1999년 8월, 한 여름 밤의 대지진으로 인하여 18,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대 참사가 일어나면서, 여러 기독교 단체들의 각종 구호활동으로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비교적 많이 좋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 터키의 선교는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터키와 같이 복음전도가 자유롭지 않은 나라에서는 전문인 사역자가 많이 필요한 것이 현실인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는데 단기선교로 선교지를 경험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실제로 현장을 체험하면서 선교 사역자로서 훈련이 될 뿐 아니라 해당 선교지의 상황에서 바람직한 선교를 위하여 앞으로 어떤 영역에서 필요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감나는 동기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 영적 준비와 함께 어떤 사역으로 주님을 섬길지 생각해야 한다고 현지 선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장빌립·최성주 기자
http://www.ingn.net/news/articleView.html?idxno=11536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96년
만에 기독교 교회 신축
2019-08-04 19:47
에르도안 대통령 "터키에 애정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1등 시민"
시리아 정교회 수석 대주교 "이런 제스처는 2천년 만에 처음"
시리아정교회 교회 착공식에 참석한 에르도안(우) 대통령과 유수프 제틴 수석대주교
시리아정교회 교회 착공식에 참석한 에르도안(우) 대통령과 유수프 제틴 수석대주교
[아나돌루=연합뉴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처음으로 이스탄불에 새 기독교 교회가 들어선다.
4일(현지시간) 이스탄불 예실쿄이에서 공화국 건립 후 96년 만에 시리아 정교회의 신축 교회 착공식이 열렸다.
이날 착공식에 참석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시리아 공동체를 위해 예배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터키 공화국의 의무"라며 새 교회 착공을 축하했다.
그러면서 "터키에 애정을 갖고 공헌하는 사람은 누구나 1등 시민"이라며 "우리 마음속에 차별이 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유일한 예외는 테러 조직과 테러리스트, 조국을 배신한 자들"이라며 터키 내 분리주의 무장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 2016년 쿠데타의 배후로 지목한 페토(PETO·'펫훌라흐 귈렌 테러조직'의 약칭)를 비판했다.
시리아 정교회는 2009년 정부에 새 교회 건립 허가를 요청했으며, 터키 정부는 지난 2015년 교회 건립을 허가했다.
국민의 99%가 무슬림인 터키는 그간 교회의 보수와 리모델링만 허용했으며, 교회 신축은 허가하지 않았다.
유수프 제틴 이스탄불 수석 대주교는 이날 착공식에서 "시리아 정교회의 역사는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이런 제스처는 2천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2021년 준공 예정인 새 교회는 4천400㎡ 부지에 5층 높이로 지어지며 약 1만7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08040482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