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후반부터의 연속된 국내외 정세는 티우(Thieu) 대통령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안겨주는 것들이었다. 미 군사원조의 격감으로 남베트남군의 전투 및 전투지속 능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거기에다 파리 평화협정 조인 전에 수차례에 걸쳐 지원을 약속했던 닉슨도 사임하였다.
9월부터 들끓기 시작한 티우 대통령에 대한 부정폭로, 그 여파로 인한 내각 및 군부의 인사이동, 1975년 1월 6일에 푸옥롱(Phuoc Long) 성 함락 등 티우에게는 고뇌의 연속이었다. 여기에다 남베트남을 방문한 미국의 의회방문단마저 지금까지 기대해 본 미국의 추가 군사원조는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인상을 주고 돌아갔다.
3월 10일에 북베트남군은 반메투오(Ban Me Thout)를 기습적으로 강타하였다. 제2군단의 병력배치로 보아 티우 대통령은 반메투오의 실함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재탈환할 가용한 예비대도 없었다. 남베트남군은 전국에 신장 배치되어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공세를 계속할 것이다. 미국의 반응도 없었다. 미 해, 공군의 항공지원 전망도 안 보였다. 미국 대사 마틴(Martin)도 신병치료차 미국에 있었다. 티우로서는 어떤 대책을 강구하여야만 하였다.
티우 대통령은 북베트남군이 반메투오를 공격한 다음 날 3월 11일 키엠(Khiem) 수상과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 참모총장, 안보담당 보좌관 당 반 쾅(Dang Van Quang) 중장과 조찬을 함께 하면서 그의 남베트남군 재배치에 대한 결심을 피력하였다.
트란 티엔 키엠
카오 반 비엔
당 반 쾅 중장
“현재 우리의 병력 및 전력으로서는 우리의 소망대로 전 국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토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번창한 지역들만이라도 확보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병력을 재배치하여야 한다.”
티우는 이와 같은 남베트남군 재배치 문제를 1975년 2월에 들어서부터 고려하였다. 남베트남군 재배치 문제를 제의한 사람은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예비역 준장 테드 서롱(Ted Sarong)이었다. 그의 제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현재 남베트남군의 능력으로는 전 남베트남 지역의 확보가 불가능하다. 남베트남군의 주력인 13개 정규사단 중 전 인구의 1/6이 거주하는 제1, 2군단 지역에 7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고 이 7개 사단도 북베트남군의 전력에 비하여 미약하며 계속 지원도 곤란하다. 따라서 제1군단 지역과 중부 고원지대의 대부분을 포기하여 남베트남군의 능력으로 확보가능한 지역으로 전선을 축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포기될 지역에 대하여는 북베트남이 아니라 임시 혁명정부(PRG)와 협상하라는 것이었다. 결정시한은 미국의 추가 군사지원에 대한 미 의회의 승인이 나지 않으면 2월 중순 경 까지는 결정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이 제안은 비밀리에 키엠 수상을 비롯한 연구팀이 검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1,2군단 지역을 포기한다는 것, 협상을 하여야 하고 또한 협상 후에 올 정치적 결과 등의 문제로 티우는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미 대사관측의 의견도 타진하여 보았다. 며칠이 지나 3월 11일 회신이 왔다. 지역을 포기하고 안하고는 남베트남인들이 결정하여야 할 사항이며 성공적으로 실시된다면 좋은 방안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북베트남군이 반메투오를 공격하자 티우는 남베트남군을 재배치하려고 결심하였던 것 같다. 티우는 우선 중부 고원지대에 있는 제2군단을 해안지역으로 철수시키고 제1군단 지역은 상황과 적의 압력에 따라 철수하여 투이 호아(Tuy Hoa)를 연하는 이남지역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3월 12일에 티우는 제1군단장에게 공수사단을 사이공지역으로 전환하도록 지시하였다. 남베트남군 제3군단 지역도 적의 6개 사단에 비하여 정규사단은 3개 사단으로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었다.
3월 13일 티우, 키엠, 비엔 그리고 제1, 3군단장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군과 주민들에게 미치는 충격을 고려하여 티우는 구체적인 재배치계획은 언급하지 않고 밀림과 산악지역은 포기하고 확보할 지역에 다낭(Da Nang) 지역을 포함시켰다. 제1군단장 고 쾅 트룽(Ngo Quang Truong) 중장은 공수사단의 전환 지시에 대하여 1군단의 현 상황을 보고하고 방어배치를 재조정할 시간적 여유를 주도록 강경히 요청하였다. 이에 수긍한 티우는 3월 17일부터 1개 여단씩 전환토록 하였다.
고 쾅 트룽
3월 14일 티우는 키엠, 비엔, 쾅을 대동하고 캄란(Cam Ranh)에서 2군단장 팜 반 푸(Pham van Phu) 소장을 만났다.
티우는 푸에게 현 군단병력으로 중부 고원지대를 얼마동안 지탱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푸는 보급만 지원되면 한 달은 버틸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반메투오의 재탈환은 병력증원이 없이는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비대는 없었다.
팜 반 푸 소장
티우는 그가 구상하고 있는 남베트남군 재배치계획에 따라 고수하여야 할 지역을 대략 말하고 그의 복안을 설명하였다. 현재 반메투오가 실함된 상황에서 콘툼(Kontum), 플레이쿠(Pleiku) 지역의 확보는 불가능하다.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공중지원이 필요하고 전 도로가 차단되어 공수로 보급을 하여야 하나, 남베트남군에게는 현재 그러한 능력이 없고 더구나 적은 강력한 대공화기를 보유하고 있다. 중부 고원지대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이다. 따라서 중부 고원지대의 병력을 해안지역으로 철수시켜 전투력을 보존한 후 2군단의 전열을 재정비하여 투이 호아 이남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반메투오만은 필히 재탈환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철수시의 기동로에 대하여 푸 소장은 7번 도로를 따라 철수하겠다고 하였다. 7번 도로는 플레이쿠 남방 약 20마일 지점에서 14번 국도로부터 분기되어 투이 호아로 연결되는 지방 도로로서 폭이 좁고 노면이 거칠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도로였다. 또한 남쪽에 있는 바(Ba) 강의 교량은 완전 파괴되었으며 투이 호아 서쪽에는 한국군이 작전 시에 광범위한 지역에 지뢰를 매설하여 기동이 곤란하였다. 그러나 푸는 전 도로가 차단되었고 이 도로는 적도 예측하지 못하는 도로로서 기습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도로로 철수하겠다고 하였다. 참모본부에게는 도하장비를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렇게 중부 고원지대로부터 남베트남군 2군단의 철수작전이 결정되었다. 1954년 프랑스군은 디엔 비엔 푸 함락 후에 통킹 지역(북베트남 지역)에서 신장 배치되어 있던 부대를 신속하게 철수시켜 전선을 단축하여 전투력을 보존하였다. 이제 남베트남군도 유사한 작전을 실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티우나 후에 푸가 작전을 실시하면서 간과한 것은 군인가족과 주민문제였다. 프랑스군에게는 가족도 없었고 그들을 따라 피난을 가겠다는 주민도 없었다.
첫댓글 남베트남도 북베트남 같은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했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