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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안씨 안우(安祐, 미상∼1362) 장군의 어렸을 때 이름은 안발도(安拔都)
타관 문중에 대한 자료를 올리는 것이라 조심스럽다.
탐진군 안원린과 오성군 안우의 혈연관계를 의심하는 주장이 탐진안씨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되고 있나 보다.
원 출처 :『안우(安祐) 변정록』(저자 : 안상천(安相天), 탐진군(耽津君) 안원린(安元璘) / 헌납공(獻納公) 안도(安堵)의 후손. 탐진안씨 19세, 순흥안씨1파종회 탐진군파 회장)
게시물 출처 : http://cafe.naver.com/iahn/1706
4. 안우(安祐)와 원(元)나라
안우(安祐)의 소자(小字)는 발도(拔都)다.
염제신(廉悌臣)은 소자(小字)가 불노(佛奴)인데 그는 원(元)나라 사람 후손으로서 중찬(中贊) 염승익(廉承益)의 손자(孫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모부(姑母夫)인 원나라 평장(平章)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이처럼 원(元)나라에서 귀화(歸化)한 사람은 원(元)나라 이름이 따로 있었다.
이처럼 안우(安祐)의 소자(小字)가 발도(拔都)라는 말도 귀화(歸化)한 원나라 사람임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발도(拔都)의 뜻은 원나라 말(몽골어) 바투(bator. batur)로 『용감무적(勇敢無敵)의 사(士)』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말로 『용감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안우(安祐)는 어려서 바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니 분명히 원(元)나라 사람임이 확실하다.
安祐 小字拔都 : 안우(安祐) 장군의 어렸을 때 이름은 안발도(安拔都)
위 내용은 순흥안씨 모씨가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고 탐진안씨 쪽에서 과거에 언급되었던 자료인 것 같다.
1. 정인지(鄭麟趾)가 쓴『고려사(高麗史列傳)』안우(安祐) 편과
2.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성담집(性潭集)』30권 탐진안씨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 미상∼1362) 전(傳)의 내용 중에
“安祐 小字拔都” 라는 구절의 참고자료를 찾다보니 발견하게 된 듯 싶다.
조선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시문집인『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56권 앙엽기 3(盎葉記三)의 내용으로「발도(拔都)」라는 글이다. 발도(拔都)
轍耕錄。陶宗儀撰。中書丞相史忠武王天澤。髭髯已白。一朝忽盡黑。世皇見之。驚問曰。史拔都。汝髯何乃更黑。對曰。臣用藥染之故也。漢人賜名拔都者。惟王與太師張獻武王弘範及眞定新軍張萬戶興祖耳。我太祖殲倭酋阿只拔都。驟看之。似是倭名。然非也。我國方言以小兒爲阿只。雲峯之役。所馘之倭。年甚冲稚。而勇敢絶人。葢高麗服屬于胡元。凡名號稱謂。皆蒙古語。故伊時倭酋。以其年幼而爲將領。姓名官爵不可詳知。漫稱阿只拔都。但拔都之稱。未知爲何等。而史天澤,張弘範之屬。得此號。則乃是尊貴之稱。猶我國之大監令監也。太祖又破女眞人胡拔都。
(번역문)
《철경록(輟耕錄)》도종의(陶宗儀)가 지었다. 에, "중서승상(中書丞相) 충무왕(忠武王) 사천택(史天澤)의 수염이 이미 희어졌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 검어졌다. 그러자 세황(世皇)이 그것을 보고 놀라면서 묻기를 '사발도(史拔都)야, 너의 수염이 어찌 다시 검어졌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약을 사용하여 물들였기 때문입니다.' 했다."하였다.
중국 사람으로 발도라 이름이 주어진 자는 오직 왕(王)과 태사(太師)인 헌무왕(獻武王) 장홍범(張弘範)과 진정신군만호(眞定新軍萬戶)인 장흥조(張興祖)뿐이다.
그런데 우리 태조(太祖)가 왜(倭)의 추장(酋長) 아기발도(阿只拔都)를 섬멸하였는데, 언뜻 보면 이것이 왜의 이름인 것 같으나 사실은 아니다. 우리나라 방언(方言)에 소아(小兒)를 '아기(阿只)'라 한다 운봉(雲蜂)의 싸움에서 목이 잘린 왜구(倭寇)는 나이가 매우 어렸지만 뛰어나게 용감했었다고 한다. 대개 고려(高麗)가 호원(胡元)에 복속(服屬)되었을 때에 모든 명칭(名稱)이 다 몽고(蒙古) 말로 불렸기 때문에 그때의 왜추(倭酋)는 나이 어리지만 장령(將領)이 되었으므로 그 성명과 관작을 자세히 알 수 없어서 그냥 '아기발도'라고만 일컬은 것이다.
다만 발도의 칭호는 어느 등급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사천택과 장홍범의 무리들이 이 호칭을 얻은 것을 보면, 이는 곧 존귀(尊貴)한 자의 칭호로써 우리나라의 대감(大監)이나 영감(令監)과 같은 것이다.
태조(太祖)가 또 여진(女眞) 사람 호발도(胡拔都)도 격파하였다. 사천택(史天澤, 1202~1275) : 한족(漢族)
자 윤보(潤甫). 허베이[河北] 출생. 호족(豪族, 지방 토착세력) 사병직(史秉直)의 아들. 아버지와 그의 일족과 함께, 1213년 침입해온 몽골군의 사령관 무하리의 군문(軍門)으로 투항하였다. 아버지와 형이 죽은 뒤 사가(史家) 일문(一門)의 총령(總領)이 되어 진정(眞定: 河北省 正定縣)에 웅거(雄據)하며, 몽골 정권하의 유력한 한인(漢人) 세후(世侯: 封建領主)의 한 사람이 되었다. 후에 진정이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영지(領地)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일족과 친밀한 관계가 되어, 그의 아들 쿠빌라이가 원나라의 정권을 잡자, 등용되어 재상(宰相)이 되었다. 또 쿠빌라이의 한인영주 해체정책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그의 자손은 원나라 훈신(勳臣)의 집안으로 오래 번영하였다. 이어서 남송(南宋)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토벌에 나섰으나, 진중(陣中)에서 병사하였다.
아기발도(阿只拔都) : 왜(倭)의 추장(酋長)
호발도(胡拔都) : 여진(女眞) 사람
『철경록(輟耕錄)』 중국 원나라 말기에 도종의(陶宗儀, ?~1369)가 편찬한 수필. 원나라의 법률 제도와 지정(至正) 말년의 동남(東南) 여러 성(省)의 반란에 관하여 잘 기술하고 있고, 서화 문예의 고정(考訂) 따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아 원나라의 사회ㆍ법제ㆍ경제ㆍ문학ㆍ예술 따위의 연구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1366년에 완성하였다. 30권.
발도(拔都)라는 문자의 어원이 몽골어로 용감한 사람을 뜻하는 바투(bator. batur)에서 시작된 것인지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56권 앙엽기 3(盎葉記三) /「발도(拔都)」편에서 인용된 발도(拔都)라는 이름이 들어간 사람 중에 사천택(史天澤, 1202~1275)은 중국 한족이고, 이어서 기록된 고려말 태조 이성계와 관련있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왜의 추장과, 호발도(胡拔都)라는 여진(女眞) 사람도 기록하고 있다. 한족 사천택(史天澤)은 원나라 때 관직에 있었으므로, 몽골식 이름일 것 같고, 왜나라 아기발도(阿只拔都)와 여진족 호발도(胡拔都) 역시 몽골식 이름으로 우리 기록에 남겼을 수도 있을 법 하다.
발도(拔都)가 몽골어 바투의 한자식 표현인지 알아봐야 할 듯 싶다.
일단 몽골의 수도 이름으로 울란 바토르(Ulan Bator 또는 Ulan Batur)라는 단어가 있다. 몽골의 수도 울란 바토르는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라는 뜻이고, 중국어로는 우란바투오[烏蘭巴托]라 하기도 한다. 몽골어 바토르가 영웅이라는 뜻...
원나라 때 바토르의 중국식 한자를 차음한 발도(拔都)를 사용했을지, 바투오(巴托, ba-tuo)를 썻을지....
『고려사(高麗史)』113권 열전(列傳) 제26권 제신(諸臣)
正憲大夫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정인지(鄭麟趾)奉敎修。
안우(安祐) [金得培 李芳實]
安祐。小字拔都。耽津縣人。金得培。尙州人。李芳實。咸安縣人。祐。恭愍元年。拜軍簿判書鷹揚軍上護軍。累歷知樞密院事參知中書政事。得培父祿。仕至判典醬 [判典醫] 。初。州吏金祚有女曰萬宮。生七歲。祚避丹賊。趣白華城。追兵近。蒼黃棄萬宮于道。旣三日。得之林下。萬宮言。夜有物來抱。晝則去。人皆驚異。跡之。乃虎也。及長。適州吏金鎰。生祿。 得培登第。補藝文檢閱。累遷典客副令。從恭愍。入元宿衛。及王卽位。授右副代言。六年。爲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尋拜樞密院直學士。仍爲西北面都巡問使兼西京尹上萬戶。 芳實。從忠穆入元。侍從有勞。及卽位。補中郞將。遷護軍。賜田百結。恭愍三年。轉大護軍。宣城達魯花赤。魯連祥叛。芳實。以龍州兵潛渡江。直入連祥家。刺殺父子。傳首于京。 七年。祐爲安州軍民萬戶府萬戶。金元鳳副之。慶千興爲西京軍民萬戶府萬戶。得培副之。芳實以偏裨行。宰樞設祖都門外。祐醉臥日午不起。麾下觖望。 明年。紅頭賊移文曰。慨念生民。久陷於胡。倡義擧兵。恢復中原。東踰齊魯。西出函秦。南過閩廣。北抵幽燕。悉皆款附。如飢者之得膏粱。病者之遇藥石。今令諸將戒嚴士卒。毋得擾民。民之歸化者撫之。執迷旅拒者罪之。賊魁僞平章毛居敬等。衆號四萬。冰渡鴨綠江。陷義州。殺副使朱永世及州民千餘。又陷靜。麟州。殺都指揮使金元鳳。遂據麟州。祐率兵進擊。賊奔潰。追斬三十餘級。賊入鐵州。祐將七十餘騎行戰地。登山息馬。猝値賊帥毛貴。揚兵大出。將士皆懼失色。祐談笑自若。便旋盥漱。從容跨馬。引兵直前。阻淸江而陣。賊數騎登橋。麾矟賈勇。兵馬判官丁贊。奮劒大呼先登橋。斬賊將一人。賊稍却。祐與芳實。將軍李蔭。李仁祐等。奮擊大破之。賊退屯麟。靜等州。事聞。王遣使。賜祐金帶。宣州支縣民聞賊近。皆潰。賊遣兵千餘。取其穀。祐。得培領步騎一千。逐之。賊擔負不能走。追至賊屯。賊盡銳迎擊之。祐等敗。千戶吳仲興。將軍李仁祐死。士馬物故者多。退屯定州。賊遂陷西京。 又明年。芳實遇賊于鐵化。斬百餘級。諸軍次生陽驛。摠二萬。時天寒。士卒手足凍皺。顚仆甚衆。賊知我軍將戰。殺所虜人以萬計。積尸如丘。我軍進攻西京。步兵先入。躪死者千餘。賊兵死者。無慮數千人。賊退屯龍岡。咸從。王以祐爲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芳實爲上萬戶。金於珍。爲副萬戶。祐等進軍咸從。賊乘我軍未陣。突擊之。我軍敗走。賊以精騎躡之。祐。芳實。於珍大將軍李珣等。殿以拒之。賊不得逼。會。東北面千戶丁臣桂。引兵一千而至。與賊殊死戰。斬數十級。賊追至五十里而止。我步兵登山以免。其被殺掠者千餘。賊四百餘人屯肅州山谷閒 [間] 。聞其黨敗於西京。還趣義州。中郞將柳塘。郞將金景。在義州修城門。聞之。召州千戶張倫。發龍州等處兵擊之。賊入保靜州城。塘等進攻殲之。我軍又戰于咸從。判開城府事辛富。將軍李堅死。諸軍力戰。賊勢窮。入柵自保。我步兵入柵擊之。騎兵環柵亂射。殺二萬級。擒僞元帥沈刺。黃志善。賊退保甑山縣。芳實以精騎一千。追至延州江。祐。得培。於珍。亦率精騎繼至。賊窘渡江。冰陷。死者殆數千。賊登岸。作隊爲抗拒狀。我軍疑窮寇死戰。斂兵不追。是夜。賊遁。芳實蓐食追之。賊徒飢困。安鐵數州之閒 [間] 。死者相枕。芳實追至古宣州。以輕騎蹙之。殺數百。賊死戰。芳實以人馬困憊。斂兵而止。餘賊三百餘。一日一夜。至義州。渡鴨江而走。芳實。祐等。追不及而還。祐等。初從鴨綠抵西京。又自咸從。還至鴨綠。凡九戰。祐。得培與慶千興。遣李珣。金仁彦告捷。王勞諭召還。命泥城萬戶金璡。守鴨綠夏防。 祐等上牋賀曰。紅衣之爲寇。鷙悍狼貪。雖白額當前。狐綏兎狡。所欲必得。險阻所遇。莫不屠殘。虐焰俱焚。望之膽破。臭風如遡。動則心悲。以吾久玩太平之民。當彼敢行死拒之賊。誠亦難哉。淸江。安州之役不利。雖臣輩之無良。西京。咸從之戰見功。是社稷之有德。原野積屍之累萬。關津突騎則逾千。所欠漏厥兇魁而以爲遺恨。然繩木自盡者多。則其窘勿問。抑夫妻相刎者半則所計已窮。度彼中心無復東意。雖然。在賊中便弓馬稍多。本朝之人。比年閒 [間] 作罪辜。儻是宣城之孽。如不艾舊惡。當更虞將來。殿下念臣等久於水草之勞。敝於死亡之辱。允納凱歸之報。明垂召入之言。不覺蛟泣之沾膺。欣瞻龍顔則拊脾。所有邊事。悉歸夏防。然而顧一方之形容。假數年則蘇息。糟糠得接於口。亦尙幸焉。酒肉將求於民。不可忍也。使華往返。宴飮費需。除朝夕粥飯外。宜一切禁之。驛館緣于道塗。騶吏出於州縣。州驛相去。更日而行。供給次番。盡月而代。除安州以南外。嘉定隨郭宣鐵龍麟之人。宜不出本州。以待賓客。姑寢其驛館。人民不得已而奴辱於虜。軍官無乃何而逃竄於山。勢非苟然。力不贍爾。除謀故外。宜先數其愆而第宥之。使恩威竝行而不悖。平民。奴婢。良家子孫。將士自爲功。或有在於俘獲。主帥雖出令。安能究於倉皇。除漢兒男女外。亦宜令所司體察。督還本元。臣等昨者在行陣閒 [間] 。往往事有可訊瘼。以今月初吉。離軍上赴天朝。謹奉牋陳進以聞。王批答云。窮寇之來。肆毒有如蜂蠆。義兵所至。定威奚啻雷霆。當其奏凱而還。嘉乃馳牋而賀。師旣旋。大饗將士。拜祐推忠節義定亂功臣中書平章政事。得培輸忠保節定遠功臣政堂文學。芳實推誠協輔功臣樞密院副使。紅賊七十艘。又寇西海道。遣芳實。邀擊于豐州。斬三十餘級。賊乘舟遁去。王宴群臣。賜芳實玉帶玉纓。公主曰。何不愛至寶。輕以與人。王曰。使我宗社不爲兵墟。百姓不爲魚肉。皆芳實功也。予雖割肌膚以與之。尙不能報。況此物乎。 十年。紅賊僞平章潘誠。沙劉。關先生。朱元帥。以龍鳳紀元。率衆二十萬。渡鴨綠江。寇朔州。泥城。祐爲上元帥。得培爲都兵馬使。芳實爲都指揮使。知肅州康呂。火民戶而逃。賊屯撫州。芳實以彼衆我寡。按兵不進。請移殷順成三州。陽岩。樹德。江東。三登。祥原五縣民及粟于岊嶺柵。從之。芳實遣判司農事趙天柱。左丞柳繼祖。大將軍崔準等。擊賊于博州。敗之。禮部尙書李珣。邀擊于泰州。斬七級。芳實與指揮使金景磾。至价州。擊斬百五十餘級。祐遣趙天柱。鄭履。張臣補。李元桂。洪瑄。鄭詵等。以步騎四百。至博州擊斬百餘級。芳實又以百騎。擊斬二十級于延州。祐領諸軍。進屯安州。獻捷曰。丁贊。王安德。金仁彦。許子麟。朴壽年。金琦。鄭元甫。兪之哲。邊安烈。權長壽。趙麟。趙仁璧等皆力戰有功。乞加賞。以作士氣。王命祐爲都元帥曰。閫外之事。將軍制之。爾其賞罰用命。不用命。賊襲安州。我軍敗。上將軍李蔭。趙天柱死。賊獲景磾。爲其元帥。移文曰。將兵百十萬而東。其速迎降。王遣密直提學鄭思道。金㺩。守岊嶺柵。賊夜伏兵萬餘於柵旁。鷄鳴。以鐵騎五千攻破柵門。我軍大潰。祐。得培等。單騎奔還。祐行收兵。與摠兵官金鏞等。屯金郊驛。鏞遣左常侍崔瑩。請遣京兵。王知事急。遂謀避亂。使京城婦女老弱先出城。人心洶洶。賊先鋒至興義驛。王及公主將南行。鏞。祐。芳實等馳至。以爲京城不可不守。瑩尤痛憤大叫曰。願上小留。募丁壯守宗社。宰臣相顧黙然。駕幸旻天寺。遣近臣往通衢大呼。招集義兵。都人皆散。應者纔數人。祐等無如之何。白王曰。臣等留此禦賊。請王行。王遂南幸。出崇仁門。老幼顚仆。子母相棄。躪籍滿野。哭聲動天地。後數日。賊陷京城。留屯數月。殺牛馬。張皮爲城。灌水成冰。人不得緣上。又屠炙男女。或燔孕婦乳食之。恣其殘虐。王在福州。以鄭世雲爲摠兵官。督諸軍。 十一年。祐。芳實。得培。黃裳。韓方信。李餘慶。安遇慶。李龜壽。崔瑩率兵二十萬。屯東郊天壽寺前。世雲督令進軍。諸將圍京城。世雲退屯兜率院。時方雨雪。賊弛備。餘慶當崇仁門。麾下護軍權僖。詗知之曰。賊之精銳。皆聚於此。出其不意。攻之可克。翼日昧爽。僖率數十騎突入。鼓譟奮擊。賊衆驚駭。諸將乘之。四面急擊。我太祖以麾下親兵二千人先登。大敗之。日晡時。斬賊魁沙劉。關先生等。賊徒自相蹈籍。僵屍滿城。斬首凡一十餘萬。獲元帝玉璽二。金寶一。玉印三。金銀銅印。金銀器。牌面等物。諸將咸曰。窮寇不可盡也。乃開崇仁。炭峴二門。餘黨破頭潘等十餘萬。奔渡鴨綠江而走。賊遂平。 攻城之日。賊雖窮蹙。築壘固守。諸軍進圍逼之。太祖止路旁家。夜半。賊闌圍而走。太祖馳至東門。賊及我軍爭門。雜遝不可出。有後至賊。以槍刺太祖右耳後。勢急。太祖拔劒。斫前七八人。躍馬踰城。馬不跌。人皆神之。鏞素與世雲爭寵。又恐祐。得培。芳實等成大功。爲王所重。欲使祐等殺世雲。因以爲罪。而盡殺之。乃矯旨爲書。使其姪前工部尙書金琳。密諭祐等。令圖世雲。且曰。世雲素忌卿等。破賊之後。必不免禍。盍先圖之。祐。芳實。就得培牙帳曰。今世雲畏賊不進。鏞書如此。不可不從。得培曰。今甫平賊。豈宜自相翦滅。昔攘苴擅誅莊賈。衛靑不殺蘇建。古今明鑑。不可不愼。若不獲已。執致闕下。聽上區處。不亦可乎。祐。芳實乃退。及夜。復來言曰。誅世雲。君命也。我輩成功而不奉命。其如後患何。得培堅執不可。祐等强之。於是置酒。使人邀世雲。旣至。祐等目壯士。於坐擊殺之。王聞變。遣直門下金瑱頒赦。令諸將赴行在。以安其心。旣而福州守朴之英。言于宰相曰。芳實獨殺世雲。祐等亦遇害。王恐生他變。卽召瑱還。將調兵討之。判事金賢。上將軍洪師禹來獻諸將論世雲書。王大悅。賜賢金銀布帛。復遣瑱頒赦。召之英。責曰。汝何妄言。予念其老。不置於法。止令罷歸鄕里。又遣知奏事元松壽。賜諸將衣酒。祐至咸昌縣。王擇大臣有計畫者。往迎之。以備非常。乃遣侍中柳濯。濯至。跪進酒。請元帥立飮。祐不敢。濯曰。今公收復三韓。僕敢以爵位爲心。一柸之後。豈復請立飮耶。因泣下。 明日。祐凱還。詣行宮上謁。鏞令睦仁吉。引至中門。使門者搥其首。祐辭色不變。三叩所佩囊。大呼曰。幸小緩。願至上前。獻囊書就戮。王未及聞。搥者更擊殺之。曳下庭。王不知其死。傳旨曰。汝等擅殺鄭世雲。身首異處。今不斬汝。以有大功也。囊書。卽鏞紿祐等。殺世雲書也。鏞恐琳洩其謀。先斬之。遂白王曰。祐等擅殺主將。是不有殿下也。罪不可赦。王聞祐死。其幼子。祼 [裸] 立道旁。哀之。召留禁中。問其所歸遣之。麾下士驚潰。王召。賜酒食勞之。鏞與洪彦博。柳濯。廉悌臣。李岩。尹桓。黃裳。李春富。金希祖。禀旨揭榜云。祐等不忠。擅殺世雲。祐已伏辜。有能捕得培。芳實者。超三級錄用。分遣大將軍吳仁澤。御史中丞鄭之祥。萬戶朴椿。金庾等捕之。 是日。芳實赴行在。至龍宮縣。王命芳實舅右散騎辛珣。按廉成元揆。往迎。椿至。稱有旨。芳實下庭跪。仁澤拔劒擊之。卽仆絶。良久復蘇。踰垣走。椿追執之。芳實欲拔椿劒。之祥等從後擊殺之。得培至基州。聞變。率數騎。逃匿山陽縣先塋側。流其弟得齊于花山。囚得培妻孥。鞫之。其壻直講趙云仡。謂妻母曰。直言之。毋受苦楚。妻母隱忍久之。乃告。庾。椿。之祥。元揆等。捕斬之。梟首尙州。年五十一。觀者莫不嗟悼。 得培門生直翰林鄭夢周。請王收屍。爲文以祭曰。嗚呼皇天。我罪伊何。嗚呼皇天。此何人哉。蓋聞福善禍淫者。天也。賞善罰惡者。人也。天人雖殊。其理則一。古人有言曰。天定勝人。人衆勝天。天定勝人。果何理也。人衆勝天。亦何理也。往者。紅寇闌入。乘輿播越。國家之命。危如懸綫。惟公首倡大義。遠近嚮應。身出萬死之計。克復三韓之業。凡今之人。食於斯。寢於斯。伊誰之功歟。雖有其罪。以功掩之。可也。罪重於功。必使歸服其罪。然後誅之。可也。柰何汗馬未乾。凱歌未罷。遂使泰山之功。轉爲鋒刃之血歟。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吾知其忠魂壯魄。千秋萬歲。必飮泣於九泉之下。嗚呼。命也。如之何。如之何。芳實子中文。祐子。年甫十餘。遊市街。人爭以物饋之曰。今我輩獲安寢食。三元帥之功也。至有垂涕者。
(번역문)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의 기사 첨부]
안우(安祐)는 어렸을 때 이름은 안발도(安拔都)요, 탐진현(耽津縣) 사람이다. 김득배(金得培)는 상주(尙州) 사람이며, 이방실(李芳實)은 함안현(咸安縣) 사람이다. 안우는 공민왕(恭愍王) 원년에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임명되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지 추밀원사(知樞密院事), 참지 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 되었다. 김득배(金得培)의 아버지 김록(金祿)은 벼슬이 판 전의(判典醫)에 이르렀었다. 처음에 주(州)의 관속 김조(金祚)가 딸을 두었는데 이름을 김만궁(金萬宮)이라 하였다. 딸이 7살 때에 김조는 단적(丹賊)을 피하여 급히 왈화성(曰華城)으로 가다가 적이 가까이 다가 왔으므로 창황하여 만궁을 길가에 버리고 갔다. 사흘이 지난 후에 수풀 속에서 찾으니 만궁이 말하기를 “밤이면 무엇인가 와서 껴 안아 주고 낮이면 가곤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자취를 밟아 간즉 그것은 범이었다. 자라서 주의 관속 김일(金鎰)에게 출가하여 녹(祿)을 낳았다. 김득배는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로 임명되었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 전객 부령(典客副令)이 되었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숙위(宿衛)로 갈 때에 따라 갔다. 왕이 즉위하자 부대언(副代言)으로 임명되었다. 6년에 서북면 홍두, 왜적 방어 도지휘사(紅頭, 倭賊防禦都指揮使)로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되었고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겸 서경윤 상만호(西京尹上萬戶)를 지냈다. 이방실(李芳實)은 충목왕(忠穆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으로 공로가 있었다.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中郞將)으로 임명되었다가 호군(護軍)으로 전임하고 토지 1백 결을 받았다. 공민왕 3년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직하였다. 선성 달로화적(宣城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이 반란하자 이방실은 용주(龍州) 군대를 동원하여 몰래 강을 건너 곧장 노연상의 집으로 가서 그 부자(父子)를 찔러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서울로 보냈다. 7년에 안우를 안주 군민 만호부 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로, 김원봉(金元鳳)을 그 부관으로, 경천흥(慶千興)을 서경 군민 만호 부만호로, 김득배를 그 부관으로, 이방실(芳實)을 편비(偏裨)로 임명하였다. 그들이 출발할 때에 재추(宰樞)들이 도문(都門) 밖에 나가 환송하였는데 안우는 술에 취하여 한낮이 되도록 일어 나지 않았으므로 사병들이 실망하였다. 이듬해에 홍두적(紅頭賊)이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었다. “민생이 오랫 동안 북방 이민족의 지배 하에 있는 것을 개탄하여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서 이미 중원(中原)을 회복하고 동쪽으로는 제, 노(齊魯)를 넘고 서쪽으로는 함진(函秦)을 지났으며 남쪽으로는 민, 광(閩廣)을 지나고 북쪽으로 유연(幽燕)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모두 주린 자가 좋은 음식을 만나고 병든 자가 약을 얻은듯이 즐겨 우리에게로 돌아 섰다. 이제 모든장수들에게 일러 사졸들을 엄격히 단속하여 백성을 괴롭히지 말며 귀화하는 자는 무마할 것이며 깨닫지 못하고 항거하는 자는 처벌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적의 괴수 가짜 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얼음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함락하고 부사(副使) 주 영세(朱永世) 및 그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죽였다. 또 정주(靜州), 인주(麟州)를 함락하고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인 후 마침내 인주에 주둔하였다. 안우가 군대를 거느리고 진격하니 적이 패주하였으므로 추격하여 30여 명을 죽였다. 적이 철주(鐵州)로 들어 갔으므로 안우가 70여 기를 거느리고 전선으로 나가는 길에 산에 올라 가 군마를 휴식시키던 중 갑자기 적의 장수 모귀양(毛貴揚)의 대부대와 마주쳤다. 장병들이 모두 당황실색하였으나 안우는 언어와 기색이 태연하였으며 대소변과 세수를 마친 후에 유유히 말에 올라 군대를 거느리고 맞받아 나가 청천강가에 진을 쳤다. 적의 기병 약간 명이 다리 위에서 긴창을 휘두르며 기세를 뽐내는 것을 보고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찬(丁贊)이 검을 휘두르면서 고함치며 앞장 서서 다리로 올라 가 적의 장수 한 명을 죽이자 적은 조금 물러 섰다. 안우는 이방실, 장군 이음(李蔭), 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용감히 싸워 적을 대파하였다. 적은 퇴각하여 인주(麟州) 정주(靜州) 등지에 주둔하였다. 전과를 보고하니 왕이 사자를 보내 안우에게 금띠(金帶)를 주었다. 선주(宣州) 관내 여러 현(縣)들에서는 적이 가깝게 다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다. 적은 군대 1,000여 명을 보내 그 곳 양곡을 약탈하였다. 안우와 이득배가 보병 및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적은 짐을 졌으므로 빨리 달아 날 수 없었으며 아군은 적의 주둔처까지 추격하였다. 그러자 적이 정예 부대를 총출동하여 반격하였으므로 안우 등이 패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천호(千戶) 오중흥(吳仲興), 장군 이인우는 전사하였으며 전사와 군마를 많이 상실하였고 후퇴하여 정주에 주둔하였다. 적이 마침내 서경을 함락시켰다. 또 다음 해에 이방실이 적을 철화(鐵化)에서 만나 100여 명을 죽이었다. 전체 부대가 생양역(生陽驛)에 집결하니 도합 2만 이었다. 이때 추위가 심하여 사졸 중에서 손발에 동상을 입고 쓰러진 자가 대단히 많았다. 적은 아군이 곧 진공하리라는 것을 알고 포로된 인원을 살육하였는데 피살자가 만으로 헤아리게 되었으며 시체를 쌓은 것이 산과 같았다. 아군이 서경을 진공하였을 때에 보병이 선참으로 돌입하여 밟혀 죽은 자가 1,000여 명이고 적병의 죽은 자는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적은 퇴각하여 용강(龍岡), 함종(咸從)에 주둔 하였다. 왕이 안우를 안주 군민 만호부 도만호(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로, 이방실을 상만호(上萬戶)로, 김어진(金於珍)을 부만호(副萬戶)로 임명하였다. 안우 등이 함종으로 진군하니 적이 아군의 진지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틈을 타서 돌격하였으므로 아군이 패주하니 적이 정예 기병으로 추격하였다. 안우, 이방실, 김어진, 대장군 이순(李珣) 등이 후방을 담당하여 막았으므로 적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동북면 천호 정신계(丁臣桂)가 군대 1천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적과 결사전을 하여 적 수십 명을 무찔렀다. 적은 50리를 따라 오다가 그만 두었다. 아군 보병은 산으로 올라 가 피해를 면한 자가 1,000여 명이었다. 적 400여 명이 숙주(肅州) 산중에 주둔하였다가 적이 서경에서 패한 소식을 듣고 급히 의주로 돌아 갔다. 중랑장 유당(柳塘)과 낭장 김경(金景)이 의주에서 성문을 수리하다가 이 소문을 듣고 그 주의 천호 장륜(張倫)을 불러 용주 등지의 군대를 징발하여 적을 맞받아 치니 적이 정주성(靜州城)으로 들어 가 농성하였으므로 유당 등이 진공하여 섬멸하였다. 아군은 또 함종에서 전투하였는데 이때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 장군 이견(李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전체 군대가 용감히 싸웠으므로 적은 형세가 궁박하여 책(柵) 안으로 들어 가 방어 태세를 취하였다. 아군 보병은 책 안으로 돌입하여 공격하고 기병은 책(柵)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전개하여 적 2만 명을 무찌르고 가짜 원수(僞元帥) 심자(沈刺), 황지선(黃志善)을 포로하였다. 적이 퇴각하여 증산현(甑山縣)에서 방어 태세를 취하였으므로 이방실이 정예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여 연주강(延州江)에 이르렀을 때 안우, 이득배, 김어진 등도 역시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뒤따라 와서 합세하였다. 적은 궁지에 빠져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은 자가 거의 수천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강 언덕에 올라 서는 대오를 지어 항거할 태세를 보였으므로 아군은 궁지에 빠진 적이 결사전으로 나올가 의심하여 군대를 거두고 추격을 중지하였다. 이날 밤에 적이 몰래 도망치자 이방실이 군사들에게 밤중에 식사를 시켜서 추격하였으므로 적들은 굶주리고 피로하여 안주와 철주(鐵州) 등 몇 개 고을에 걸쳐서 죽은 자가 서로 맞닿았었다. 이방실이 추격을 계속하여 고선주(古宣州)에 이르러 정예 기병으로 육박하여 수백 명을 무찌르자 적이 결사적으로 대항하였다. 이방실은 인마가 피로하였으므로 군대를 거두어 진격을 멈추었다. 적의 잔존 인원 3백여 명이 하룻 밤 하룻 낮을 달려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너 달아 났다. 이방실, 안우 등이 추격하였으나 따라 잡지 못하고 돌아 왔다. 안우 등은 처음에 압록강으로부터 서경까지 또 함종으로부터 압록강까지 오고 가면서 그 간에 도합 아홉 번 전투하였다. 안우, 이득배는 경천흥과 함께 이순(李珣), 김인언(金仁彦)을 보내 승리를 보고하니 왕이 위로하여 소환하고 이성 만호(泥城萬戶) 김진수(金璡守)에게 압록강의 하기(夏期) 방어를 명령하였다. 안우 등이 왕에게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하였다. 그 글에 말하기를 “홍적(紅賊)은 새매처럼 사나우며 승냥이처럼 탐욕스럽습니다. 비록 백마가 앞에 닥쳐 와도 여우처럼 덤벼들고 토끼처럼 교활하여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수중에 넣고야 마는바 그 앞에 부딪친 험고한 요해지로서 도륙당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 잔학한 기세는 불길이 분별 없이 타오르듯 하였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여도 간담이 터질듯하며 바람을 따라 풍기는 그 악취는 숨이 막히게 되어 움직이면 마음만 슬퍼집니다. 그런데 한편 오랫 동안 태평을 구가하던 우리 백성으로서 죽기를 기 쓰고 덤벼 드는 악당들과 맞서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청천강과 안주의 전투에서 불리하였던 것은 저희들이 무능한 탓이었으나 서경과 함종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은 사직에 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기간에 산야에 쌓인 시체는 수만에 달하였고 산마루와 강 언덕의 요해지에 돌입하여 들어간 장사는 천명을 넘었습니다. 그러면서 적의 일부 괴수를 놓친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들 중에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한 자가 많으니 그 형세가 궁박한 것은 묻지도 말 것이며 부부가 서로 찔러서 죽은 자가 태반이라는 점으로 보아서 이미 희망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중을 추측하건대 다시 동쪽으로 올 의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 중에는 활과 말에 익숙한 자가 상당히 많고 한편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근년에 왕왕 반란을 꾀하는 자가 있으니 그러므로 만약 선성(宣城)의 악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옛 악(惡)이 반복되어 장래에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는 저희들이 오랫동안 동분 서주하면서 생사의 기로에서 피로하였음을 고려하여 저희들이 올린 승전 보고를 가납하고 소환 명령을 내리니 어느덧 눈물이 옷깃을 적시며 전하의 얼굴을 쳐다 보게 되면 기쁘기 한량 없을 것입니다.” 일체 변방 수비는 하기(夏期) 방어에 위임하였으나 그 곳 형편을 살펴 보건대 몇 해만 지나가 백성들이 소생하여 겨죽이나마 먹게 되면 오히려 다행할 것이므로 앞으로 술과 고기를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왕하는 사절의 접대도 조반 석죽 이외는 일체 금지할 것입니다. 역관(驛館)은 도로 연변에 있어서 안내하는 관속이 주현(州縣)들에서 출장하는데 고을과 역 사이의 거리는 하룻길이 넘으며 공급 순번은 한 달이 지나야 교대됩니다. 그러므로 안주 이남을 제외하고 가(嘉), 정(定), 수(隨), 곽(郭), 선(宣), 철(鐵), 용(龍), 인(麟) 등 고을 사람은 제 고을에서 나가서 손님 접대하는 것을 그만 두고 당분간은 그 역관도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부득이하여 적의 노예 노릇을 하는 굴욕을 당하였으며 군인은 하는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이것은 사세 부득이한 것이며 힘이 미약한 까닭이었습니다. 고의로 반란을 도모한 자를 제외하고는 먼저 그 잘못은 지적하여도 이어 용서하여야 할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은혜와 위신이 함께 서게 할 것이요, 평민, 노비, 양가 자손 및 장병들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다가 혹 적에게 포로된 자가 있는바 이것은 지휘관이 아무리 단속하였으나 황급한 환경에서 모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인 남녀를 제외하고는 역시 해당 기관에 명령하여 실정을 심사한 후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도록 독려케 하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어제까지 전선에 있으면서 왕왕 백성의 고통을 들을 수 있었으며 또 이 달 초순에 군무를 떠나 서울로 돌아 가게 되므로 삼가 이 글을 올려 사정을 진술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비답(批答-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하기를 “궁지에 빠진 도적들이 이 땅에 들어 와 벌(蜂) 같이 해독을 뿌리자 정의의 군대가 출동하여 일거에 소탕 평정하였으니 그 위세야말로 놀랄 만하다. 지체 없이 개선할 것이며 축하 편지를 가상히 여긴다”라고 하였다. 군대가 개선하자 장졸들을 위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안우에게 추충 절의 정란 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 칭호와 중서 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를. 이득배에게 수충 보절 정원 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 칭호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이방실에게 추성 협보 공신(推誠協輔功臣) 칭호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홍적의 군함 70척이 또 서해도(西海道)에 침입하였으므로 이방실을 보내 풍주(豊州)에서 요격하여 30여 명을 죽이니 적은 배를 몰아 도망쳤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연회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玉帶)와 옥 갓끈(玉纓)을 주었다. 이때 공주가 “어찌 귀중한 보물을 아끼지 않고 손쉽게 남을 주십니까?”라고 하니 왕이 “우리 나라와 종묘가 폐허로 되지 않고 백성이 무리 죽음을 면하게 한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이다. 내가 비록 살을 베어 주어도 오히려 그 공을 갚을 수 없거든 하물며 이따위 물건이랴!”라고 말하였다. 10년에 홍적의 거짓 평장(僞平章)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가 용봉(龍鳳)이라는 연호를 표방하고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 이성(泥城)에 침입하였다. 안우를 상원수(上元帥)로, 김득배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이방실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이때 지 숙주(知肅州) 강려(康呂)는 민간 가옥을 불사르고 도망쳤으며 적은 무주(撫州)에 진주하였다. 이방실은 적아의 세력이 현수하므로 진격을 중지하고 은(殷), 순(順), 성(成) 등 3주와 양암(陽岩), 수덕(樹德), 강동(江東), 삼등(三登), 상원(祥原) 등 5현의 백성과 양곡을 절령책으로 옮길 것을 제의하여 왕의 승인을 얻었다. 이방실(李芳實)은 판 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유계조(柳繼祖), 대장군(大將軍) 최준(崔準) 등을 보내 적을 박주(博州)에서 격파하였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순(李珣)은 적을 태주(泰州)에서 맞받아 쳐서 7명을 죽였으며 이방실은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함께 개주(价州)로 진격하여 150여 명을 무찔렀다. 안우는 조천주, 정리(鄭履), 장신보(張臣補), 이원계(李元桂), 홍선(洪瑄), 정선(鄭詵) 등을 보내 보병 및 기병 4백으로써 박주(博州)로 진격하여 100여 명을 무찔렀다. 이방실은 또 기병 100기로써 연주(延州)에서 20명을 죽였다. 안우는 전체 군대를 영솔하고 안주에 진주하여 전승 보고를 올리면서 왕에게 “정찬(丁贊), 왕안덕(王安德), 김인언(金仁彦), 허자린(許子麟), 박수년(朴壽年), 김기(金琦), 정원보(鄭元甫), 유지철(兪之哲), 변안열(邊安烈), 권장수(權長壽), 조린(趙麟), 조인벽(趙仁壁) 등은 모두 용감히 싸워 공을 세웠으니 상을 주어 사기를 고무하여 주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왕이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면서 “군중 일은 장군이 권력을 도맡아 가지고 마음대로 할 것이며 상벌에 대하여도 자유 재량하라.”고 하였다. 적이 안주를 습격하여 아군이 패배하고 상장군 이음(李蔭), 조천주는 전사하였다. 적은 김경제를 포로하여 그의 원수(元帥)로 삼고 편지를 전하기를 “110만의 병력을 가지고 동쪽으로 왔다. 속히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 김슬(金㺩)을 보내 절령책(岊嶺柵)을 수비하게 하였다. 적이 밤에 책 근방에 군대 만여 명을 복병시켰다가 닭이 울 무렵에 강력한 기병 5천으로 책문을 파괴하고 공격하자 아군은 대패하여 붕괴되였다. 안우, 김득배 등이 단신으로 도망쳐 돌아 왔다. 안우가 다시 군대를 수습하여 총병관(摠兵官) 김용(金鏞) 등과 함께 금교역(金郊驛)에 주둔하면서 좌상시(左常侍) 최영(崔瑩)을 보내 경성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사태가 급박한 것을 짐작하고 마침내 피난을 계획하고 경성의 부녀자와 늙고 약한 사람들을 먼저 성 밖으로 나가게 하였으므로 민심이 흉흉하였으며 또 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에 다가 왔다. 이에 왕과 공주는 남방으로 떠나 가려 하였다. 김용, 안우, 이방실 등이 달려 와서 경성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특히 최영은 크게 흥분하여 “바라건대 전하는 잠시 기다려 군사를 모집하여 종묘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때 재상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잠자코 있었다. 왕은 민천사(旻天寺)로 가서 측근자들을 시내로 보내 크게 호소하여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서울 사람은 전부 흩어져 응하는 자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안우 등은 할 수 없이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곳에 남아 적을 방어 할 것이니 전하는 떠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드디어 남쪽으로 떠났다. 왕이 숭인문(崇仁門)을 나가니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며 어머니와 아이들이 서로 돌보지 못하고 짓밟히고 마주쳐 쓰러진 자가 들판에 가득 널려 있고 울음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수일 후에 적이 경성을 점령하였다. 적은 수 개월 간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에 소와 말을 도살하여 그 가죽을 둘러 성으로 삼고 그 위에 물을 부어 얼음 판을 만들어 사람이 타고 올라 갈 수 없게 하였다. 또 사람을 죽여 구워 먹고 혹은 아이를 밴 여자의 젖을 도려 구워 먹는 등 그 잔인성과 포악성을 남김 없이 드러내었다. 왕은 복주(福州)에 있으면서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하고 전체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11년에 안우, 이방실, 김득배, 황상(黃裳), 한방신(韓方信), 이여경(李餘慶), 안우경(安遇慶), 이구수(李龜壽), 최영(崔瑩)이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서울 동쪽 교외 천수사(天壽寺) 앞에 집결하였다. 정세운이 진격하기를 독촉하여 모든 장수들이 경성을 포위하자 정세운은 물러 가 두솔원(兜率院)에 주둔하였다. 때마침 눈비가 내려 적의 방비가 허술하였었다. 그때 이여경은 숭인문(崇仁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부하 호군(護軍) 권희(權僖)가 탐지한 정세를 말하기를 “적의 정예 부대가 모두 여기 모였으니 불의에 공격하면 타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권희가 기병 수십 기를 거느리고 돌입하여 북을 치고 함성을 올리며 맹렬히 쳐 들어 가니 적은 놀라 혼겁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이 기회를 타서 사면으로 돌격전을 개시하였다. 우리 태조(이성계)는 휘하 군대 2천 명으로써 선두에서 싸워 적을 대파하였다. 해질 무렵에 적의 괴수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어 죽였다. 적들은 저희들끼리 밟혀 죽은 시체가 성 안에 가득 찼었고 목을 베인 것이 대체로 10여 만에 달하였다. 그 밖에 원나라 임금의 옥새(玉璽) 2, 황태자의 금인 1, 옥 도장 3, 금, 은, 동 도장, 금, 은 기명, 패면(牌面) 등 물품을 노획하였다. 이윽고 모든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지에 빠진 적을 씨도 없이 소탕할 것이 아니다.”라 하고 곧 숭인(崇仁), 탄현(炭峴) 두 문을 열어 주었다. 패잔의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 만은 도망하여 압록강을 건너 달아 나니 적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은 비록 궁박하였으나 보루를 쌓고 고수하였으므로 전체 부대가 포위망을 압축하여 진격하였을 때 우리 태조(이성계)는 길가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밤중에 적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였으므로 태조는 말을 달려 동문으로 갔다. 이때 거기서 적과 아군 간에 성문 쟁탈전이 벌어져 혼잡한 통이어서 나갈 수 없었는데 뒤에 온 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 쪽 귀 밑을 찔렀으며 뒤에서 오는 적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태조는 검을 빼어 앞에 있는 적 7∼8명을 찔러 눕히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 넘었다. 이때 말이 쓰러지지 않은 것을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김용은 본디 정세운과 세력 다툼을 하였고 또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워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안우 등을 시켜 정세운을 죽이게 한 후 그것을 빙자하여 죄를 씌워 몽땅 죽일 것을 꾀하였다. 이리 하여 임금의 편지를 위조하여 그의 조카벌이 되는 전공부 상서(前工部尙書) 김림(金琳)에게 주어 비밀히 안우 등을 꾀어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덧붙여 말하기를 “정세운이 평소에 그대들을 꺼리었으므로 적을 격파한 후에는 결코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먼저 손을 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를 진중에 찾아 가서 말하기를 “금번에 정세운은 적을 두려워하여 진격에 참여하지 않았고 김용의 편지가 또한 이러하니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니 김득배가 “이제 겨우 적을 격파하자마자 어찌 우리들이 서로 죽인다는 말인가 옛적에 양저(穰苴-춘추 시대의 제나라의 명장)는 마음대로 장가(莊賈)를 죽였으나 위청(衛靑-한나라 무제 때의 대장군)은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고금을 통하여 교훈으로 되며 신중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집정(執政)이 임금께 말하여 조처하도록 하면 좋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은 곧 물러 갔다가 밤이 되어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처단하라 함은 임금의 명령이다. 우리들이 공을 세워도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후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으나 김득배가 견결히 반대하므로 안우 등이 강요하였다. 이에 술을 준비하고 사람을 보내 정세운을 청해 왔다. 그가 오자 안우 등이 장사에게 눈짓을 하여 그 자리에서 쳐 죽였다. 왕이 사변을 듣고 직문하(直門下) 김전(金瑱)을 보내 대사 (大赦)를 선포하고 모든 장수를 행재소(行在所)로 오게 함으로써 그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뒤미처 복주 수령 박지영(朴之英)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이방실이 단독으로 정세운을 죽였고 안우 등 역시 살해되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은 다른 변고가 생길가 염려하여 곧 김전을 소환하고 군대를 소집하여 토벌하려 하였다. 그러는 차에 판사(判事) 김현(金賢)과 상장군 홍사만(洪師萬)이 와서 제장(諸將)이 정세운의 죄를 논한 서면을 보이자 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김현에게 금, 은 및 피륙을 주고, 다시 김전(瑱)을 보내 대사를 포고케 하고, 박지영을 불러 책망하기를 “너는 무슨 그러한 망녕된 말을 하는가, 내가 너의 늙은 것을 고려하여 법에 부치지 않고 다만 면직시켜 고향으로 돌려 보낸다.”라고 하였다. 또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를 보내 모든 장수들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안우가 함창현(咸昌縣)에 도착하였을 때 왕은 대신 중에서 사려가 있는 자를 택하여 맞아 옴으로써 만일의 경우에 대비할 고려 밑에 시중(侍中) 유탁(柳濯)을 보냈다. 유탁이 가서 무릎을 꿇고 술을 권하면서 원수가 서서 마시기를 권하였으나 안우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유탁이 말하기를 “당신은 삼한(三韓)을 회복하였는데 내가 벼슬이 높다 하여 어찌 감히 먼저 마신 후에 다시 권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 그만 눈물을 흘렸다. 다음 날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에 이르러 왕을 뵈이려 할 때에 김용이 목인길(睦仁吉)을 시켜 안우를 중문(中門)으로 인도하게 하고 문지기를 시켜 망치로 머리를 내리쳤다. 안우는 언성과 안색을 변하지 않고 차고 있던 주머니를 손으로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요행 잠시의 여유를 얻어 임금 앞에 가서 주머니의 편지를 드린 후에 형을 받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에게는 들리지 않았고 망치를 든 자가 다시 쳐서 죽인 후 아래 뜰로 끌어 갔다. 왕은 그가 죽은 것을 모르고 명령을 전달하기를 “너희들이 함부로 정세운을 죽였으니 목을 벨 것이다. 지금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주머니의 편지는 즉 김용이 안우 등을 속여 정세운을 죽이게 한 편지였다. 김용은 김림이 그 비밀을 누설할까 염려하여 우선 그를 죽이고 왕에게 말하기를 “안우 등이 함부로 주장(主將)을 죽였으니 이것은 전하를 무시한 것이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안우가 죽은 후 그의 어린애들이 발가벗고 길가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엾이 여겨 궁중으로 불러 그 아이의 희망하는 곳으로 보냈다. 안우의 휘하 사병들이 놀라 동요하므로 왕이 불러 술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김용은 홍언박(洪彦博),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이암(李岩), 윤환(尹桓), 황상(黃裳), 이춘부(李春富), 김희조(金希祖)와 함께 임금의 승인을 받아 방문을 내어 붙이기를 “안우 등은 신하의 본분을 잊고 함부로 정세운을 죽였다. 안우는 이미 처형되었는바 누구든지 김득배와 이방실을 체포하면 급수를 세 계단 올려 등용할 것이다.”라고 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어사 중승(御史中丞) 정지상(鄭之祥), 만호 박춘(朴椿), 김유(金庾) 등을 갈라 보내 체포하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은 행재소로 가는 도중에 용궁현(龍宮縣)에 도착하였다. 왕은 이방실의 외삼촌 우산기(右散騎) 신순(辛珣)과 안렴(按廉) 성원규(成元揆)에게 명령하여 가서 맞아 오게 하였었다. 그런데 박춘이 가서 왕의 명령이라 하니 이방실은 뜰에 내려 와 꿇어 앉았다. 이때 오인택이 검을 빼어 내리 치니 이방실은 곧 기절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소생하여 담을 뛰어 넘어 달아 났다. 박춘이 따라 가 잡으니 이방실이 박춘의 검을 빼앗으려 할 때에 정지상 등이 뒤따라 쳐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에서 이 사변을 듣고 부하 몇 사람을 데리고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있는 선대의 묘지 곁에 가서 숨어 있었다. 그 아우 김득제(金得齊)를 화산(花山)으로 귀양보내고 김득배의 처자를 가두어 문초하였다. 그 사위 직강(直講) 조운흘(趙云仡)이 장모에게 말하기를 “바른대로 말하면 고통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모는 오랫동안 숨겨 오다가 마침내 자백하였다. 김유, 박춘, 정지상, 성원규 등을 체포하여 죽이고 상주(尙州)에서 그의 목을 내걸었다. 나이 51세였다. 보는 사람은 모두 개탄하며 애도하였다. 김득배의 제자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수습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말하기를 “아, 황천이여!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 아! 황천이여, 그가 어떠한 사람이던가! 듣건대 선(善)한 자에게는 복을 주고 악(惡)한 자에게는 화를 주는 것이 하늘의 이치요, 착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벌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리고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한 운수는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정한 운수가 사람을 지배한다란 과연 무슨 이치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 라는 것은 또한 무슨 이치인가? 지난날에 홍적이 난폭하게 침범해 들어 오니 왕은 피난하고 국가의 운명이 실낱 같이 위태하였을 때 당신이 솔선하여 정의를 창도하니 온 나라가 이에 호응하였으며 당신의 몸은 비록 만번 죽어도 기어이 적을 쳐부시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수행하여 삼한(三韓)의 왕업을 회복하였다. 오늘의 모든 사람이 여기에서 먹고 여기에서 잠 잘 수 있는 것이 이 누구의 공로인가? 비록 죄가 있어도 공으로써 덮어 주어야 옳을 것이며 죄가 공보다 중하여도 반드시 그 죄를 자복시킨 후에 처형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전쟁에서 흘린 땀이 아직 마르지 않고 승리의 노랫소리가 아직 그치기도 전에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칼 끝에 피로화하게 하였는가?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써 온 세상에 호소하는 바이다. 또 나는 장렬한 충신의 혼령이 반드시 영원히 지하에서 소리 없이 울 것을 짐작하는 바이다. 아! 운명이다. 어찌 하리오. 어찌 하리오.”라고 하였다. 이방실의 아들 이중문(二中文)과 안우의 아들은 나이 10세 남짓하였다. 그들이 거리에서 놀면 누구나 앞을 다투어 물품을 주며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이 편안히 먹고 잠잘 수 있는 것은 세 원수의 공이다.”라고 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고종(高宗, 1852~1919) 년간 간행된 송환기(宋煥箕, 1728~1807)의『성담집(性潭集)』30권에 탐진안씨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 미상∼1362) 장군에 대한 글
오성군안공전(鰲城君安公傳) a_245_173c
高麗中書平章事安公祐。小字祓都。耽津人。以推忠定亂功封鰲城君。盖當恭愍朝紅巾之亂。乘輿播遷于嶺陬。京城淪沒爲賊窟。公爲都元帥。與副元帥金 得培,李芳實擊賊屢捷。竟得收復舊都。勳業甚大。及其奏捷於福州行在而未達。乃爲奸臣金鏞所惎。酷被槌殺於門外。李芳實,金得培次第就捕而受禍極慘。人皆穪三寃而傷悼不已。直翰林鄭圃隱夢周請王收屍。爲文以祭曰。嗚呼皇天。我罪伊何。嗚呼皇天。此何人哉。盖聞福善禍淫者天也。賞善罰惡者人也。天人雖殊。其理則一。古人有言曰天定勝人。人衆勝天。天定勝人。果何理也。人衆勝天。亦何理也。往者紅冦闌入。乘輿播越。國家之命。危如懸綫。惟公首倡大義。遠近響應。身出萬死之計。克復三韓之業。凡今之 人。食於斯寢於斯。伊誰之功歟。雖有其罪。以功掩之可也。罪重於功。必使歸服其罪。然後誅之可也。奈何汗馬未乾。凱歌未罷。遂使泰山之功。轉爲鋒刃之血歟。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吾知其忠魂壯魄。千秋萬歲。必飮泣於九泉之下。嗚呼命也。如之何如之何。公之子與李芳實子中文甫十許歲。共遊市街。人爭以物餽之曰今我輩獲安寢食。三元帥之功也。至有垂涕者。我太祖命立崇義殿於麻田郡。以祭麗太祖。而卜智謙以下諸名臣列次配享。公與金得培,李芳實皆與焉。豈不偉哉。公之遺蹟。雖眇綿無以 作昞。而若其立朝事業。昭載彤史者。奚特此也。大節如此。餘皆可推而知矣。觀其後承之趾美者多。則亦有以徵其垂裕甚盛也夫。公有一男顯兵判。玄孫三人。長起號平村。次止號皋隱。季逸號嘯臯也。平村行義夙著。累被除命。歷典州縣。茂績異凡。參佐翼原從功。詞章贍敏。扈駕時有應製詩載於東文選。世多傳誦。皋隱文章德學。與平村,嘯臯難爲弟兄。早闡大科。以提學承上命。與鄭麟趾諸公。述龍飛御天歌。前後奉敎撰者頗多。敭歷淸顯。典文衡掌兩銓。陞秩輔國。恩寵甚隆。卒謚文靖公。嘯臯卽當世隱 遯之士。而淸操高標。甚爲識者所愛重。後人之誦慕久而不已。至若平村之玄孫勿齋義以李一齋恒門人。有篤行明識。當壬辰亂。奮不顧身。馳檄倡義。往奉聖祖御容于井邑之深山中。經歲守護。及以朝命移奉於行在。乃間關自致。而䟽陳中興六策。優被睿奬。授六品職。其忠義之卓。尤豈非有光于先烈歟。謹按鰲城君卓絶之功。實我東士民雖至異代而終不可諼者也。當時恭愍所謂割肌膚尙不能報者也。豈不信矣乎。本朝梁文襄公誠之奏請立武成王廟。依文廟制度。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 德。高麗之庾黔弼等十四人配享。而公乃在其中。於戱盛矣。凡在後裔。何憂其始終徽蹟。久而湮晦也。公之十六世孫處命編成家乘。而德業之隆。肇自公矣。覽斯者其孰不興感於百世之下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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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발도"우리가 일제때 일어를 섞어서 쓰릇이 고려가 원에 복속했던 당시을 추론해봅니다.
안우 장군이 어려서(?) 이름을 '바토르'라는 몽골식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원나라 사람이라고 단정하긴 이른 듯 합니다. 고려사에서 안우 장군을 오성군(鰲城君)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강진(康津)의 옛 별호(別號)인 도강(道康) / 탐진(耽津) / 금릉(金陵) / 오산(鰲山) / 양무(陽武) 중에서 오산(鰲山) = 오성(鰲城)이므로 강진(탐진)안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달충의 행장을 보면 부인 충주안씨는 안우의 딸이라는 기록으로 충주안씨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태원안씨 안만세의 아들로 올려져 있어 태원안씨라고도 하는데, 충주(忠州)의 옛 별호가 국원(國原) / 대원(大原) / 예성(蘂城) / 충원(忠原) / 창화(昌化)입니다. 그 중에 대원(大原) = 태원(太原)으로 쓸수도 있으므로, 충주안씨와 태원안씨는 같은 지역을 연고로 했거나, 동본인데 이본으로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