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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6절) 메시야의 약속 우리는 가끔 나라 경제(經濟)가 너무나 어려울 때, 나라 경제(經濟)가 얼어붙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경제(經濟)도, 정치(政治)도 얼어붙어 있고, 온 세상이 얼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잔뜩 어깨가 축 처져서 걸어가고 있고, 거리에서나 사무실에서도 환히 웃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동네에 가보면, 엄마 등에 업혀 있는 어린아이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방긋 웃기도 하고, 깔깔 거리면서 소리 내어 웃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메시야는 우리나라 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해적(海賊)이나 무장(武裝)단체에 인질(人質)로 몇 년간 붙들려 있는데, 그들을 구출해줄 수 있는 정부 대표가 왔다는 말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메시야는 우리를 죄(罪)의 억압된 상태에서 구출해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대표(代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福音)을 듣게 되었을 때, 놀라게 되는 것은 복음(福音)이 어떻게 내 인생을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며, 또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복음(福音)안에는 한 주인공이 있는데, 이 분의 삶과 그 가르침이 그렇게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분에 대하여 들리는 말씀이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동정녀(童貞女)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고, 우리 죄(罪)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복음(福音)때문에 인생이 변한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됩니다. 그렇게 복음(福音)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좀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생애(生涯)와 가르침을 적은 네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가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왕의 복음’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복음서 시작에 가장 먼저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王)의 족보(族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證言)하셨고, 그 나라의 왕(王)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著者) 마태 사도는 세리(稅吏)로서 예수를 믿고, 인생이 180도로 변한 사람이었습니다.
Ⅰ.이스라엘의 왕의 족보 누구든지 작정하고,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하다가 처음 막히는 부분은 마태복음 처음에 나오는‘낳고.낳고’하는 족보(族譜)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族譜)가 18절 가량 나오는데, 이 족보(族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히 성경읽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에 대하여 한번 알아봐야 하겠다든지, 혹은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태복음 처음에 나오는 18절을 극복해야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진리(眞理)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는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리(稅吏)라는 직업(職業)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은혜(恩惠)를 받은 후에 자기를 가장 미워하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 위대한 복음서를 남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복음(福音)을 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을 가장 싫어하는 자들에게 가장 위대한 말씀을 바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조금 깊이 연구(硏究)하려고 하면, 마태복음의 원본(原本)문제가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이<교회 사>를 썼는데, 그 안에 히에라폴리스에 사는‘파피아스’라는 사람의 글을 인용한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파피아스는‘마태는 히브리어로〈로기아>(말씀)를 썼고 각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번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처음에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썼는데, 다른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헬라어 즉 그리스어로 번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이 맞는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마태복음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쓴 글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헬라어로 된 마대복음이 히브리어로 된 원본(原本)을 번역했다기보다는 너무나도 독창적(獨創的)인 헬라어 작품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최초의 히브리어로 쓴 복음서는 무엇이며, 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같은 내용의 공통부분들이 있는데, 과연 이 세 복음서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원전(原典)에 가까운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려고하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제자 세리(稅吏) 마태가 썼다고 믿으면, 되지만, 이렇게 혼란을 많이 겪는 이유는 파피아스의 글에 너무나 비중을 많이 두기 때문인데, 파피아스가 쓴〈로기아〉가 마태복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설혹 마태가 마대복음을 히브리어로 썼다고 해도 헬라어로 쓰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 사도는 분명히 헬라어로 마태복음을 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중요한 복음(福音)을 히브리어로만 남겨놓기에는 너무나도 아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아주 정교하게 짜인 내용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마치 어떤 정교한 옷을 짜듯이 예수님의 행적(行蹟)과 가르침을 번갈아 가면서 정교하게 짜놓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을 보면, 다섯 개의 커다란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모세오경을 본뜬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태 사도는 이 다섯 개의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사이에 예수님의 행적(行蹟)을 끼워 넣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마태 사도는 예수님의 삶과 이 가르침은 도저히 뗄 수 없는 한 덩이이며,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에서 가르침을 떼어낸다거나,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삶을 떼어 내버린다면,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예수님의 복음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바로 이런 가르침으로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의 주제(主題)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신 말씀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을 때,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3:15절)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目的)은 바로 이‘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目的)은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심으로 우리 모두 죄(罪)용서 받고, 하나님의 축복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의(義)’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적(宗敎的)인 의(義)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시고,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義)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가 우리의 공로(功勞)를 쌓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셨고, 영 단번에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축복이 주어지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福)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Ⅱ.아브라함의 믿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은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王)다윗에 의해서 거의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생생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1절)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이라는 조상(祖上)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로라는 바벨론땅에 살던 아람인이었는데, 그는 원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偶像)을 숭배(崇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느 날 하나님의 전도(傳道)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을 소개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직접 전도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한번 믿고 나니까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밤하늘에 별을 헤아려보라’고 하셨을 때, 그는 별을 헤아리면서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없는 데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면,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한번 죽음을 걸고, 하나님을 믿어야 진짜 살아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보시고, 그를 의인(義人)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원래 의인(義人)이 아니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믿을 때,‘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인정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죄(罪)는 다 가져가시고, 하나님의 의(義)를 아브라함에게 전가(轉嫁)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장부정리를 할 때, 누군가가 돈을 입금시키면, 부채(負債)가 없어지고, 재산(財産)이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창12:2절)너는 복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福)을 이 세상에 전해주는 통로(通路)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복(福)은 모두 모래의 복(福)이지, 진짜 복(福)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福)이 임해야 복(福)은 진짜 복(福)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너에게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믿음의 후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혈통(血統)으로는 아브라함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조상(祖上)들의 피와 습관(習慣)들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내려오는 제사(祭司)라든지, 미신(迷信)같은 것이 얼마나 끊어버리기 어려운 습관(習慣)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조상(祖上)들의 돌 감람나무에서 잘라버려서 이스라엘이라는 참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이셨습니다. 즉 우리 안에는 천국(天國)의 진액(津液)이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다운 것은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이 되면서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그의 후손이 큰 나라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이것을 하나님의 맹세(盟誓)로 약속(約束)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맹세(盟誓)가 거의 이루어진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평범(平凡)한 목동(牧童)출신이었지만,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목동(牧童)의 자리에서 들어 올리셔서 이스라엘의 왕(王)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이스라엘에 부흥(復興)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안에 말씀의 통치(統治)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은혜(恩惠) 받아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때, 이스라엘은 큰 나라가 되었고, 주위에 있던 악(惡)한 왕(王)들을 모두 정복(征服)했습니다.
다윗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으로 평화(平和)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거의 다윗을 통해서 다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聖殿)을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전쟁(戰爭)을 해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다가 다윗 자신도 죄인(罪人)이어서 신하(臣下)의 아내와 좋지 않은 관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 죄(罪)를 은폐(隱蔽)하기 위해서 여인(女人)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戰爭)터에서 죽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나라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 성전(聖殿)을 완공하고, 그 나라가 전성기에 도달하는 것 같더니, 그 후에 나라가 분열(分列)되어 쇠퇴(衰退)하더니, 나중에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滅亡)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원히 풀리지 않던 의문(疑問)은 왜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영원히 다스리겠다고 하셨는데, 이 나라를 망(亡)하게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결론(決論)은 아직까지 진정한 다윗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Ⅲ.이방 여인들의 믿음 예수님의 출생(出生)을 소개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족보(族譜)를 보면, 결코 자랑스러운 족보(族譜)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이 족보(族譜)는 망(亡)한 족보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불륜(不倫)의 현장이 등장하기도 하고, 이방 여인들의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이방인 여인들이 메시야의 약속을 알게 되었고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상속자(相續者)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1:3-5절)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톨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여기에 보면, 놀랍게도 여러 명의 이방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과 관계해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유다지파에게는 치욕적인 역사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역사는 바로 이 치욕(恥辱)의 역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38장에 이 내막이 자세히 나옵니다. 유다는 신앙의 회의(懷疑)를 느끼고, 아예 세상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 가나안에 가서 가나안 여인과 결혼(結婚)해서 아들 셋을 낳고, 첫 아들을 가나안 여자 다말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큰 아들 엘이 하나님 앞에 무슨 죄(罪)를 지어서 죽게 됩니다. 이때 유다는 자기 며느리에게 가서 가나안 남자와 재혼(再婚)하지 말고, 둘째 아들 오난과 결혼해서 믿음의 아들을 낳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이스라엘의 복(福)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兄嫂)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려고, 피임(避妊)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오난도 죽이십니다.
이때 유다는 며느리에게 막내가 크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막내아들도 죽을까봐 주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남자를 주지 않으니까 대담하게 창녀(娼女)옷을 입고, 시아버지를 기다리다가 그와 관계해서 임신(妊娠)을 합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행음(行婬)을 해서 임신(妊娠)했다는 말을 듣고, 불에 태워 죽이라고 하는데, 그 여자가 유다의 지팡이와 끈과 도장을 보여주면서‘이것들의 임자가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유다는 자기가 얼마나 타락했으며, 세상으로 깊이 빠졌는지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낳은 쌍둥이가 유다 지파의 조상(祖上)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가나안 여인들을 싫어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목숨을 걸고 나오는 여인들은 모두 위대한 믿음의 어머니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또 엄청난 내용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이방 여인에 대한 기록입니다. 5절)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라합은 여리고 성(城)의 기생(妓生)라합을 말합니다. 이 기생(妓生)은 단순히 밥이나 팔고, 술이나 파는 사람이 아니라, 창녀(娼女)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멸망(滅亡)하지 않으려고, 이스라엘 두 정탐꾼을 살려주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학자(學者)들은 라합과 결혼(結婚)한 살몬이 두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라합이 낳은 보아스는 모압여인 룻과 결혼(結婚)을 해서 오벳을 낳게 되는데, 이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족보(族譜)에 나오는 세. 여인(다말, 라합, 룻)은 모두 이방인(異邦人)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세상적인 모든 것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상식(常識)을 뛰어 넘는 방법으로 믿음의 자녀들을 낳아서 당당한 천국(天國)의 시민권(市民權)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 자신이 낳은 솔로몬도 그의 어머니가 사실은 불륜(不倫)으로 다윗과 관계해서 낳았던 아들입니다.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우리야의 부인(婦人)이었는데, 우리야가 헷 족속이기 때문에 밧세바도 이방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오해(誤解)는 자신들의 혈통(血統)이 특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신다는 선택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순(矛盾)되게 그들의 혈통(血統)속에는 많은 이방인(異邦人)의 피가 섞여 있었고, 특히 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다윗 왕(王) 자신도 죄(罪)에 오염(汚染)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 여인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한 여인들은 모두 그 축복을 받았습니다. 결국 우리 신앙(信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혈통(血統)이 아니라, 그 안에 흐르는 진액(津液)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우상(偶像)을 섬기던 자였는데, 세상의 나무에서 잘려져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나무에 접붙여져서 엄청난 믿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아브라함 뒤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혈통(血統)은 결코 인간적인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혈통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액(津液)을 공급받은 자들의 족보(族譜)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 자손들은 가족(家族)으로 존재(存在)할 때도 있었고, 애굽에서 노예로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떠돌이로 수십 년간 방황할 때도 있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사실은 그들이 바로 메시야의 약속(約束)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所望)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이상. 이 세상에서 소멸(掃滅)되지 않았으며, 특히 그들이 바로 메시야의 약속(約束)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붙들 때에는 언제나 큰 부흥(復興)이 일어나서 주위에 있는 나라나, 민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影響力)을 나타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敎會)는 바로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안에는 영적(靈的)인 영광이 있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肉體)안에 있던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이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연합하는 한, 이 세상에 어떠한 변화(變化)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소멸(掃滅)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 나라 안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의 의(義)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罪)를 십자가로 사(赦)해주시고, 하나님의 의(義)로 옷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든지, 못 살든지, 믿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온갖 굴욕(屈辱)을 참고, 이 나라 안에 속하기 원했던 이방 여인들이나, 위대한 믿음의 어머니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왕(王)만이 아니셨습니다. 혈통(血統)중심의 유대인들은 오직 그 약속의 보관자로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들도 이 왕(王)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멸망(滅亡)을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나라 그 약속의 진액(津液)입니다. 이 진액(津液)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액(津液)이냐? 다윗의 부흥(復興)의 진액이냐? 하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시시한 진액(津液)으로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子孫)이며, 그리스도 왕국(王國)의 시민(市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신 분이며, 보잘 것 없던 쓰레기 같은 우리 인생을 보석(寶石)같은 인생으로 바꾸어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시며, 우리의 보배(保陪)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당하는 고난(苦難)을 부끄러워 해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의 의(義)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72장 *만왕의 왕 앞에 나오라* 주일 헌금 좀비(Zombie)영혼을 살리는 선교센터 설립 지원금 농협 302-8772-0191-01(헌금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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