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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탑의 원조는 파사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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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과 수로왕 남릉 정문에 새겨진 쌍어문
불교의 본 고장인 인도의 탑파 모양은 사실 우리나라의 탑파 모양과는 다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는 그 원형의 조형(祖形)을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도 밝혀진게 아직 까지는
없습니다.
실재적으로 국내의 최고(最古)의 석탑은 "파사석탑"이었는데도 불교계의 공인을 받지 못하여 한낟 돌덩이로
굴러다니다가 천신 만고 끝에 구원을 받은 셈입니다. 이제 그 정체를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독자님들께서는
알고있는 사실들 이지만 필요한 독자님들을 위해서 요약하여 탑에대한 예비
상식을 올려보겠습니다. 탑(塔)의 층수는- 탑신부의 옥개와 탑신을 합친
부분의 수로 판단합니다.
탑(塔)의 어원(語源)
* 어원은 범어 Stuppa 와, 파리어(巴梨語) Thupa에서 유래하며,
스리랑카에서는 다가바, 다고바라 부르고,
미안마 에서는 Pagoda라 부릅니다.
* Stuppa 탑(塔) (1) 탑파(塔婆),
솔도파(率覩婆), 수두파(藪斗婆), 도파(都婆), 소유파(蘇愉婆), 유파 부도
(浮屠) 대취(大聚), 총(塚), 방분(方墳), 고현(高顯),
분릉(墳陵)
* 부처님이나 기타 덕이 높은 스님의 신골인 사리(舍利)를 넣은 불교식 무덤입니
다.
Caitya 지제(支堤), 제저(制底), 제환리(制桓里), 제부도(帝浮圖) - 취상(聚相), 적집(積集), 복취(福聚),
영묘(靈廟),
방분(方墳), 정처(淨處), 생정신처(生淨信處), 가공양처-보석이나 돌로 높이 쌓은 것
*<마하승지율> '사리가
없는 것'
- 부처님의 자취가 있는 곳에 건립
사리신앙의 성행에 따라 탑의 수요가 급증해 지자 엄격한 의미로서의 본탑 즉, 부처님의 신골을 넣을 수
있는 탑을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사리의 유무에 따라 구태여 탑과 지제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된다.
이에 후대에는 탑과 지제를 함께 쓰며, 무덤과 기념물적인 성격을 가진 숭배대상으로 알려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탑을 세우기 시작한 이유는 석가모니께서 인도 Kusinagara 사라쌍수 밑에서 열반하였을 때,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당시 사회의 장례 풍습에 따라 석가모니의 시신을 다비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이 무렵 인도의 여덟 나라가 부처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는데, 제자 도로나의 의견에 따라
불타의 사리를 똑같이 여덟 나라에 나누어주어 각기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
(舍利八分)이라 하여 불탑 건립의 기원을 이루며, 사리신앙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보는 견해가
정설입니다.
석가 입멸 이후 백년이 지나 인도를 통일하고,
인도제국을 성립시킨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은 불타의
사리를 봉안한 8대탑을 해체하여 이 사리들을 84,000으로 나누어 전국에 8만 4천이나 되는 사리탑을
세웠다고 중국의 불전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실재의 인도 탑형은 봉분형태로 상층부가 돔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탑파형태는 3층부터 13층까지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기본은 인도로 부터 시작 된것이 아닙니다.
이를 많은 사람들은 막연히 중국서부터 시작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측으로 봐서는 그 누구도 불교의 법칙을 어길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탑의 형태가 중도에서 변형된
것이라면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 중에 파사석탑이 묘도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경로를 추적하던 중 부도가 이곳으로부터 생산되기
시작 하였다는 <산해경>>의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묘도에는 파사석탑의 형상과 흡사한 심상치 않은 바위가 바다 한 가운데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일화를 기록하며 또 많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존경을 받으며 서 있는 이 바위의 현재의 이름은 보탑초
(寶塔礁)입니다.
존경의 대상이 된 연유는 이 바위가 한웅이 서거하셨을때 시신을 제단에 모시고 혼령의 승천의식을 거행
하던 장소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식을 <<규원사화>>는 조천(朝天)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명문을 제시하라는 주문은 사양합니다. 똑 떨어지는 명문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징세를 가늠하여 그러한
사실을 유추하도록 기록들이 은유화 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규원사화>< 단군기>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是卽神市氏. 蓬亭柳闕而居, 陶髮跨牛而治, 處無爲之事, 敷自然之化, 開創成業,
源流萬世. 及其暮年, 見功業已完, 民物樂生, 登太白山, 乃置天符三印於池邊石上檀木之下, 因化仙乘雲而朝天.
是以,
名其池曰朝天.]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지 무릇 궐천년이니, 그가 바로 신시씨이다.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궁궐에 거처하며 정성으로 사람을 교화하고,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다스리며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교화를 널리 펴고는 나라를 열어 처음으로 위업을 이루니 그 근본이
만세로 이어졌다.
그 말년에 이르러 공들인 위업이 이미 완성되고 백성과 사물들이 즐거이 사는 것을 보고는 태백산에 올라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印)을 못 가의 돌 위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때문에 그 못을 이름하여 '조천지(朝天池)'라 하는 것이다.
이 바위의 수심은 현재 약 9m가 되는데 본래의 그 주변의 수심이 4m이던것이 뒷날 바다물이 불어올라
현재의 수심이 그렇게 높아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당초에는 이 곳이 넓은 못(池)이었다고 보는것이고, 사진에 보이는 보탑초의 정면이 동쪽임으로,
하단부의 정방 기단위로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시신을 올려놓고 아침 해를 맞이하여 승천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름
이패파도(犁패把島)는 천제를 올리던 당시 이 바위의 기단위에 희생물을 바치는데 두살백이
얼룩황소를 올렸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제사용으로 사용되던 소를 기르던 목장이 등주와 연태 사이에 있는 현재의 대우자동차공장의 부지
였다는 육이(育犁)라는 곳입니다.
이 곳에 진시황의 동순궁(東巡宮)이 있었습니다. 봉평비에 기록되어 있다는 얼룩소 얘기도 우연이 아니
겠지요.
*犁...얼룩소 리, 패(牛+貝)두살백이 송아지 패
국조 환웅의 시신을 모셨던 성스러운 무덤은 부처님을 능가하는 장소로 보았던 것이겠지요.
한국의 사찰에는 왜 대웅전이 존재하는가? 부처님을 환웅의 환생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신선교의 삼재사상이 불교로 이입되고 불교로 신장개업을 하게 된것이 아닐까 추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였을때 현장의 보탑초는 탑의 원형이 될 충분한 조건을 갗추었다고 보는것입니다.
부도(浮屠)란 물에 떠있는 무덤을 뜻합니다.
경주의 앞바다에도 대왕암이라는 부도가 있습니다.
문무왕은 묘도의 보탑초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정황들이 여러곳에서 많이 보입니다.
특이하게도 한국과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탑파의 형식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지역에 널부러져 있는 피라미드형의 무덤형식도 어떻게 보면 원형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중국의 탑들은 벽돌을 올려쌓은 집의 형태로 되어 있지요.
혹시라도 인도에 있던 아유타국과는 옛날부터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고조선과 아유타국이 불교로서 그렇게 쉽게 친해질 수가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박제상이 저술
했다는 <<부도지>>는 그 해답을 보내 줍니다.
단군왕검과 요 임금이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왕검께서는 신하였던 유호(有戶)씨에게 지시
하여 환부(鰥夫)와 권사(權士) 백 여인을 이끌고 가서 요 임금을 설득케 하였으나 실패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뜻이 맞지않아 방황하던 이 들은 우(禹)임금때 이르러 월식(月息)의 땅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는 백인
종과 흑인종이 함께살고 있었습니다.
월식생성의 땅이란 인도를 말하고, 그 곳에는 당시부터 흑인종과 백인종이 섞여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단군왕검 시대) 이 들은 고기를 잡던 어부가 중심이 되었던 무리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바다를 통하여 아유타와
연결되어 있던 까닭에 부도(符都)- 소도(蘇塗)사상으로 인도의
원시 불교와 힌두교에 영양을 준 것으로 추정을 해 봅니다.
이러한 기록은 사학계에서 공인을 받지 못하는 입장에 있지만 고대의 사료가 극히 부족한 우리로서는
외면할 용기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부정하려면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위에 올려놓은 사진중에 보탑초라는 사진 밑에는 "백악산" "무엽산" "궁홀산" "금미달" "방장산" 이라는
이름이 올려져 있습니다.
<삼국유사> 나 기타 조선을 설명하는 고대 사서에서 눈이 시리도록 읽어 왔고, 또 그 이름을 해석하여
풀이 하고 있는것을 많이 보아오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많은 이름이 있었던 것은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사진과 대조하며 그 뜻을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탑의 형태는 하단부가 장방형(長方形)이고 상층부로 오르면서 삼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이 조금더 빠진다면 하단부의 방형은 좀더 들어날 것입니다.
더구나 조금더 상상의 나래를 보태면 이 돌탑을 받치고 있는 물안의 산모양까지 상상하면 수미산(須彌山)을
상상하게 되고, 물 밖에 보이는 모양만
보면 방장산(方丈山)을 생각하게 됩니다.
적어도 규석질의 단단한 흰색의 석질로 이루어 졌으니 백악(白岳)이요, 바위로만 이루어져
나무가 없으니
무엽산(無葉山)입니다.
또 궁홀산(弓忽山), 금미달(今彌達)등은 상층부의 모양이 활줄을 당기면 삼각형을 이룬다는 표현으로
이름이 붙쳐 졌던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하지만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수미산에 대한 모양의 설명이 불교의 <석가씨보 釋家氏譜>에 있습니다.
[염부제주(閻浮提洲)란 불교에서 말하는 사대주(四大洲)의 하나, 수미산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삼각형
으로 된 섬을 말함. 삼변이 비등하고 북쪽이 넓고, 남쪽은 좁은 것이 사람의 얼굴형과 같다.
정 남에는 대단한 평지가 있고, 동해중에 있으니 방장(方丈)이라고 한다.]
* 남쪽으로
대단한 평지가 있었다는 표현은 수몰되기 전의 얘기입이다. 바로 평양 벌판을 말합니다.(필자주)
또
<<불교대장경>> 제 74책에는 ' 이 염부주는 석가세존께서 6년간 고행하고 득성각도(得成覺道)'하였
다는 기록이 있고, ' 용수보살이 해중의 염부제에서 <대승경 (大乘經)>을 인도로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습
니다.
그 바위가 서 있는곳에는
아욕달지(阿褥達池)라는 못이 있다고 하였으니이 곳에 있는 보탑초와 모양도
비슷하고 또 조천지와도 흡사하다고
하였습니다.<장아함경>
<강희대옥편>에 아욕달지(阿褥達池)의 접두어인 아(阿)자를 설명하는 대목에 '큰 능 물가에 있는 연못을 뜻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阿'는 대능수안(大陵水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주변의 땅을 "아사달"(阿斯達)이라고 불렀다는 추정을 가능케하는 대목들입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駕洛國記 就乘岾.(望山島.京南島嶼也.乘岾,輦下國也.) 가야 김수로왕이 배필인 허황옥을 맞기 위해 신하를 보내는 장소가 망산도입니다. 그동안 허황옥의 도착지를 복원하기 위해 많은 이가 심혈을 기울여 김해일대를 조사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비전문가인 본인은 우연히 강화의 남단에 작은 섬인 현지명 황산도가 망산도가 아닐까 의문을 가져봤습 니다. 허황옥은 도착후 마니산을 향해 절을 올립니다. 허황옥이 탄 배가 바다의 서남쪽에서 나타나는 묘사입니다. 현재 지명 황산도에서 서남쪽이면 허황옥이 출발지로 추정하고 있는 인도나 중국 사천성 등에서 출발했다고 봤을때 무리가 없습니다. 출발지가 어디든 황산도의 서남쪽은 방향이
맞습니다. 수로왕은 경도를 정해 두고자 하였다. 거듭 가는 임시궁의 남쪽인 신답평을 희망했다.(신답평은 예부터 가로막아 놓은 밭이었는데 새로이 경작함이라, 답은
속문이다.)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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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무(建武) 24년 무신(戊申; 48)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말씀드렸다.
"대왕께서 강림(降臨)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신들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일진대,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 왕은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해서 경주(輕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 망산도望山島는 서울 남쪽의 섬이요, 승점乘岾은
경기京畿 안에 있는 나라다)으로 가게 했더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연(木蓮)으로 만든 키를 갖추고 계수
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해서,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
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 밖에 대종(待從)한 잉신(잉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데리고 온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인데,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계신 곳에
가까워 오니 왕은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잉신(잉臣)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
들을 안내하게 하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
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주고 군인들을 많이 내어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드니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한다. "저는 아유타국(阿踰타國)의
공주인데, 성(姓)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의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는,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를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의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에는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은 드디어 그와 혼인
해서 함께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라 이들에게 각각 살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나란히 수레를 탔으며, 중국
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했다. 그리고 날마다 물건을 풍부하게 주고,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어서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했다. 하략
[대만에서 나온 <변강민족사>라는 책을 보니까 후한때 허성 집단의 반란사건이 인용되어 있었다.
조금 더 읽어보니 허성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허성의 성은 성이 아니라 세습되는 직업 무사(巫師)를 부르는 명칭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중국인의 시각에서 씌어진 것이다. 중략....그리고 직업무사인 '허'는 그 사회의 존경받는 계층
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김수로왕비의 혼인길> 151쪽
김병모
이상의 정황 으로서 허황후의 정체는 적어도 그 일부가 제사장, 또는 사제직을 수행하던 지도 계급에 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민중 반란시 이 들은 주모자였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반란이 실패 하였을때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고 보는것이지요.
그렇다면 사전에 몸을 피할수 있는 후보지를 물색하여 두었을것이고, 그 후보지를 천후궁이 있었던 묘도로
보는것입니다. 당시의 묘도는 고구려가 서기 37년 대무신왕에 의해 한나라로 부터 수복되어 고구려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성역으로서 가장 피신하기가 용이한 장소였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직업상 서로 통하던 잘 알고 있던 곳이었다고 보는것입니다 적어도 상위층의 사제직은 황실과
연관이 되고 이때 김일제와의 해후가 이루어 졌을테고, 이들의 실질적인 배후이던 왕망이 망하자 권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던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하여 봅니다.
이들의 망명은 사전에 계획되어 많은 금,은 보물을 빼내어 묘도로 옮겨놓고 여차하면 한나라의 추격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상상하여 보는것입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다음과같은 문장을 놓고 많은 학자들께서 시체말로 머리에 쥐가 난다는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길래...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 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1, 김인배님은 아유타국의 위치를 산동반도 연안으로 주장하고 이유를 해류의 흐름을 제시 하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해류의 흐름을따라 한반도와 왕래하였는데 발해해협 항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
니다.
2,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란
대목에 대한 해석에서,
이 병도박사는 " 제가 바다에 떠서 멀리(선계의) 찐
대추를 구하고 하늘에 가서 (신선의) 복숭아를 얻어"
라고 하였으며,
3, 이 동환님은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
하늘을 옮아 아득히 반도를 쫓아"라고 하였습니다.
도무지 무슨뜻인지 알 수 없고, 허황후의 출자를 밝혔다기 보다는 모호하고 황당무계하게 만들고 말았
다고 하였습니다. 바다에 떠서 찐 대추를 구했다느니, 혹은 배를타고 하늘로 가서 복숭아를 얻는다느니,
상식으로 판단해도 어불성설이라고 하였습니다.
4 , 이에 대하여 재북학자 김석형은 증조와 반도를 과일이 아닌 지명으로 해석하고, "저는 바다를 건너 멀리
남해에서 찾기도 하였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5, 다시 김인배님은 증조와 반도는 과일이 될수 없고, 지명 이어야 한다는
김석형과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선의 과실따위가 될 수 없다는 부정론을 폈습니다.
과연 누구의 해설이 근사치에
다달았을까요. 필자는 이 대목의 해석을 두고 <<삼국유사>>의 가락국
기록은 허구가 아니라는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학자들 중에 단 한 사람 이라도 이 곳에 천후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당황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 곳이 하늘이요, 삼신산의 뿌리인 선계의 본당 이었으니까요. 이 곳에서 원양 항해에 필요한 비상
식량인 찐 대추와 여름철에 많이 나는 복숭아를 배에 실었겠지요. 찐 대추는 식량겸 복통의 통증을 진정
시키는 약효가 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 곳의 대추는 그 종류가 열가지 이상입니다. 씨알 또한 커서 한반도의 대추와는 상대가 안됩니다.
파사석탑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다음은 파사석탑을 탑재 하게된 내력입니다.
금관성의 파사석탑(婆娑石塔)
<삼국유사> 제 3권 탑상
[금관에 있는 호 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 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비 허
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48)에 서역 아유다 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항해하려 하는데, 수신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허 황후는 부왕과의 이별을 묘도의 천후궁에서 하였다는 추론이 성립되는 대목입니다.
기록 대로 라면 분명히 부왕이 있었고, 그 부왕은 민중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주도하였던 주동자 였기에
함부로 행동하기가 어려웠을 공산이 큽니다.
묘도가 천혜의 요새라는것은 한 무제가 총력을 다하여 공격 하였지만 일년이상을 견뎌낸 최상의 피난처
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이곳에서 원양항로로
나섰다가 심한 파도를 만나 다시 회항하여 부왕의 명령으로 석탑을 탑재하고
떠난것입니다.
이 석탑은 세가지의 뜻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안정이요, 둘째는 배의 균형을 유지하고, 셋째는 파도의 기(氣)를 누르는 역활입니다.
지상의 절터에서도 지기가 너무 센곳에 탑을 세워 센 기를 누른다고 하였습니다.
기왕에 돌 얘기가 나온김에 하나더 추가할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김해근방에 살고계시는 분들께서는
아실런지 모르지만 분성산 꼭대기에 해은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바다에 감사한다는 뜻이지요.
이 절의 별당에는 약 20cm정도 크기의 녹색 돌이 두개 있습니다.
이 돌이 영험하다하여 소원을 잘 들어준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돌입니다.
이 돌도 허항후가 도해 할때 배 멀미를 진정시키던 용도로 소지하고 왔던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은사는 2백년쯤 전에 성조암이 있던 자리에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절안에는 해마다 오월 단오날에 당산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으나 1976년 해은사를 개축하면서 사당이
너무 낡아 헐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당에는 수로와 허황후의 영정이 모셔저 있었으며, 영정앞에는 허황후의 전설이 깃든 망산도에서 가져
왔다는 봉돌(奉石)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돌을 지금의 자리로 옮긴것도 우여곡절을 겪은
뒤였습니다.
이 얘기의 출전은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을 쓴 이 하석님 입니다.
이어서 이와 유사한 설화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33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야계의 여인으로 알려진 신공황후는 허 황후와는 불과 6,70여년밖에 차이가 나지를 않습니다.
우연 일까요. 신라를 치기위해서 출전하였다가 임신한 배에서 통증이 극심하자 준비해 두었던 조약돌을
가져오게 하여 진통을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허황후에게 한수 배워두었던게 아니었던가 하는
호기심이 이는 대목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제 파사석탑을 만든 재료가 과연 묘도산 이라고 검정할 수 가 있는가 입니다.
<삼국유사> 에서 설명한 대로 유사한 색채와 석질을 가진 현장의 석재들을 위 사진을 통하여 제시 하였
습니다. <유사>의 기록입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어 있고,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벼슬 피를 찌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위에 제시한 사진중 상측에 올린 천후궁의 성벽으로 이용된 석재들은 색상이 다양한
것들의 전시장같아서
비교하시도록 하였고, 하측에 올려진 둥근 자연석은 근래에 국내에도 알려저서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그림돌로 인기가 있는 해석입니다.
결국 성벽에 있는 석재들이 작은 크기로 갈라져서 파도에 연마되면 그림돌과같이 둥글게 되고 그 중에서
아름다운 무늬가 색채로 나타나는것들을 선별하여 감상하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돌들을 <<산해경>> 에서는 유옥(遺玉) 또는 요벽(瑤碧)이라 불렀습니다.
[<<산해경>> 제17 대황북경 753 , 대황북경 537]
다음으로 묘도와 불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단순한 피난처 였던가 아니면 종교적으로도 관계가 있었던
가를 알아 볼 순서입니다.
얼마전 다향님과 산책님께서 허황후 문제를 놓고 토론하던중 <<산해경>>의 천독과 천축국에 대한 해설
을 놓고 대화하는중에 나온
얘기입니다.
茶香 2005-08-23 16:07:53)
산해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죠.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山海經》〈海內經〉
郭璞: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여기에 의미든, 발음이든 오해할 소지가 있을까요?
당시 석탑이나 불상 등은 원양 항해의 안녕을 빌기위한 일종의 정신적인 도구임과 동시에 배의 밑바닥에
실어 균형을 잡아주던 역활을 하던 용도였습니다.
그러한 용도로 돌을 탑재하고 다니던 사례는 해남과 제주를 소를 실고 왕래하던 선창에서 제주도 돌이
많이 발견되므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파사석탑 종류의 돌을 어디서 탑재 하였는가는 당시 원양 항해가 시작되는 산동반도의 등주 건너
편에 있던 장도에서 시작 되었으므로 왕망 당시 낙선군으로 지명을 불렀던 전한의 낙랑군 자리가 가장
유망한 후보지가 될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허왕후의 항해 로정이 소개됨으로서 추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감통 5-7 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사의 설화도 같은 장소에서 신선수업을 하던
중에 임신하여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역시 장산군도에 있던 진한땅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시대적으로 약 6,70여 년밖에 차이가 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낯서른 얘기들은 앞으로 상세하게 밝혀질 기회가 있을것으로 압니다.
[동해지내 북해지우 유국명왈 조선천독 그인수거 외경애지]. 필자가 심혈을 기우려 추적하고 있는 장소입
니다. 발해해협의 묘도군도가 동해지내가 되고, 지금은 모두가 바다로 변한 요동만의 북쪽 요서와 요동이
북해지우가 될 것이라고 이 사람은 믿고 있습니다. 약탈이 지극히 심하던 당시에도 서로 이웃을 사랑으로
친교하며 살아가던 조선 백성들은 하늘의 보살핌 속에 사는 천손족 이라는 뜻으로 천독(天毒)이라 불렀을
것이고,
또한 천축(天竺)이라는 이름 역시 인도 이전에 여기서 부터 시작 된것으로 짐작이 가는것은, 불교의 근원
지가 이곳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는 증후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더 자세한 설명은 졸저<<신시본토기>>의 136쪽 "삼신산과 수미산"이라는 제목을 참조 하시기 바랍
니다.
많은 사학자 들이 東海之內... 其人水居라는 뜻 풀이를 그 사람들은 동해안의 물 안(섬)에 산다고
해석
하지 않고, 자꾸만 물 가까운 내륙으로 해석하는데서 차질이 많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산해경>의 조선에 관한 본문입니다. 불교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보시겠습니다.
山 海 經 海
經 新 釋 卷 十 三 山 海 經 第 十 八 海 內 經
[東 海 之 內 , 北 海 之 隅 , 有 國 名 曰 朝 鮮 1 、 天 毒 ,
其 人 水居 2 , 偎 人 愛 之 3 。
1 郭 璞 云 : 「 朝 鮮 今 樂 浪 郡 也 。 」珂 案 : 朝 鮮 已 見 海 內 北
經 。
2 郭 璞 云 : 「 天 毒 即 天 竺 國 , 貴 道德 , 有 文 書 、 金 銀 、 錢 貨 , 浮 屠 出 此 國 中 也
。
晉 大 興 四年 , 天 竺 胡 王 獻 珍 寶 。 」 王 崇 慶 云 : 「 天 毒 疑 別 有 意 義, 郭 以 為 即 天 竺 國 ,
天 竺 在 西 域 , 漢 明 帝 遣 使 迎 佛 骨 之地 , 此 未 知 是 非 也 。 」 珂 案 : 天 竺 即 今 印 度 ,
在 我 國 西南 , 此 天 毒 則 在 東 北 , 方 位 迥 異 , 故 王 氏 乃 有 此 疑 。 或者 中 有 脫 文 訛 字 ,
未 可 知 也 。
3 郭 璞 云
: 「 偎 亦 愛 也 , 音 隱 隈 反。 」 王 念 孫 云 : 「 宗 炳 明 佛 論( 弘 明 集 卷 二
— — 珂 ) 引 作 『 偎 人 而愛 人 』 , 又 引 注 文 : 『 古 謂 天 毒 即 天 竺 , 浮 屠 所 興 。 』」
郝 懿 行 云 : 「 愛 之 , 藏 經 本 作 愛 人 , 是 也 。 列 子 ( 黃帝 篇 ) 云 : 『 列 姑 射 山 ,
有 神 人 , 不 偎 不 愛 , 仙 聖 為 之臣 。 』 義 正 與 此 合 。 袁 宏 漢 紀 云 : 『 浮 屠 , 佛 也 ;
天 竺 國 有 佛 道 , 其 教 以 修 善 慈 心 為 主 , 不殺 生 。 』 亦 此 義 也 , 玉 篇 云 : 『 偎 ,
愛 也 。 』 本 此 。 又云 : 『 北 海 之 隈 , 有 國 曰 偎 人 。 』 以 『 偎 人 』 為 國 名 ,義 與 此
異 。 」 珂 案 : 宋 本 、 吳 寬 抄 本 正 作 偎 人 愛 人 。
이 원문은 <<산해경>>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 저술된 책입니다.
주석자가 곽박(郭璞)인데, 해석의 편의를 위해서
1,2,3 절로 분류 하였군요.
1."조선금낙랑군야."이 부분은 해내북경의 조선편을 참조하라 하였군요. 참고로 해내북경의 많은
부분이
장도의 위치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해내북경의 614, 615, 616, 617, 621, 622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천독(天毒)은 천축국(天竺國)이다, 글과 문서가 있고, 금은과 화패가 있으며, 이 나라 안에서 부도(浮屠)
가 생산된다.
진(晉) 대흥4년(서기 321)천축국 호왕이 진귀한 보물을 헌상하였다.
*이하는 천추국의 위치가 중국의 서남쪽에 위치한 인도로 알려저 있는데 왜 이러한 기록이 등장 하였는지
자기들도 알 수 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3. 사람을 가까이 한다는것은 사랑한다는
뜻이고, 옛날에 천독이라고 하는것은 천축을 뜻하며, 부도가
생산된곳을 말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열자 탕문편에서 말하는 막고야산에는 선성을 위한 신인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부도란 불도를 말하는데 천축국에 불도가 있었고, 그 교의 본성은 자비심을 수행하기위한 수도이고,
생명들을 사랑하고 죽이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기록의 해설대로입니다. 무엇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유다국에서 발흥 하였던 불교의 주관자 들이 망명 하여 대를 이어가며 불교의 원거지였던 발해안의
고조선 장도로 돌아 온 것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어온 내력을 필자의 능력으로는 밝혀내기가 어렵습니다.
부도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을 <산해경>을 통해서 밝혀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것이 사실입니다.
부도는 바로 탑을 말
하는것이고, 그렇다면 허황후가 싣고 왔다고 하는 파사석탑은 묘도에서 출발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천축국의 호왕이 진나라의 원제에게 321년에 귀한 보물들을 헌상하였다는 기록은 불교를 유지하던
별도의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딸과 아들을 보물들과 함께 실어 동쪽의 가야땅으로 보내고 그 부모들은 계속 이 곳에 남아 포교활동을
지속하였다고 추정이 됩니다.
사진설명 위 현재 천후궁 (사문채 고성) 과 아래 천후궁(파사부) 내부 |
다음 글은 허 황후와 파사석탑의 출전에 대해서 그 단서를 찾아보기 위해서 분석을 시도한 내용입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있어온 것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진한인 들의 이동 경 로 를 추적하면서 새로운 사실
들을 발견하던 중 파사석탑 또한 연계된 것으로 추정되기에 그 내용을 독자님들께 보고 드립니다.
가능한 대로 다방면으로 연구하신 학자님들의 연구 자료도 소개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금관성의
파사석탑(婆娑石塔) <삼국유사> 제 3권 탑상
금관에 있는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 이 금관국으로 있을 때
세조 수로왕의비 허 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 24년 갑신(48)에 서역 아유다 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항해하려 하는데, 수신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 곳을 주포(主浦)
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 현 이라 하고, 붉은 기가 처음으로 해안
들어간 곳을 기 출 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이 황후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에는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는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象敎) 가 전해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 8대 질 지 왕 2년 임진(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 후사를 세워 (이것은 아도와
눌지왕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 까지 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어
있고,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벼슬 피를 찌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讚)해 말 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동안 왜국의 노경(怒鯨)을 막고자 함일세.
허 황후와 파사석탑에 대한 보고는 허박사의 글 외에도 많은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색적인 주장을 한것이 <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허 황후는
주산군도의 보타도를 통해서 왔을것이라는 김성호님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파사석탑의 석재를 본초강목에서 볼 수 있드시 호인(胡人)들이 해독용 약제로쓰는 광동성 광주
에서 산출되는 남해산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 배에는 관영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사잡물"(漢肆雜物)이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비류백제인들의 무역기지의 개설을 추진하던 중에 김해와 보타도에 있던 허황후를 중매하여
맺어준게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역시 또 하나의 가설입니다.
또 하나의 답사와 연구를 통한 기록은 김병모박사의 <김수로왕비의 혼인길> 이라는 저서입니다.
그는 이 글을 통해서 많은것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허황후의 집단이 인도를 떠나게 된 동기와 육로로 이동하여 사천성 보주에 정착하여 살다가 과도한 세금정
책에 반발하여 군중들을 선동하여 민중반란을 이르켰었고, 이 반란의 여파로 7000 여명이 검거되어 무창
까지 쫓겨났던 사례들 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모와 진한인들의 이동경로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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