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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무리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서, 예수님을 환호하며, 맞아들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
그러나 그 환호 소리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던 그들은 일주일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 어느 날보다도 경건한 한 주일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 아니라,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기독교 기관에서, 목사님들에게, “본인의 인생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성경 말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가장 많은 목사님들이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죽으셨습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때,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 19:6)고 말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도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죄도 찾지 못했습니다.
로마 군인으로, 이스라엘에 총독으로 파견 나온 빌라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킬까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라고 말했습니다.
말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 주님에게서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흠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사형 도구인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많고 많은 다른 방법들이 있었을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면 할수록, 무궁무진한 진리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왜 이 세상을 사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도, 바울처럼, 왜 살아가야 하는지,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를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입니다.
“A. W. 토저”라고 하는 신학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첫째, “한 방향만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바라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다.
둘째, “뒤로 후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를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워 할 것도 없고, 괴로워 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과거는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세울 것도, 위축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셋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을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보다 더 앞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한평생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일 뿐이지, 내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는 아무 의도, 아무 공로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은 “내가 사형 당했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엇을 자랑하고,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바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바울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은 감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그 일에 간여하였고,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성도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인생이 180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다.”(딤전 1:13)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나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내가 죽어야, 마땅한 일인데,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육적으로는 아직 나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벌써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죄인인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예수님과 함께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무엇이 죽어야 합니까? 우리의 보이는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갈 5:2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정욕과 탐심이 살아 있으면 안됩니다.
교만과 이기적인 마음이 살아 있으면 안됩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알던 것을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아를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기 감정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의견을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옛성품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내 마음대로 행하였던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가지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여러분!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노하고, 속상해 하고, 방탕하고, 자존심 상해하고, 고집부리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속상해하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상처받아 고통스러워하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밤잠 설치게 하는 원한과 분노로 가득 찬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옛 자아가 죽어야 죄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죄의 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때,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바울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고 말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안됩니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죄가 다스리던 인생이 이제는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내 삶의 주인이 철저하게 “나”였지만, 이제는, 내 삶의 주인이 “나”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멈추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도, 계획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나의 생각, 나의 경험으로 살려고 하면, 문제만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엡 3:17)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 마음 안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내 마음 안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내 마음 안에 계십니다. 바로 내가 있는 바로 이곳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주저함없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내 마음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 삶 안으로, 우리 가정 안으로, 우리 교회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심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정성껏 맞아 들여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살아 계셔야 합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 물질이 살아서, 주도권을 잡고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쾌락이 살아서, 주도권을 잡고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자아가, 자신의 왕이 되어, 주도권을 잡고, 횡포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뒤,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오, 주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먼저, 저로 하여금, 저의 육체와 영혼이,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시고, 다음에는, 예수께서 우리 죄인을 사랑하신 뜨거운 사랑을 저의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십자가의 사랑이 가득 넘쳐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다른 길이 없고, 다른 진리가 없고, 다른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내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용서되었으며, 하나님은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기억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미술관에서, 독일 화가 “스텐버그”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을 보는 순간, 피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그림에는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주었건만 너는 날 위해 무엇 주느냐” 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글을 읽는 순간, “나는 주님을 위하여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남겨진 십자가의 고통을 자기 자신이 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유하고 있던 자신의 영토를 개방했습니다. 당시 피난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마음대로 영지를 경작하게 하였더니, 오백여 가정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교회를 짓고,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 안에서 사는 삶으로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고 말했습니다.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며, 충성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더욱더 깊이 주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므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
주님을 바라봅니다.
날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 뜻대로, 주님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늘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