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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2)—내성천 봉화(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① * [삼강 ←내성천 봉화]
2021년 11월 18일(목) [별도 답사]▶
내성천 봉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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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야면 '오록마을' ― ‘창마’
풍산김씨가 터를 잡은 '오동나무 숲'
봉화군 물야면 ‘오록마을’은 내성천 최상류에 있는 마을로 이곳서는 ‘창마’라고 한다. 내성천(乃城川) 본류는 백두대간 선달산(1,239m)과 옥석산(1,242m)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물야면-봉화읍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의 영주호에 흘러든다. 봉화읍에서 가까운 ‘닭실마을’은 봉화읍 위쪽으로 흘러드는 석천계곡(가계천) 위에 있고, ‘바래미’는 봉화읍을 지난 내성천의 서쪽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모두 봉화(읍)을 중심으로 형성된 내성천 최상류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오록리 ‘창마’는 봉화읍에서 북쪽의 산간지역으로 이어지는 915번 지방도로는 이 내성천을 따라 올라간 위치에 있다.
915번 지방도로가 물야면 오전리 물야저수지를 지나 동쪽으로 가다가 고개를 넘어가서, 88번 국도와 만나는 지점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이 있다. (88번 국도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에서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으로 넘어가는 도로이다. 백두대간 ‘우구치’를 넘는다. 일명 ‘도래기재’로 불리는 우구치는 남한강과 낙동강의 물길이 갈리는 분수령이다.)
‘오록마을’의 유래
상서로운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날아든다고 해서 ‘오록(梧麓)마을’이라 불리었으며 마을 곳곳에 오동나믈 심었다고 합니다. 1700년대에 구휼미 저장 창고가 만들어지면서 ‘창마’[倉村]로 불리었으며 풍산김씨 시조인 김문적(金文迪)의 18대손으로 풍수에 밝았던 노봉 김정이 봉화의 서벽들을 둘러보고 숙종22년(1696)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조그마한 이 마을 풍산김씨 문중에서 조선조 말까지 과거의 대과·소과에 70여명의 인물이 배출되었고 정조, 철종, 순조 때는 세 사람의 참판(參判)이 동시에 재직하여 예로부터 오록마을은 옥당(玉堂)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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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오미동 풍산김씨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의 명문
풍산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12세손으로 고려 고종(1214~1259) 때 벼슬이 판상사(判相事)에 오른 김문적(金文迪, 1205~?)이다. 그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서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으므로 관적을 풍산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김문적의 증손 김연성이 계림(경주)에서 풍산현 석릉촌에 처음 옮겨 살았다. 벼슬 따라 고려조 송도(개성)로 이주하여 대대로 살다가, 조선조 초에 송도사족을 한양으로 이주케 함에 따라, 8세 김자순(金子純, 1367~? )이 한양 장의동(서울 청운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손자 김휘손(金徽孫)과 증손자 허백당 김양진(金楊震)이 풍산에 내왕하다가 아주 내려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종택마을의 입향조는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 ,1467~1537)이며, 그의 증손 유연당 김대현에 이르러 풍산김씨 대종가를 이루고 죽암정사를 세워 가학에 힘썼다. 지금의 풍산김씨 종택은 ‘허백당종택’으로도 불리는데, 허백당의 아들 잠암(潛菴) 김의정(1495~1547, 문정공)이 을사사화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풍산 오묘동에 은거하였다. 그 후 문정공 김의정의 손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1553~1602)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오르고 그 중에도 오형제는 문과급제 하였음에 당시 인조께서는 ‘팔련오계’라 하고 동명을 ‘오미동(五美洞)’이라 이름을 내렸다.
‘팔련오계(八蓮五桂)’란 풍산김씨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蓮方]에 합격하고 그중 5형제가 문과[桂方]에 급제하자, 1627년(인조7) 인조임금이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하며 크게 칭찬하였다. 그리고, ‘김대현’에게 이조참판을 추증(追贈)하고 사제(賜祭)를 올린 뒤에 고향인 안동 오릉동을 오미동(五美洞)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이어서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고향마을 앞에 문(門)을 세우고 ‘봉황려(鳳凰閭)’라는 편액(扁額)을 걸게 하였다.
장남 김봉조(金奉祖)는 문과급제를 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차남 김영조(金榮祖)는 문과급제를 하고 사헌부 수장격인 대사헌을 다섯 번이나 거치고 이조참판을 지냈다. 김창조(金昌祖)는 사마시를 하고 의금부도사를 하였고, 김경조(金慶祖)도 사마시를 하고 현감을 지났으며, 김연조(金延祖)는 문과급제를 하고 승문원 정자를 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김응조(金應祖)는 문과급제를 하고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한성부 우윤을 지냈다. 김염조(金念祖)는 사마시를 하고 종친부 전첨을 하였고, 끝으로 김숭조(金崇祖)는 문과급제를 하고 승정원 주서를 지내고 35살에 죽었다.
풍산김씨 집안의 학문과 수학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문하
김영조(金榮祖)는 부친을 따라 영주에 내려와 살았던 어린 시절에 이웃에 사는 이황의 문인(門人) 장근(張謹)에게 글을 배웠으며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서 수학하여 마침내 그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형 김연조(金延祖)와 함께 어릴 때 유성룡 문하에서 수학했던 김응조(金應祖)는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에 실망하여 대과를 포기한 후에 퇴계 학문을 계승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연마에 힘썼다.
오미동은 하회와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김봉조(金奉祖) 형제들은 유성룡(柳成龍)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 같이 공부한 유성룡의 아들들과는 말년까지 교유하였다. 풍산김씨 후손들은 대를 이어 유성룡의 후손들과 지속적인 친분을 유지하며 학문적으로 교류한 것이다. 이는 유성룡의 아들 수암 유진(柳袗, 1582~1635)에게서 수학한 16세손 김시침(金時踟, 1600~1670)의 행적과 관련된 〈명옥대도(鳴玉坮圖)〉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김시침은 천등산 봉정사 동구에 있는 명옥대에서 소요하길 즐겼는데 이곳은 젊은 시절 봉정사에서 독서하고 강도(講道)하던 이황이 자연을 즐기던 곳이었다. 명옥대란 이름도 원래 이름인 낙수대(落水臺)를 이황이 새롭게 고친 것이다. 김시침은 명옥대 옆에 암자를 지어 이황을 추앙하고자 유성룡의 손자 유원지(柳元之, 1598~1678), 학봉 김성일의 증손자 김규(金ば), 자신의 외사촌 이이송(李爾松, 1598~1665) 등과 함께 예안·영천·예천·안동 등의 인근 읍의 사우들에게 역사(役事)의 보조를 청하는 통문(通文)을 보내 마침내 누각을 완성하였다.
이와 같이 허백당 문중의 인물들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안동의 서애 학맥을 이어받았으며, 지역적으로는 경상좌도에 살던 남인(南人)으로 분류된다. 남인들은 선조 연간(1568~1608) 조정의 요직에 두루 등용되었으며, 광해군 연간(1609~1662)에는 북인에게 밀렸다가 숙종 때 다시 득세하였다. 그러나 1694년을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여 경종 이후 조선 말까지 거의 조정에 등용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세전서화첩〉에 나타난 풍산김씨 집안 인물들의 이력에도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풍산김씨의 세거지인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도라는 지역성이 강조된 이 세전서화첩의 내용은 17세기 후반 이후 중앙의 정계에 활발하게 진출하지 못했던 이들의 정치적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봉화 ‘오록마을’
풍산 김씨 후손이 입향한 승지마을
김대현의 아들 8형제 중 백형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와 넷째 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여덟째 설송(雪松) (金崇祖) 등 세 분은 경북 안동 오미동(五美洞)에 세거하고, 둘째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셋째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여섯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등은 영주에 살았으나 그 후 후손이 경북 봉화 오록리(오록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다. 다섯째 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의 후손은 경북 예천 벌방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고, 일곱째 학음(鶴陰) 김염조(金念祖)는 재종숙 둔곡공의 계자가 되어 파주로 옮겨갔다.
봉화군 물야면 오록마을은 풍산김씨 동성마을이다. 서애 류성룡이 안동에 낙향한 후 가르친 풍산김씨 팔 형제 중 차남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 셋째 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여섯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의 후손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오록(梧麓)은 '오동나무 숲'이라는 뜻으로 뒷산 봉황산(鳳凰山)과 의미가 연결돼 있다. 전설의 새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고 했다.
마을 입구의 노송(老松) 비보림· 아름다운 돌담
오록마을의 길은 내성천(乃城川)을 따라 이어졌고 마을 입구에 아름다운 숲, 생명의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비보림(裨補林)이 있다. 수백 년 된 노송(老松)이 120m 이어진 솔밭으로 영양 ‘주실(마을)’과 함께 반촌 비보림으로 유명하다. 비보림은 풍수상 마을의 허한 지세를 보완하기 위해 조성했다.
아울러 가문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긴 풍산김씨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 자랑거리다. 문중 현조 19명의 주요 인생사를 47편의 그림으로 남겼는데, 효도 이야기, 선비 풍류, 임란 전쟁사 등이 담겨 있다. 화첩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는 1599년 2월 정유재란에 원병 왔던 명군이 철수할 때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명(明)의 장군 형개가 접빈사로 수고한 풍산김씨 김대현에게 준 선물이다. 그림에는 서양병사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왕조실록에 나오는 명군의 용병 포르투갈인이다.
오록마을 돌담은 시작과 끝이 없다. 군위의 부계 ‘한밤마을’과 함께 돌담이 아름다운 경북 마을로 선정되었고 마을 어귀의 솟대 무리도 이채롭다. 문중 자손이 대과·소과에 급제해 교지를 받을 때마다 하나씩 세웠는데, 한때 111개가 됐다고 한다. 오방 간색인 주황색 장대에 새 대신 푸른색 청룡을 올렸다. 망와고택, 노봉정사, 장암정, 오서고택, 화수정사 등 19개 고택과 정자가 돌담 안에 숨어 있는 백두대간 산록의 반촌마을이다. 춘양 와선정. 주변에 아름다운 정자 10여개가 숨어 있다.〈봉화군청〉
망와고택(忘窩古宅)
망와(忘窩) 김영조(金應祖)는 이조참판까지 올랐던 인물로, 형 (鶴湖) 김봉조(金奉祖), 우복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병산서원 건립을 주도해 오늘날 유교건축의 백미인 병산서원과 만대루를 있게 한 당대의 안목이고 노봉정사(蘆峯精舍) 주인인 입향조 노봉 김정은 김응조(金應祖)의 증손으로 영조 때 제주목사를 지냈다. 제주목사 시절 치적을 남겨 조선 오백년 제주목사 중 최고의 선정관으로 꼽혔다. 수년 전 4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자기 고장을 잘 다스려준 옛 목민관의 유적을 찾아 이 마을을 방문해 노봉정사에 절을 올렸고 후손은 현조(顯祖)의 치적이 30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빛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봉화 망와고택, 따뜻한 온정
망와고택(忘窩古宅)은 200년의 세월을 간직한 전통고택이다. 옛날 방식 그대로 고택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장작으로 군불을 넣는 전통 온돌방이 있고, 마당 한곳에는 취사를 위한 야외 개수대 시설을 갖추었다. 별도의 아궁이와 가마솥이 있어 장작불로 솥밥을 지어보거나,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나오는 옛날식 펌프도 체험할 수 있다.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의 둘째아들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와 여섯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의 벼슬길은 파란만장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치하에서 이이첨과 정인홍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도를 넘어서 극심하였고, 어린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를 보낸 후, 마침내 증살(蒸殺)시키고, 어머니 인목대비는 유폐시켜버렸다. 조정은 날로 어려워지고 국정은 어찌할 길이 없어서 망와(忘窩)는 벼슬을 버리고 울분을 안고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집으로 돌아와 그로부터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며 십년을 보냈다. 1623년(인조원년)3월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 하자, 그해 8월 망와(忘窩)는 예조좌랑으로 임명되었다. 망와는 삼십여 년 간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였으며 오로지 국가와 백성만을 위하여 온 힘을 다했다.
김영조(金榮祖)의 살아온 길을 살펴보면, 기강과 탄핵, 백관에 대한 규찰(糾察)과 풍속을 바로잡고 억원(抑怨)을 바로 살피는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을 다섯 번이나 역임하였고, 나라의 간쟁, 논박, 언로를 담당하는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大司諫)을 세 번이나 역임한 보기 드문 관료였다.
1642년(인조20)직을 사직하고 영천(지금의 영주) 고향으로 내려왔다. 1648년(인조26) 7월에 돌아가니 향년 72세였다. 망와(忘窩)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형제간에 우애로웠다. 구십 노모를 위해서 매년 명절에는 수연(壽宴)을 베풀어 즐겁게 하였다. 팔련오계 중에 둘째로 태어나서 가장 우뚝하였고 우애가 깊었다. 망와가 관직에서 보인 대의(大義)는 동생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와 함께 청사(靑史)에 빛난다.
노봉정사(蘆峯精舍)
‘노봉 김정’ — 오록개기조(梧麓開基祖)
김정(金人+政, 1670~1737)의 자는 사달(士達)이고 호는 노봉(蘆峯)이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증손이다. 영주에서 태어나 숙종 2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노봉산 아래 지금의 오록리에 터를 잡아 이사하였으니, 후손들은 공을 ‘오록개기조(梧麓開基祖)’라 추모한다. 오록개기조는 ‘오록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조상’을 뜻한다. 30주년이 되는 해에 기념비를 세웠다.
노봉정사(蘆峯精舍) 주인인 입향조 노봉 김정은 김응조(金應祖)의 증손으로 영조 때 제주목사를 지냈다. 제주목사 시절 치적을 남겨 조선 오백년 제주목사 중 최고의 선정관으로 꼽혔다. ― 수년 전 40여 명의 제주도민들이 자기 고장을 잘 다스려준 옛 목민관의 유적을 찾아 이곳 오록마을을 방문하여 노봉정사(蘆峯精舍)에 절을 올렸고, 노봉의 후손은 현조(顯祖)의 치적이 30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그 공덕이 빛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노운 김정은 옥천군수, 강릉 도호부사, 강계 도호부사 등을 거치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며, 특히강릉 도호부 부사 시절 강릉백성들이 공의 어진 다스림을 길이는 공덕비를 세웠다(강릉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
또한 노봉은 1688년 재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30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제주민에게 기억되고 그가 남긴 흔적은 지금도 제주도민에게 잊지 못하는 인물로 가슴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제주에는 거듭 흉년이 들고 목사가 갑자기 죽어버리곤 하는 괴변이 있을 때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삼천서당’을 설립하여 문맹퇴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공(公)이 제주의 후풍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화북 아낙네들이 머리카락 몇 개씩을 뽑아 모아, 고향 오록으로 향하는 상여줄을 만드는데 섞었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노봉이 세상을 떠나고 100여년 후에 제주도민들이 봉공비(奉功碑) 3기를 세웠으며, 1993년 제주시청에서 비역(碑域)을 정비하였다. 현재 오록리 마을입구의 소나무는, 그 당시 제주도의 솔씨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그 후 공이 제주의 후풍관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화북 아낙네들이 머리카락 몇 개씩을 뽑아 모아, 고향 오록으로 향하는 상여줄을 만드는데 섞었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노봉이 세상을 떠나고 100여년 후에 제주도민들이 봉공비(奉功碑) 3기를 세웠으며, 1993년 제주시청에서 비역(碑域)을 정비하였다. 현재 오록리 마을입구의 소나무는, 그 당시 제주도의 솔씨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지금을 후손들이 다시 심었지만 이를 제주송이라고 한다.
梧溪九曲(오계구곡)
노봉 김정이 지은 오록계곡의 풍취
자연경관이 빼어난 봉화에는 자연히 구곡문화도 활발하여 현재 구곡원림(九曲園林) 6개가 산재하는데, 오계구곡(梧溪九曲), 갈산구곡(葛山九曲), 법계구곡(法溪九曲), 대명산구곡(大明山九曲), 춘양구곡(春陽九曲), 광진구곡(光津九曲)이 그것이다.
‘오계(梧溪)’는 ‘오록계곡(梧麓溪谷)’을 말하는 것으로, 내성천의 최상류에 위치한 봉화군 물야면 오록마을 앞을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오계구곡(梧溪九曲)은 노봉 김정의 《노봉선생문집(蘆峯先生文集)》 권1의 실려 있다. 노봉(蘆峯) 김정은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증손으로 휘봉(輝鳳)의 아들이다. 1696(숙종 2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8(숙종 3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제주목사 때에는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세워 교육에 힘쓰는 등 많은 치적을 올렸으며, 제주사람들이 경모하였으며 양역수의(良役收議)를 기록하고 당시 양역제도(良役制度)의 폐단을 지적하여 개선법도 아울러 제시하였다.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으며, 귤림서원(橘林書院),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봉향되었다.
봉화의 구곡(九曲)은 모두 조선후기의 구곡인데, 그 중에서도 ‘오계구곡’이 가장 먼저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계구곡은 노봉 김정이 물야면 오록계곡 일대에서 경영하던 구곡이다. 우산곡(愚山曲)에서 상담곡(上潭曲)까지이다. 다음은 오계구곡의 서곡(序曲)이다.
梧溪山水蘊奇靈 (오계산수온기령) 오록계곡 산수는 기이하고 신령함이 숨어있고,
曲曲風光진幽絶 (곡곡풍광진유절) 굽이굽이 진 풍광은 멋 그윽한 절경이다
山自高高水自淸 (산자고고수자청) 산은 스스로 높디높고 물은 절로 맑았구나
漁歌唱晩動新聲 (어가창만동신성) 어부들의 으스름 노래 소리 메아리쳐 들리네
오계구곡(梧溪九曲)은 서곡(序曲), 제1곡 우산곡(愚山曲), 제2곡 고도곡(古渡曲), 제3곡 진의곡(振衣曲), 제4곡 예암곡(豫巖曲), 제5곡 송정곡(松亭曲), 제6곡 분포곡(汾浦曲), 제7곡 하담곡(下潭曲), 제8곡 중담곡(中潭曲), 제9곡 상담곡(上潭曲) 등 전 10곡으로 구성된 칠언절구의 연작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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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거촌(外居村)마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봉화읍 거촌1리는 광산김씨, 거촌3리는 원주변씨 집들이 모여 있다. 두 마을은 담으로 나뉘어 있다. 봉화읍 거촌1리와 3리는 ‘외거촌마을’로 불린다. 거촌1리에는 광산김씨 집성촌으로 봉화에서 이름난 ‘쌍벽당’이 있고, 거촌3리에는 원주변씨 집안, ‘수온당고택’이 있다. 쌍벽당 자리는 명당 소리를 듣지만 지세가 약하고 부근에 물이 없어 벼슬하는 인물이 나지 않는 터라 한다. 아예 벼슬이 나지 않을 자리를 찾아 터를 잡았다는 건데, 그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릴까. …♣ [계속] ☞ 운곡천 봉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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