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요한 20,1-9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제가 누누이 얘기했듯이 예수님 부활시켜드리는 것이 사순절이 아니라고 그랬죠,
‘우리 각자가 부활해야 한다.’
그 말씀 깊이 새겨서 작은 것 하나라도 여러분들이 부활하려고 애를 쓰셨던 사순절이었다고 그런다면
아마 이번 부활절은 다른 부활절과는 다르게 그냥 행사처럼 지나가는 부활절이 아니라
여러분이 새롭게 부활한 아름다운 부활절이 되리라 저는 믿습니다.
제가 가끔 냉장고 청소를 합니다.
오래된 음식, 특히 나물은 빨리빨리 먹든지 아니면 버려야 해요.
어제도 민들레도 버리고 양념통도 버리려고 보니 2리터짜리 페트병에 꽉 찼어요.
2주 전에 주목 전지하러 오신 회장님이 부인과 같이 오셨는데, 그 부인이 초고추장을 해서 왔죠.
그날 주변에 있는 민들레 따가지고 초고추장에 묻혀서 맛있게 먹었어요.
‘남은 것 고추장은 여기다 둘 테니까는 이렇게 해서 드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아요’ 하셨지만, 제가 무쳐보질 않았죠.
그런데 쉬었을 것 같아 버리려고 갑자기 딱 뚜껑을 여는 순간!
나는 김정은이가 미사일 쏜 줄 알았어.
병마개가 내 눈을 때렸고, 그 신 것이 눈에 들어갔죠.
그리고 옷, 천장, 마룻바닥이고 다 새빨개진 거야.
일단은 눈이 안 보이니 물에다가 씻는데, 씻어도 얼마나 쓰라리던지.
다시 정신 차리고 보니 그 페트병이 다 뽀개졌어요.
아무튼 닦는 데만 4시간 걸렸어요. 어제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천장도 다 붙어 있고, 이게 실크 벽지라 그래도 물수건으로 잘 닦이긴 했지만, 다 닦았나 보면 저쪽에 또 뻘건 게 하나 붙어 있고.
그러니까 폭탄들이 다 퍼진 거야.
어제 하나 배운 것이 식초가 든 음식들은 냉장고에서 보관해야 하나 보다.
저는 놓아 주신대로 싱크대 밑 실온에 보관했거든요.
부활 전날 주님은 이렇게 폭탄을 터뜨려주시어 깨달음을 주시는구나.
그런데 제게 양념을 준 자매는 유명한 전문가인데, 나 당해보려고 이랬는지 며칠 후 전지하러 오면 물어봐야겠어요.
아무튼 어저께 황당하게 생각지도 않은 일이 당하니 어떤 감정이 들까요?
화딱지가 나는 거예요. 청소하면서 세 시간 동안 속에 불 끓어요.
‘내가 뭐 하는 짓이야? 이게’
그래서 막 그 자매가 밉고 민들레 하나 얻어먹고 난 다음에 내가 뭐 하는 건지 화가 나요.
그러다 ‘마귀가 또 식초 고추장 가지고 나를 부활절에 힘들게 만드는구나.’
좀 진정하면서 어젯밤을 보냈어요.
그런데 오늘 봅시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었죠?
부활하신 이야기는 4 복음서에 보면 모두 시작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나와요. 그런데 그 숫자가 달라요.
마태오복음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라고 나와요.
여러분들 막달라 마리아가 이름이 아니에요.
막달라(Magdala)에 사는 마리아란 말이죠.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딱 한 사람, 마리아 막달레나만 나와요.
루카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이름이 안 나와 ‘그 여자들’이라고만 나와요, 복수형으로. 들 이제
마르코 복음 남았죠?
마르코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세 여자의 이름이 나와요.
막달라의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있죠.
그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떤 복음사가의 말이 맞을까?
가장 늦게 쓴 게 누구예요? 요한이겠죠.
요한은 산전수전 겪으면 그걸 다 지켜봤단 말이에요.
그러면 요한의 말이 맞나, 막달라 마리아만 갔을까?
그러다 또 어떤 생각이 들었냐 하면 제일 먼저 쓰인 복음이 뭐예요?
마르코 복음이죠.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30년 정도 지나 쓰인 거예요.
그래서 제일 먼저 쓰인 복음인 마르코를 원복음이라 해요.
그런데 마르코 복음에서 세 여자의 이름이 언급되었으니 가장 정확한 것이 아닐까?
내 나중에 죽으면 가서 물어볼 게 하나가 또 생긴 거예요.
이것은 성경 주석을 다 찾아봐도 여기에 대한 정확한 주석이 없어요.
나는 제일 먼저 쓰이고 구체적인 마르코 복음 쪽에 마음이 기울어요.
막달라의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살로메를 보통 의로운 백부장의 아내로 짐작해요.
살로메가 또 어디 나오는지 아세요?
요한의 머리 자를 때 요사스럽게 춤추던 헤로디아의 딸 이름이 살로메예요.
그 당시 히브리에는 살로메라고 하는 이름이 되게 많아요.
우리 식으로 따지면 미숙이, 명숙이, 명자 이런 이름이죠.
그 당시 흔해 빠진 이름이 살로메, 또 마리아, 또 예수도 포함돼요.
그래서 이름 앞에 출신 동네를 붙여주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라고 하는 동네에 살던 마리아.
토마스 데 아퀴노스, 아키노라는 도시에 살던 토마스 성인.
그레고리오 니사, 니사라는 수도원에서 살던 그레고리오 성인.
같은 이름이 많기에 뒤에 출신지를 붙이는 거죠.
지금까지는 여담이고, 오늘 복음의 핵심을 그게 아니죠.
저는 오늘 요한복음을 읽었지만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것으로 묵상해보고 싶어요.
거기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무덤을 향해 가는 세 여인이 있었다 하죠.
그 여인의 이름이 누구라고요?
이 여인들은 왜 무덤에 갔을까요?
시신에 발라 드릴 향료를 사서 간 거예요.
유대인들은 죽으면 죄인으로 죽든 그냥 죽든 수천 년 내려오는 풍습이 시신에 향료를 발라 묻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향료를 못 발라 드렸죠.
천하 죄인 취급당해서 그냥 집어놓고 막아버렸잖아요.
그런데 시신에 발라 드릴 향료는 샀는데, 문제는 그 가능성이 있었느냐 이거예요.
제로(zero)야.
사실 이 여인들은 자기들 앞에 어떠한 엄청난 일이 있을지를 상상도 못 하고 달려간 거죠.
그냥 향료만 가지고 발라 드릴 가능성이 있고 없고는 따지지 않은 거예요.
그 대신 이 세 여인의 머릿속에는 근심이 하나가 있었어요. 뭘까요?
무겁고 저 큰 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무덤에서 저 돌을 굴려내 줄지, 오로지 이 세 여인의 머릿속에는 가득했겠죠.
향료를 가져가면서도 돌에만 온전히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죠.
무덤을 가로막고 있던 돌, 사순절 기간에 죽은 라자로 부활 이야기하면서 ‘소생삼언’이라 제목을 붙여 올렸죠.
첫째가 돌을 치워라.
둘째가 라자로야 일어나라
셋째가 풀어주어 자유롭게 해라.
이 똑같은 문제가 오늘 이 세 여인 앞에 다시 나타난 거예요.
라자로는 예수님이 직접 돌을 치우라고 명령한 것인데, 그 당사자가 지금은 돌 속에 갇혀있어요.
내가 볼 때는 희망 제로 상태에서 쫓아간 거죠.
왜? 말 그대로 그리워서.
그 무거운 돌을 여자 셋이 어떻게 들어내고, 또 그거 들어냈다가는 큰일 나요.
로마 병정한테 바로 잡혀가죠. 로마 군인이 지키고 있단 말이에요.
상상할 수도 없지만, 하여튼 머릿속에는 돌 걱정거리가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가보니까 세상에!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가로막아 놓았던 엄청난 큰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어요.
어찌 된 일인가!
오늘 복음은 포커스가 아주 많아요.
여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길을 나선 베드로 쪽에 포커스를 맞추느냐,
아니면 요한 쪽에 맞추는가 등 굉장히 묵상 거리가 많지만,
다 하면 산만하기에 오늘의 메시지는 돌덩어리로 했어요.
조금 전에 얘기한 대로 여인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부활했느냐 안 했느냐 중요한 게 아니죠.
다시 살 것이라는 그 말을 기억했을까요, 못 했을까요?
여인들의 관심은 부활보다도 돌덩어리였어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여정에 깊이 동참하려 하는 우리 각자에게
여러분들을 방해하고 막고 있는 큰 돌이 있죠.
그 무거운 돌의 정체를 여러분들이 아십니까?
이론적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 알죠.
하지만 여전히 지금 큰 돌이 가로막혀 있어.
이성적으로는 오늘 기쁜 날이고 의지적으로도 기쁘다고 하지만 뭔가 답답해.
여전히 나를 못 나가게 하는 방해하고 있는 큰 돌, 그 무거운 돌의 정체를 성서 신학에서는 여러 가지로 분석하죠.
교만의 돌, 절망감의 돌, 슬픔의 돌, 분노의 돌, 상처의 돌,
어제 나는 고추장이 터지는 바람에 네 시간 동안 분노의 돌과 절망감의 돌에 막혀 있었죠.
‘이걸 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누구를 부를 수도 없고.’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한 것과 우리가 부활한 것과 다르다고 내가 거듭거듭 강조한 것 아닙니까?
부활을 체험 못 하게 막는 돌, 이 무거운 돌을 도대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누가 있어서 도와줄까?
성경에는 천사가 나오죠.
돌을 치운 사람이 로마 병정도 아니고 열두 사도가 아니라 누구예요?
천사들이 치웠어요.
그리고 천사들이 그 돌 위에 이렇게 앉아 있었다고 나오잖아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우리는 미사에 오면서도 걱정을 한 보따리씩 갖고 와요.
그 걱정거리가 이 미사 지향 안에도 다 적혀 있을 거고요.
이 안에 오로지 감사의 의미로만 지향하는 것은 몇 장이 있을는지 모르죠.
미사는 부활의 시간인데 매일매일 미사에 오면서도 걱정을 한 보따리씩 갖고 와요
하지만 실제는 오늘 이 부활의 시간, 이 자리에 찾아온 우리 앞의 돌은 이미 치워져 있어요.
부활의 시간인 이 자리에 찾아온 우리 앞에 강력한 초대는 우리의 염려를 이미 치워놓으셨어요.
여러분들이 이곳을 찾아올 때부터 그 염려는 이미 주님께서 해결해 주셨다는 걸 믿고 떠났어야죠. 그렇죠?
활짝 열린 무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이제 세상 걱정거리라고 하는 그 무거운 돌, 죄의식이라고 하는 무거운 돌은 생각지 말고 부활의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죄의식이라고 하는 무거운 돌은 치워졌으니 이제는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려고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로마서 6장 11절에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죠.
여러분들 ‘파스카’라고 하는 말 많이 들었죠.
파스카는 영어로 ‘pass over’, ‘거르고 지나가다’라는 뜻이죠.
파스카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려오기 위해 마지막 10번째 재앙에서 유래하죠.
10번째 재앙이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맏배, 짐승이건 사람이건 맏배들을 거둬가겠다 하시죠.
그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따로 알려줬죠.
죽음의 사자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죽은 양의 피를 문설주 상인방에 발라놓으면 죽음의 천사가 유대 땅을 돌아다니며 맏배들을 다 죽일 때
그 집은 패스 오버(pass over), 그냥 걸러서 지나가겠다 했습니다.
거기서 파스카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파스카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에요.
알파(Α)요 오메가(Ω)죠.
거르고 지나가다, 파스카는 역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윤리적이고 신비적인 의미를 지니죠.
조금 말이 어렵죠? 설명해 드릴게요.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 내가 방금 이야기했듯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를 지날 때 패스 오버의 사건이 있었어요.
그렇죠, 파스카의 사건이 있었죠.
그리고 우리 개인적으로는 뭐예요.
세례받을 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이 있는 상태로 지나는 어마어마한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윤리적으로는 죄지은 영혼이 참회와 고백을 통하여 악에서 선으로 지나갈 때 파스카의 신비 안에 있게 돼요.
마지막 신비적으로는 삶의 비참함 좌절감에서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기쁨으로 갈 때 파스카의 신비를 우리는 겪게 돼요.
이것이 바로 파스카예요.
역사적으로는 이집트에서,
개인적으로는 세례 받을 때,
윤리적으로는 우리가 참회와 고백을 통해서 악에서 선으로 넘어갈 때,
신비적으로는 영원한 기쁨을 향하여 좌절하고 비참한 마음에서 영원한 기쁨으로 갈 때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어려운데 안 어렵죠?
이 네 가지의 파스카 신비가 바로 신앙의 핵심이에요.
아멘
그래서 이제부터는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무거운 바위 생각하지 마시라 이거예요.
본인이 옮기려고도 하지 말아요, 오늘 복음에도 세 여자가 옮긴 거 아니에요.
누가 옮겨줬다고 그렇죠?
성령이 옮겨주시든 천사가 옮겨주실 거예요.
다만 얼굴을 돌려서 예수님을 바라봐야 해요.
다른 복음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었다고 그랬죠?
‘누가 우리 주님 가져갔어요.’ 그 울음은 자기 위주의 울음이에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울어요.
물론 인간적인 정 때문에 눈물은 나지만, 많은 경우에는 자기 위주의 눈물이야.
‘아이고 애 둘 놔두고 나 어떻게 살아?’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껏 의지하고 믿었던 예수님이 없어요. ‘나 누굴 믿고 살아야 해?’
그것 때문에 눈물이, 그리고 그 눈물이 가려서 예수님이 뒤에 있었는데도 못 본 거예요.
또 예수님 못 본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과 등을 돌리고 있었죠.
우리는 슬픔과 절망의 상태에 있으면, 환난 쪽으로 자꾸 어두운 쪽으로 가고, 커튼을 닫아걸고
문을 자물쇠를 잠그고 밖으로 안 나가고, 집 안도 컴컴하게 만들어요.
빛이 싫은 거예요. 환한 것이 게 싫은 거예요.
예수님이 뒤에 계셨는데도 자기 위주의 눈물을 두 번째는 예수님과 등을 돌리고 있는 것 때문에 부활한 예수님을 못 봤어요.
여러분들 마음 안에 무거운 바위 왜 없겠어요?
사제인 나는 없겠어요, 당연히 있어요.
하지만은 그것은 내가 옮기려고 해도 옮겨지지도 않아요.
힘만 들고 손톱만 다 부러져요.
이미 벌써 예수님께서 옮겨주셨다는 거 믿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사랑, 열정과 경탄, 환희와 기쁨,
찬미와 환호로 예수님과 함께 파스카 합시다.
바위가 앞에 가로막혀 있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건너갑시다.
파스카의 신비는 바로 건너가는 거예요.
우리는 과거 역사적인 파스카의 신비를 성경을 통해서 배웠죠.
아,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맏이들을 하느님이 살리셨구나!
그때 그 아이들을 대신해서 죽은 게 누구예요?
어린 양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부르잖아
예수님 혼자 돌아가심으로써 수많은 사람을 살리셨죠.
이집트 시대에 어린 양들이 이스라엘의 맏이들을 살렸듯이 예수님은 돌아가심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살았어요.
우리는 미사 때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부르고, 오래된 성당은 제대 밑에 어린 양을 조각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파스카의 그 날을 상기해야 합니다.
내가 세례받았을 때 깨끗했던 마음, 내 안에 성령이 지나가셨던 마음, 그때까지 지었던 모든 죄와 벌,
잠벌까지 사함을 받았던 아름답고 깨끗했던 세례받았던 파스카의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고백소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으면서 고백소 안에 주님이 계시고
그 주님이 바로 나를 악에서부터 선으로 이끄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므로
고백소에서 파스카 신비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 두려워할 필요 없죠.
‘이 힘든 세상에서 이제는 영원한 세상으로 주님 만나러 간다고 하는 파스카의 완결을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우리 신앙의 핵심은 파스카의 신비예요.
파스카의 신비, 그 파스카의 신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날 수가 있어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이 있는 게 아니죠. 매일매일이 부활절입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파스카 신비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지금 내 안에 있는 돌덩어리 이미 없어진 거 아시죠?
사라졌어요. 다 사라졌어요.
그러니 기쁘게 축제의 미사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2023년 주님 부활 대축일 (4/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