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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35~36장 야곱과 에서의 번창) |
35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벧엘에 단을 쌓았다는 내용입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망각한 채, 세겜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 그리고 이어진 시므온과 레위의 살육 사건 등으로 인해 두려움과 염려가운데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서 과거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 벧엘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
우선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겜에서의 디나의 강간 사건과 그리고 이어진 시므온과 레위의 세겜 살육 사건으로 인한 야곱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관한 내용이(34장), 35장 서두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과 이어진 것으로써 원인과 결과적이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것으로 35장 첫 서두에 한글 번역 성경에는 없으나 원문에는 히브리어 ‘와우(ו)’가 사용되었는데 뜻은 ‘그리고’입니다. 즉 본 장의 시작은 앞 사건의 인과관계임을 보여 주며, 때에 여호와께서 찾아오셨고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야곱에게 찾아오셨고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명하신 첫 마디가 ‘일어나’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수행자인 야곱의 반응은 머뭇거림이 없이 일어나 지시하신 벧엘로 올라갑니다(3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야곱의 반응은 야곱의 의지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의지일까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의 열심’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나안 귀환 이후 침묵하셨습니다(33장,34장). 밧단아람에서 야곱으로 떠나게 하실 때에 명하시며 위로하신 이후 떠나온 숙곳과 세겜 성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세겜 성에서 야곱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고 그로 인해 두려움으로 갇히게 되고 맙니다. 그때에 찾아오시고 나타나셔서 ‘일어나’라고 명하시고 그리고 벧엘로 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즉각적인 ‘일어남’은 야곱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요 섭리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명하신 ‘벧엘’은 야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세겜에서의 살육과 노략으로 인해 두려움이 엄습했고,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림으로 찾아온 불안과 근심 가운데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명하여 올라가라고 하신 ‘벧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위함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당시 야곱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리고 그 언약대로 함께 야곱 자신의 모든 여정 속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우선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곳이 ‘벧엘’입니다. 그리고 그 ‘벧엘’에서 사닥다리와 함께 반드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창28:12~15). 그래서 그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셔서 외삼촌 라반에게서 지켜주셨고 함께 하시므로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떠나고자 할 때에 찾아오셔서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집으로 향할 때에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고(창31:3,13), 그리고 그 약속대로 함께하여 주심으로 삼촌 라반과 형 에서의 칼에서 건져 주셨으며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벧엘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또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으라’에서 ‘제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에서의 ‘제단’은 제단 자체 혹은 형식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제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 혹은 숭배 등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때가 되면 찾아오시고 곁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언약’ 때문입니다. 회복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긍휼히 여기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제단은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회복하게 되는 것은 화목하게 하는 제물이 필요한데 그 제물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생축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모든 제물들은 장차 영원한 산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예표이며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성도의 회복은 예수님뿐이며 예수께로 돌아오고 향할 때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백 수천 번의 제사보다도 한 번의 순종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 현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 중에는 형식에 얽매인 예배나 봉사 그리고 보이기 위한 섬김을 하고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라고 생각하며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를 부추기고 선동하는 목사나 교사들이 많습니다. 이는 중심을 보시고 내면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홀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이는 속임입니다. 신앙은 포장이 아닙니다. 신앙은 다른 지체들과의 경연장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세계를 구축하거나 나의 내면과 외면을 꾸미는 틀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자기 십자가 지는 삶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벧엘이라는 장소를 지정하시고 제단 쌓기를 말씀하시는 것은 곧 그때 그 장소에 나타나셔서 언약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때나 지금이나 너와 함께 하시므로 걱정하기보다는 여호와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형 에서의 칼이나 지금의 세겜 사람들의 칼이나 상관없이 야곱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되새기고 기억하면 위기의 현실에 빠지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 어디서나 승리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기억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것은 제하거나 깨트리게 됩니다. 우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2절에 야곱이 가족들에게 명령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야곱의 명령 첫 번째는 ‘이방 신들을 버리라’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여러 족속들에 의해 온갖 잡신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미신들의 진열장 같았습니다. 그 땅에 있는 족속들마다 나름대로의 신들과 신당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들과 접속하면서 그들의 삶은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가나안 땅에 살며 이들과 접촉하면서 이방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이 달콤하고 보암직한 모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속지 않고 넘어가지 않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입니다. 우리 성도가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되지 않으면 누구든지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만입니다. 이에 야곱은 ‘이방 신들을 버리고 제하라’고 명령합니다. 언약대로 이끄시고 우리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방신들의 특징은 ‘형상’입니다. 하지만 생명이 없고 죽은 것이며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며 우리를 인도하거나 결코 만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방신은 성도와 교회를 유혹하고 무너뜨리는 허상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정결함’은 어떻게 가능하며 ‘의복을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흔히 바리새인들과 같이 ‘정결함’은 금식과 회개를 말하며 ‘의복을 바꾸어 입는다’는 것은 새 옷으로 바꾸어 입거나 또는 겉모습만 바꾸면 되구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정결함’과 ‘의복을 바꾸어 입음’ 두 가지는 하나의 내용입니다.
정결해진다는 것은 내 스스로 혹은 나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흠 없으시고 정결하신 분 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 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의복을 바꾸어 입는다’는 것은 야곱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됩니다.
27장22~23절에,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고 하십니다.
음성은 분명히 야곱의 음성입니다. 이삭은 알멩이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손이 에서의 손이라는 것입니다. 겉에 입힌 털 때문에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을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26~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정결해진다’는 것과 ‘옷을 바꾸어 입는다’는 것은 곧 새 옷을 입는다는 것인데 이는, 나는 죽고 예수를 입는 것이며 그로 인해 거룩하게 구별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께로 돌아섰다는 것이며 새 창조요 새로운 시작을 위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옷이요 죄로 인한 영벌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결과로서의 옷입니다. 그래서 위의 본문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면서 미래완료형 시제를 사용합니다.
본문 2절의 ‘의복을 갈아입거나’ 빨아 입는 행위의 의미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엡4:22,24). 즉,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은, 과거 사단의 종노릇하던 육체적인 행실에서 돌아서는 삶을 뜻하며 빛이신 예수의 행실을 따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흐름에서 교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당신의 백성들로 돌아서게 하시기 위하여 때리시며 징계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적극적인 강권하는 메시지로서 징계를 받을 때에 돌아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자녀이기에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매를 맞고 징계를 당하는 자는 사생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는 뜻입니다. 자녀이기에 때리는 것입니다. ‘매’를 맞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회초리는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매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더 맞기 전에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기보다는 감사와 찬송으로 〈매맞은 자리〉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벧엘로 향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3절)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야곱은 즉각적으로 순응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 스스로가 약해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벧엘을 상기시키시며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하셨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난 환난과 위험과 위기에서도 지켜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라고 말하면서 벧엘에 올라가 제단을 쌓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명령은 들은 모든 가족들이 자기 손에 있는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가져오는데, 이에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습니다(4절). 본문에서 ‘자기 손에 있는’이라는 것은 가까이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며 늘 함께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명령에 따라 모두 가져와서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이같은 행위는 죽음이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5절).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심인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어디로 가든지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창28:15).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가는 길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다’는 것을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알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위의 5절 본문에서 단어 몇 개를 정리하면, 첫 번째는 본문 앞에 ‘그리고’라는 뜻의 히브리어 ‘와우(ו)’가 빠져 있습니다. 즉 야곱이 상수리나무 아래에 우상을 묻는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그곳을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떠났으나’입니다. 이는 원어로 ‘나싸(גסע)’라고 하는데 뜻은 ‘뽑아내다’, ‘잡아 뽑다’, ‘제거하다’, ‘떠나다’, ‘여행하다’ 등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장막 말뚝을 뽑아 ‘이사하다’는 뜻으로 정리가 됩니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유목민인 야곱이 모든 도구를 챙겨 세겜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야곱은 불안함과 두려움의 세겜이라는 자리에서 조금도 미련도 두지 않고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두려워하게’입니다. 이는 ‘공포’라고도 하는데,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라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공포가 성읍들에 임했으므로’라고 직역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무사히 벧엘에 이르러 단을 쌓고 ‘엘벧엘’이라고 부릅니다(6,7절). 그 말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이지만 이때 야곱이 ‘엘벧엘’이라고 한 것은, 벧엘에 하나님이 나타나 언약하신 것을 의중에 두고 부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브가의 유모가 죽어 상수리나무 아래에 장사합니다(8절). 리브가의 유모는 리브가가 처음 이삭의 아내가 되려고 나홀의 성을 떠날 때에 같이 동행을 한 자입니다(창24:59 참조). 그가 장사된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하는데 그 뜻은 ‘곡함의 상수리’라는 것입니다.
9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국민과 왕과 땅을 언약하시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9절)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10~12절)고 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야곱과 말씀하시던 곳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13절).
위의 본문 9절은 읽는 독자들로서 좀 의아하고 이해가 힘든 구절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본문의 야곱은 이미 십여 년 전에 밧단아람을 떠나 요단강 동편인 숙곳과 그리고 요단강 서편인 가나안 땅 세겜으로 들어와 살아가다가, 디나의 강간 사건과 아들들의 세겜 할례 사건으로 인해 두려움 중에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현재 벧엘에 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은 세겜이 아니고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아오매’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벧엘’인데 이는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이라는 언약적 의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겜에서 아들들의 할례 사건으로 인해 떨며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지시하십니다(35:1). 이는 야곱에게 벧엘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의 장소였고 거룩과 생명의 기념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벧엘’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복과 함께 받았고 또한 임마누엘의 약속을 받았으며 동시에 꿈에서 만난 하나님께 돌을 세우며 스스로 하나님께 서원을 한 장소입니다(창28:13~20). 그래서 그는 반드시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삶의 시작과도 같은데, 그 삶의 시작이 하나님과의 만남이었고 언약이었으며 서원입니다. 그래서 재시작을 한다는 의미에서 세겜을 빼고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서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고 서원을 한 것입니다(창28:21,22).
이는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외삼촌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가는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야곱으로 재물로 단을 쌓고서 재시작을 기념하게 하시며 야곱에게서 잠시 사라졌던 ‘이스라엘’이라는(창32:28) 이름을 다시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겠으며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10절). 이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는 야곱이라는 한 개인에게서 집단과 부족으로의 전환점입니다. 더 나아가 ‘나라’라는 것으로 확장하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하신 언약의 성취를 미리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신령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
「여기서 잠시」 하나님께서 안식과 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해 가시는 ‘나라’와 ‘교회’가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모형:아브라함)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음과 부활(모형:이삭)을 통해 세우시는 교회와(백성, 번성) 그리고 완성된 나라(땅, 영적 이스라엘)를 세워가시는 과정이 보이시는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이며 절대적인 은혜 언약을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전능적 열심으로 언약하신 나라가 성취되어 가는 것이 보이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결코 인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이루어가시는 것이 보이시는가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복을 주셨다고 하십니다(9절). 왜일까요? 이유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언약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나 행위나 우리의 모습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장 나라를 만드실 것을 언약하시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언약을 계승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에서 ‘다시’는 ‘반복하다’는 뜻인데. 이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향할 때에 나타나셔서 복 주신 것에 대하여 반복적이며 연속적이다는 것을 뜻합니다(28:13~15 참조).
9절에서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라고 하셨는데 이 ‘복’에 대한 내용이 다음 구절인 10절과 11~12절에 설명하십니다. 첫 번째 복은 10절의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요 세 번째 복은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것이며 네 번째 복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가나안 땅을 야곱과 그 후손들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복은 하나님을 이겨서 부르게 하신 야곱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입니다(10절).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이긴 백성들’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복이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곧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이어진 11절과 1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고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조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던 17장 1~2절의 반복이며 계승입니다.
이 복의 내용은 야곱에게 이미 밧단아람으로 향하는 노중에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잘 때에 꿈에서 해주신 약속이었고(창28:13~15) 또한 밧단아람에서 떠나려 할 때에도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31:3)고 하시며 언약이 불변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왜 재반복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언약의 신실하심과 변치 않으심〉이며 그리고 이 〈언약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는 야곱의 행위와 정성과는 상관없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의 11절과 12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 ‘이스라엘’에 대하여 설명된 언약의 내용입니다. ‘나는 전능하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면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그대로 야곱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셨던 ‘나라 세우심’을 또다시 말씀하시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 ~~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라고 하십니다.
다음 두 번째 복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국민을 가르킵니다. ‘왕들’은 국권(통치)을, ‘땅’은 국토를 말씀합니다. 나라의 3대 요소인 국민과 국권과 국토를 언약하십니다. 아브라함부터 계속 이어진 언약입니다. 이 ‘나라’ 혹은 ‘민족’이 곧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 이어짐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달되면서 완성됩니다(마1장 참조). 예수께서 왕의 왕되셔서 당신의 백성들인 성도들을 땅끝까지 모으시고 그리고 천상의 땅을 허락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십니다(행1:8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첫 걸음과 첫 선포하심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입니다. 이 선포는 비록 미래에 드러나는 사건이지만 본질은 천상 천국의 주인이시며 왕되신 예수 자신이 이 땅에 추수하시고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이미 완성되고 종결되었음을 드러내셨는데, 그것을 ‘가까웠느니라’라는 완료시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밝히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곧, 택정하신 자기 백성들을 낳고 낳아 번성케 하실 것을 언약하신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이 언약의 절정은 출애굽기 1장7절,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에서 확인됩니다.
이렇게 번성되는 모형은, 세상의 어느 무엇이 방해하고 상관을 해도 변함없이 세상 모든 나라에서 자기 백성을 뽑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땅의 티끌 같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므로 성취하십니다.
다음 세 번째 복인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 유다를 통하여 작정하신 대로(창49:10) 마음에 맞는 자인 다윗을 세우시고(행13:22) 그의 후손 곧 다윗 왕조를 통하여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하시다가 결국, 영원한 왕이시며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므로 성취하십니다(마1:16). 참으로 긴 역사에서 오직 하나의 다윗 왕조로 말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복인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라는 것은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데, 열조들로 사게 하시며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전쟁으로 차지하게 하시다가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러 온전히 성취하게 하십니다(왕상4:21,대하9:26).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내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능력으로 그 땅을 주셨음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10절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어구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입니다. 여기서 ‘부르시고’는 원어로 ‘카라(קרא)’라고 하는데 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큰 목소리로 외쳐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르시는 주어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일반 사람이 부르라고 지으신 이름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스러워서 큰 소리로 부르시고자 지어 주신 자기 백성을 향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인 ‘교회’를 부르시는 구약의 이름이요 영적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이는 여호와만이 기뻐 소리치며 크게 부르시는 이름이면서 ‘나라’이며 ‘열국에서 뽑은 하나의 신령한 집단’입니다. 여기에 들어온 자는 무조건 ‘이스라엘’이 되며 그리고 이 ‘나라’는 온전하며 영원한 나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나라’는 인간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문’이신(요10: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오게 되며, 한 번 들어온 자는 세상 무엇도, 어떤 힘도 들어온 자를 그 나라에서 꺼내지 못합니다.
야곱에게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떠나 올라가시고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그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부어 드리는 제물을 붓고 그리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13,14절).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15절).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이 그(야곱)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는 것은, 야곱과 말씀하셨고 야곱이 보는 곳에서 하나님이 하늘 위로 올라가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으며 이는 결국, 장차 자기 백성 중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위로와 약속을 하신 후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어서 야곱이 그 장소에서 ‘돌기둥’을 세웠다는 것은(14절)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돌의 변치 않음과 같이 마음에 잊지 않고 기억하여 새기겠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세운 돌기둥은 밧단아람으로 향할 때 그곳에서 세웠던 돌기둥의 신뢰요 믿음입니다(창28:21,22 참조). 즉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변치 않았으며 그리고 또한 이루어지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기둥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14절) 야곱의 헌신과 거룩의 기쁨을 표현하는 뜻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헌신하려는 것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변치 않으시고 이루어 주셨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 벧엘을 통해 모든 위험에서 언약대로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거룩의 기쁨의 예식적 표현으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벧엘’이라 부른 것이며(15절) 이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