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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눈앞에 두고
증 언 자 : 한정만(남)
생년월일 : 1961. 3. 4 (당시 나이 19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중소기업 근무)
조사일시 : 1989. 1
횃불행진에 참여하고
나는 1961년 3월 4일생으로 1950년 한국전쟁 때 함경남도 북청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 한서욱과 어머니 김영봉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북청이며 어머니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으로서, 아버지께선 일제 때 북청농고를 졸업했고 어머니께선 만주 용정의 도립병원에서 간호원을 하셨다. 그 때의 재산 정도는 약간의 논밭과 과수원을 소유한 중농 이상이었다고 하며, 어머니의 친정 역시 만주 팔가지에서 제재소를 경영해 중산층 정도의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학교 4학년 때 운수업을 그만두고 집안의 재산을 '몽땅' 투자해서 샀던 채석장의 운영이 어렵게 되던 때부터 기울기 시작한 가세는 아버지께서 고혈압으로 돌아가시던 1978년 후반기까지 계속되었으며, 73∼74년경부터 식생활 해결을 위해 어머니께서 시장통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하셨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후학기 때 광주로 전학오게 된 것을 교육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부양하기가 어려워 전남의대를 갓 졸업하고 신혼생활을 하시던 장형께 의탁하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교직발령과 장형의 제대로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한 때부터 어머니께선 포장마차를 그만두었고, 나는 대학진학에 실패한 후 재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장형이 조대의대 방사선과 과장을 맡게 되면서 식구가 모여살게 되었다.
대학에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되고, 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던 차에 1980년 5월이 왔다.
학내시위의 이슈가 자율화에서 민주화의 요구로 발진하고, 교련교육 반대 시위도 잠잠해질 무렵 인문대 1학년의 입영훈련과 5월 중순의 민족민주화 대성회 기간이 겹치게 되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중 학생회관 2층 강당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박관현 선배와 얘기를 나누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교련반대 이슈는 건들이면 줄어드는 해삼같이 민주화의 커다란 물결 속의 한 부분이 되고 있었던 까닭에 입영을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지어졌지만, 결국 같은 반 동료 두 명과 함께 나는 입영을 거부하고 '민주화 대성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쏟아붓는 듯한 빗줄기 속에서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교수님들과의 시가행진(5.14), 수천, 수만 개의 횃불 속에서 제오열의 침입을 막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광주 시가지를 다녔던 횃불행진(5.16). 당시 치안부재라는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질서유지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그때 우리들은 3천-4천 명 정도로 3등분되어 광주시내 전역을 밝히는 횃불행진을 했다.
내가 속했던 조는 노동청을 경유하여 동명동, 산수동, 산장 입구, 계림동, 문화방송 앞을 지나 다시 도청으로 왔었다. 학생증 등 증명을 확인하고 나누어 준 횃불을 든 동료들이 바깥쪽에 섰고, 안쪽에는 여학생들이 서서 몇 안 되는 소위 데모가(투사의 노래, 흔들리지 않게, 아침이슬 등)를 부르며 유신잔당을 배척하는 내용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었다.
민주화 성회 기간 동안 학생회관 2층 강당에서는 철야농성이 계속되었다. 5월 16일 자정쯤 되었을까, 농성장소를 빠져나와 인문대 뒤 반룡부락에서 선배들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공수부대원이 차를 타고 학교를 통과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21일 오후 2시경 사격이 가해졌다
민주화 성회가 끝나고 귀가하면서도 설마 했던 계엄령이 TV에서 미스코리아선발대회가 끝날 때쯤 확대 발표되었다. 계엄령이 확대되면 18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지만 오랜만에 완도에서 올라온 누나와 얘기를 하다가 깜박 잊어버렸다. 뒤늦게 오후 2-3시경 시내로 나왔다. 금남로 주변을 경비하던 경찰은 어제의 경찰이 아닌 것 같았다. 충장로로 진입하는 곳을 몇 겹으로 차단하는 경찰의 모습은 사뭇 위협적이었다. 1980년 4월부터 격화되었던 시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모르게 경찰의 호위를 받았던 것이다. 가령 5월 14일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시위 때는 경찰이 오토바이로 호위하여 주었고, 5월 16일 횃불대행진 때도 마찬가지였다.
충장로 주위를 맴돌던 나는 오후 4시경부터는 주로 공수부대원들과 쫓고 쫓기는 실랑이를 벌였고, 다음 시위장소는 입에서 입을 통해 계속 전달되었다. "광주는 19시부터 통금이 시작된단다", "20시부터 통금이 시작된단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잘 곳을 찾기에 바빴다.
19일 아침 공수부대원의 만행에 두려움을 느끼고 광주를 벗어나려고도 생각했지만, 일말의 책임감으로 광주에 남기로 했다. 이때 울산에 계신 어머니께 가려고 들고 나온 가방은 적십자사 전남지사에 두고 "공수부대가 여학생의 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내고 팬티만 입힌 채 도청 앞에 눕혀놓았다"는 등의 소문을 들으면서 시가지로 향했다. 그러나 시위는 소강상태였고 하늘에 헬기만 떠 있었다. 그러다가 오후부터 간간이 시위가 전개되었고 16시경에 대인시장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대치중인 시위대와 합류하여 시위를 하다가 19시경에 대인시장 부근에 있는 고등학교 후배 집으로 갔다.
20일 아침 비가 조금씩 내렸다. 후배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옆골목으로 해서 충장로로 들어섰지만 총을 휴대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오전에는 아무런 충돌도 없었지만 오후에 접어들어서는 공수부대원들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집결장소를 찾아다니면서 시위를 했다. 그날 밤은 18일 머리가 깨진 채 잡혀갔던 고등학교 친구(5월 18일 악착같이 쫓아온 공수대원 두 명에 의해서 두들겨맞고 잡혀갔었다) 집에서 (병무청 부근, 현 양영학원 건너편) 밤새 계속되는 함성을 들으며잤다.
21일 오전에는 머리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학동에 있는 손00 외과에 입원한 친구를 따라 그곳에 있었다. 치료가 끝나자 다시 친구집에 들어와 도청 부근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시동이 걸린 채 불이 붙여진 소형 자동차들이 노동청과 도청의 중간쯤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불타고 있었다. 그때쯤 친구는 화순에서 올라오신 부친을 따라 시골로 내려갔지만 나는 만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노동청 앞 사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계속 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경 사격이 가해졌다. 느닷없이 가해진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몇몇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을 구조하러 큰길로 나선 사람들까지 쓰러졌다. 처음에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나 나중에는 조준사격을 하는 모양이었다. 엄청난 살상행위를 목격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었다.
오후 4-5시경 버스가 전남대병원 쪽에서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운전미숙으로 인하여 정지해 버리자 공수대원들이 쫓아와 곤봉으로 구타하고 10여 명을 끌고갔다. 그런 사실을 목격한 채 그날 저녁을 학동에 있는 친구집에서 잤다. 그날밤에 잘 때는 산수동 쪽에서 지난밤 공수대원이 가택수색을 하여 젊은 사람은 무조건 잡아가고 말리는 어른들도 신체부위를 가리지 않고 때렸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쇠파이프를 머리맡에 두고 다락 한구석을 치우고 잤다.
출정가를 드높이 부르고
22일 아침 조선대 운동장을 거쳐 도청으로 향했다. 전날 계엄군이 철수할 때 난사한 총에 맞았는지 시체들이 길가에 뒹굴었다. 도청에 도착한 나는 수습위원회의 내부 움직임도 모른 채 총기와 탄환을 회수하라는 부탁을 받고 당시 시민군에 의해 접수된 지프차를 타고(당시 시민군에 접수된 차량은 기름 통제를 위해 차량번호가 씌어있었고 등록된 차량만이 운행할 수 있었다. 도청 정문에서 실시한 차량등록시 학생증을 보이고 탑승할 수 있었다) 백운동, 학동, 농성동 등을 돌아다녔다. 이때 운전은 석산고 앞에서 사는 운전기사가 했는데, 10여 정의 총과 만여 발의 실탄을 시민들로부터 인수받아 수습위원회에 인계하였다. 오후에는 지프차에서 내려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적십자병원의 영안실을 다녀보았다.
그때에 내 눈으로 확인한 시체만도 1백여 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지만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골목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차량시위를 벌이던 시민, 학생들에게 나눠주시던 아주머니들과 강도 한건 없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고맙고 기뻤다.
며칠 동안 집에 연락하지도 못했던 나는 24일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걱정으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었던 터라 모두 반가워하셨다. 그날밤 형님의 권유로 조선대병원의 형님 방에 있었지만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유서를 써놓고 형님 방을 나왔다. 그리하여 25일부터 학생수습위원회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카빈 소총을 들고 도청 정문과 민원봉사실 사이의 경계근무를 섰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해 얘기도 나누며 26일 밤을 맞이하였다. 전날 계엄군이 진주한다는 소리에 밤잠을 설쳤지만 그날은 정말로 계엄군이 진주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도청에 있다가 YWCA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는데, 입영을 가지 않았던 3명 이외에 입영훈련을 끝내고 퇴소한 동기들 몇명이 합류해 있었다.
우리는 27일 새벽 도청 앞 광장을 대열지어 지나가며 '출정가'를 드높이 불렀다. "노래 부르세. 즐거운 노래. 이른 아침 안개를 뚫고. 내일은 멀리 멀리 떠나갈 이 밤을 노래 부르세. 사랑하는 조국. 내일은 멀리 산으로 산으로. 이른 아침에 먼산을 보내 낯익은 푸른 손수건." 우리들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YWCA에 들어서자 몇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2, 3층으로 나뉘어져 배치되었다. 도청 쪽에서의 총성을 들으며 잠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우리에게도 총격이 가해졌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방아쇠 한번 당기지 못했다.
사람을 향해 차마 총을 쏠 수가 없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가셨다. 죽을 각오를 단단히 한 채 시간만 보내다가 총에 맞은 여자의 비명소리에 10여 명이 항복하고 말았다. 1층 로비에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처박은 우리는 손목을 뒤로 묶인 채 공포로 쏘아대는 M16 화약 냄새에 더욱 가슴을 졸였다. 조금 전 전투중에는 죽음의 실체를 잊고 있었는데 M16 공포와 화약 냄새에 금방 죽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붙잡힌 우리들은 초화당제과점 옆 골목에서 굴비처럼 엮어져 '일어서, 누워'를 반복하면서 얻어터졌고 소지품 중에서 이상한 것(칫솔, 비누 등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날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다)이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욱 많이 얻어터졌다. 나 역시 군복바지 속에서 칫솔이 나온 까닭에 안경을 쓴 채 맞아서 안경은 깨져버렸다. 주변상황을 정확히 볼 수 없었으나 도청 앞으로 끌려가며 외신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수많은 트럭과 탱크도 보였다.
영창안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군용 버스에 실린 우리는 상무대로 이송되었다. 손목의 포승줄은 풀렸으나 헌병대 앞 연병장에 끌려나가 엎드린 채 움직일 수 없었고 옆사람이 누군지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엎드려 있다가 어딘가로 이송될 때 많은 사람들이 긴장 때문에 보지 못했던 소변을 '담벼락'에 누다가 개처럼 두들겨맞았다.
여러 차례의 통과절차를 거쳐 들어간 감방에서는 '군기를 잡는다'고 날뛰는 헌병에게 맞기 일쑤였다. 그때에 한 사람씩 호명당하면 본적지, 주소지, 성명, 나이, 직업 등을 차례로 말해야 했는데 순서가 틀리기라도 하면 철창에 거꾸로 매달리는 등 기합과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도 혼자서 가다가 들키면 얻어터지곤 했다.
저녁에 밥이 나왔다. 하루 종일 굶었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는 취침시간도 없이 앉은 채로 잠들었는데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 잠을 깼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문 쪽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영철씨가 자살하려고 이마를 마루에 찧었다는 것이다.
상무대에서의 생활은 화장지가 지급되지 않아 영창 안에 있던 성경을 한 페이지씩 뜯어서 사용하여야 했고, 항상 부족한 밥 때문에 식사 때만 되면 마주 앉은 사람과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식반 하나로 둘이 사용했기 때문인데 마음에 맞는 사람과 마주 앉으면 서로 양보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괜히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우성인 사람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6월 초 훈방자들이 나간 후에는 하루 하나씩 지급되던 빵도 지급되지 않아 배고픔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배고픔에 시달리고 형무반장이라는 헌병중사에게 시달리면서 생활하는 영창 안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형무반장이라는 사람은 화가 나면 군화발로 영창에 들어와 무조건 걷어차고 두들겨팼다. 헌병 근무자들의 하루 일과는 우리들을 영창 철창에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기합 등으로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송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개 돈 있는 사람들(80년 5월 3일 조선대사태 때의 체육대 폭력 교수들과 그 아류)과 명망있는 인사들이었다.
7월 중순경부터 지저분한 영창안의 환경 때문에 피부병이 돌았다. 결국에는 나에게도 옮아 배꼽 주변과 손가락 사이에서부터 시작되어 8월 중순이 되었을 때는 온몸으로 번졌다. 그리고 그 부분이 감염되어 고름이 찬 정도가 심해 그때까지 생활하던 5소대를 떠나 7소대로 격리되었다가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 갔다. 상무대의 영창은 반원형으로 가운데에 근무자 자리를 중심으로 6등분 되어 있는데 근무자 두 명이 근무자석에 앉게되면 영창이 한눈에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되어있다. 앞면에는 철창 한쪽에 철문이 있고, 철문 쪽으로 약 50센티미터정도 시멘트 바닥과 마루는 약 3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되어 있고, 철창과 마루 사이에 1.5미터 정도로 시멘트 바닥이 있다. 그리고 뒷쪽 벽고 철창살로 된 창이 조그맣게 있으며, 역시 그쪽에 사물함이 있었다. 평상시에 잔다면 30명 정도가 적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우리가 처음 잡혀갔을 때는 한 감방에 보통 1백여 명 정도의 인원이 수용되었다. 그리고 3소대에는 주로 방위 탈영병 등 군인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들의 식사를 날라다가 배급해 주었다.
통합병원에서의 생활은 헌병대 영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것이 었다. 어느 정도 확보된 공간 속에서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고 배고픔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으며 책이나 바둑, 장기 등을 오랜만에 둘 수 있었다.
또, 당시 나는 통합병원 505병동에 있었는데 환자들은 모두 개인침대를 가졌고 문을 지키는 근무자들(위생병)과 간호장교들을 통해 집으로 연락도 가능했다. 또한 먼 발치에서나마 면회온 가족들을 보면서 손이라도 흔들어줄 수 있었다. 나는 치료가 보름 만에 끝났지만 9월 중순경부터 사이비 환자로 계속 입원해 있었다. 위생병들이 군의관들을 속이고 있었거나, 장형께서 군의관들에게 연락해 놓았기 때문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약 두 달 만에 돌아간 상무대 영창에는 전에 붙잡힌 우리 동료들 외에도 삼청교육이라고 하여 끌려 들어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10월 말경 재판을 받으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1심에서 소요 및 계엄법 위반으로 장기 1년 단기 1년의 형을 받고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어 갔다.
교도소에서의 대우도 상무대 영창과 거의 비슷하였다. 교도소로 이송되면 조금은 자유스러울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되지 않자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전동료들이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형집행면제로 교도소에서 이틀 밤을 보낸 후, 정든 선배들을 뒤로 한 채 눈물을 흘리며 교도소를 나와 상무대 안에 위치한 교회에서 "상무대 영창에 있으면서 겪었던 일 등은 사회에 나가서 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출소했다.
상무대 영창생활 중 가장 괴로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수사받을 때이다. 함께 활동한 사람들 이름을 말하라고 협박했지만 얼굴은 알아도 이름은 모르는 까닭에 수도 없이 맞았다. 가령 도청에 만들어져 있던 화염병을 봤느냐고 묻고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구둣발로 무릎 정강이를 걷어차고 '예'하면 만든 사람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5월 중순 민주화 성회 때 분수대에 올라가 있는 채병진 씨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는데 다시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본 적도 없다"고 대답하니 계속해서 구타하였다. 채병진씨를 어떤 사건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 인간적인 치욕감을 주기 위해 시민군 남녀 사이에 불륜관계가 있었다면서 "도청 숙직실 등에서 여자 팬티가 수없이 나왔는데 너는 몇 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느냐?"는 질문을 하는 수사관도 있었다.
10월 30일 출소한 나는 가족, 친지들과 재회하고, 11월 중순경엔 어머니께서 생활하시던 울산으로 갔다. 그리고 1981년 3월에 전두환이 대통령 취임하면서 행한 조치로 복권이 되었고, 그해 여름에는 마냥 놀기가 따분해 현대조선소에서 막 일도 하였다.
노동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하루 일하고 나면 한 3일을 쉬어야 할 정도로 고된 것이었지만 할 만했다.
1982년 봄에 복학하여 1986년 2월 전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주로 사학과 학회를 중심으로 일을 했는데, 어떠한 평가가 내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졸업 후에 장형의 병원에서 2년여 동안 사무장으로 일을 돕다가 교직에 뜻을 두고 알아본 결과 남평 광남고등학교에 국사교사로 가게 되었다. 그때 조건은 신원에 이상이 없을 것, 시간강사 일년 경과 후 정식교사 발령 등이었으나 신원 조회 결과 5·18 관련자로 밝혀져 교사생활 4일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현재는 1988년 10월 말부터 형의 소개로 하남공단에 소재한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다.(조사.정리 박종신) [5.18연구소]
첫댓글 습도 많은 짜증스런 날이네요.
사랑과 행복이 함께 하는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