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의 위기
엔론이 파산호보신청을 낸 날이 2001년 12월 1일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엔론사태는 기업회계와 경영의 투명성을 강화한 사베인-옥슬리법의 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금융사회)와 메인스트리트(일반사회)는 사베인-옥슬리법 개정을 가운데 놓고 격돌하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적어도 20세기 100년 동안 세계 금융발전소로 구실했던 월스트리트가 부활하는 런던과 새롭게 비상하는 홍콩에 기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舊 소련이 무너져 미국이 유일 강대국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이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금융시장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척도인 기업공개(IPO) 규모에서 월스트리트는 최근 들어 런던과 홍콩에 밀리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는 2000년까지 세계 IPO의 505 이상(공모금액 기준)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2001년 이후 그 위상은 눈에 띄게 추락했습니다. 2003년 30% 이하로 비중이 줄어든 반면 런던은 2부시장 격인 대안투자시장(AIM)까지 합할 경우 IPO 비중이 20%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국은행(BOC)과 공상은행(ICBC) 등 초대형 중국계 은행의 IPO를 담당한 바 있는 홍콩시장의 비중도 미국과 엇비슷합니다.
월스트리트의 위상 추락은 IPO 규모면에서만 확인되는 게 아닙니다. 뮤추얼펀드 등 간접투자수단이 매입한 주식 규모 면에서 월스트리트는 좋은 시절과 거리가 있습니다. 투자컨설팅회사인 옥세라에 따르면, 런던의 각종 펀드가 보유한 주식이 7조6,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반면, 뉴욕 펀드가 편입한 규모는 3조1,000억 달러 정도입니다.
미국인들도 더 높은 수익을 위해 월스트리트보다는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2005년 미국인이 보유한 해외주식은 무려 3조1,000억 달러에 이릅니다. 1995년 7,000억 달러와 견줘 4배 이상 늘어난 규모입니다. 이 추세는 향후에도 계속되리란 것이 중론입니다.
위기는 기존제도와 관행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집니다. 책임소재를 가리는 작업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행되기도 합니다. 현재 월스트리트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유력인사들은 ‘규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베인-옥슬리법 같은 규제 때문에 외국기업들이 월스트리트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월스트리트 이익단체 격인 ‘금융시장법규위원회’가 앞장서 규제 혁파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위원회는 최근 건의서를 발표했습니다. 사베인-옥슬리법을 비롯해 금융시장 각종 규제를 전면적으로 손질해 철폐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위원회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증권거래위원회(SEC)의 前 위원장인 하비 골드슈미트는 “경영자 부정을 억제하는 장치가 약화되는 대신 (경영자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게 된다”고 반박했습니다.
법규 개정을 주장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 내세우는 근거와 타당성은 모두 차고 넘칩니다. 글로벌 경쟁구조 속에서 월스트리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안팎의 기업경영자가 거북하게 생각하는 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게 법규개정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이고 근거입니다.
개정을 반대하는 쪽은 경영자의 각종 불법과 편법, 탈법행위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데 제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베인-옥슬리법을 개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주장만을 놓고 봤을 때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를 판단하기 힘듭니다. 이럴 때는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이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금융법규는 선제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불법과 편법행위로 사단이 벌어진 이후에 개혁조처로 만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설명입니다.
‘광란의(Roaring) 1920년대’가 대공황으로 막을 내린 이후 1933년과 1934년 증권법과, 이 시기에 함께 은행법(글래스-스티걸법)이 제정됐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당에서 만들어진 금융게임의 룰이었습니다.
그 법들은 사베인-옥슬리법과 마찬가지로 월스트리트 불법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법이었습니다. 공매도 제한과 각종 투자자보호조항이 마련됐습니다.
여수신전문은행과 증권인수를 구분해 은행의 건전성이 강화됐습니다. 게임의 룰을 관장하는 장치로 SEC가 설치됐습니다. 이들 법과 장치는 1970년대 말까지 월스트리트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동면하던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금융시장이 1950년대 후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해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월스트리트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유로마켓’ 시장이었습니다. 여기에다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오일머니 시장도 성장했습니다.
월스트리트는 1960년대 초부터 지금처럼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너무 엄격한 규제’ 탓에 금융주도권을 런던을 중심으로 한 유로마켓에 빼앗기게 생겼다는 논리로, 존 F. 케네디는 자본통제로 자본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무산됐습니다.
1970년대 후반 JP모건과 씨티은행의 본사는 뉴욕 맨해튼에 있었지만, 주 수익은 유로시장에서 거둬들였습니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과감하게 규제철폐를 단행했습니다.
1980년대 초 금융시장현대화법이 만들어지고, 은행을 규제했던 글래스-스티걸법 조항은 하나씩 개정되거나 폐지된 뒤에 결국 법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SEC의 권능과 이른바 ‘말발’도 약화됐습니다. ‘부도덕한’ 규제의 화신으로 공격받았고, 유능한 변호사와 회계사는 SEC 대신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나 로펌을 선호했습니다.
이 시대 미국 최고 가치는 ‘규제완화’ 또는 ‘규제철폐’였습니다.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형법이나 상법 등 전통적인 법으로 처벌하거나 시장의 힘에 맡겨 두면 자연스럽게 정화된다는 논리입니다.
법규가 약화되면 월스트리트에서는 어김없이 ‘광란의(Roaring) 시대’가 열린다고 합니다. 실제로 ‘광란의 1990년대’가 시작됐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광란의’라는 말이 붙는 시대는 현재까지 두 번이었습니다. 1920년대와 1990년대로, 한 번은 대공황으로, 다른 한 번은 9.11 테러와 엔론사태로 끝났습니다.
규제와 관련해 두 시대의 차이점을 든다면, 1930년대 제정된 개혁입법에 대한 개폐 움직임은 1950년대 중반까지 사실상 없었습니다.
1930년대 내내 월스트리트 거물들은 의회의 페코라 청문회 등에 출두해 자신의 잘못을 증언하기 바빴습니다. 게다가 2차 대전이 터졌기 때문에 그들이 규제완화 등을 입에 올릴 틈이 없었던 셈입니다. 전시경제는 본디 ‘규제경제’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베인-옥슬리법이 제정된 지 5년도 채 되지 않아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이 개정 움직임을 조직적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부 언론은 도적적인 잣대로 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이윤을 좇는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에게 윤리를 들먹이는 행위는 ‘톰슨가젤을 잡아먹기 위해 질주하는 치타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금융주도권 약화 등을 내세워 금융규제완화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쪽이 원하는 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윤동기 만큼 강력한 호소력과 추진력을 낳는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규제가 풀린 금융세계에서는 반드시 불법, 탈법, 편법 행위가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처럼 되풀이되는 게 자본주의 금융의 역사였습니다. 규제 폐지 끝에 광란의 시대가 오고, 다시 규제가 부활하고, 또 다시 폐지되고…
‘사회의 시스템이 좋은 쪽을 발전한다’는 가정을 인정하더라도 금융만큼은 예외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