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어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말씀을 현실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 꽤나 해석을 해야 되기 때문에 해석과 적용에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게다가 설교자는 옛날 선지자처럼 구별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다.
설교자가 사자후의 설교로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발휘하지만 그가 과연 그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시스템도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누구도 설교와 설교자를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단지 설교자의 삶이 일반 상식차원에서 미흡할 정도로 두드러질 경우에만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비난의 주인공이 된다.
이 시대에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의 말씀을 가지고 진정한 능력과 감화력으로 다가가려면 말과 글이 아니라 그의 삶이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사람들은 회중석에 앉아 설교를 들으며 더러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으로 보아 깨닫기도 하고 뉘우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깊은 변화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 왜일까? 메시지와 메신저가 따로 놀기 때문이 아닐까? 설교와 설교자가 따로따로 평가 된다.
오늘날 회중석에 앉은 청중들 가운데 설교자의 메시지와 설교자를 한 가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것은 내가 설교자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이자 진단이다.
물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한 설교를 했어도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악에 받쳐 그를 돌로 쳐 죽였고,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성령과 지식의 사람 바울이 설교를 했지만 청중들은 전혀 감화 받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설교행위는 설교자와 청중의 상호작용이라는 식으로 위로를 삼는다.
어느 정도 설교자에게 위로가 되고 핑계꺼리가 되는 말씀이긴 하지만 그래도…….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으면서 그 당시에 활동한 선지자들의 삶에 오늘의 나를 비춰보자니...... 참 감사하고 다행스럽다 여기면서도 많이도 한심한 나를 발견한다.
첫댓글 때로는 선지자이면서
설교자도 계시겠죠~
설교자도 인간이기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실수함이 있을 수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의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실수는 감싸주고, 허물은 덮어주어 설교자도 청중도 공생해야 하는데
요즘 어디 그렇습니까? 더구나 예배가 실시간으로 생방송 되다 보니 설교자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리고
자칫 설교자는 회복불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마23:3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자가 강단에서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설교자가 강단 아래에서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삽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지킬려고 노력하되...)
설교자가 강단 아래에서 하는 행위는 (걍 덮어주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