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고원지대에 있던 남베트남군 2군단의 예하부대들은 거의 와해되어 버렸으나 아직 싸울 수 있는 부대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퀴논(Qui Nhon) 북방에 남베트남군 22사단이 건재하였고 제1군단으로부터 3월 17일 나트랑(Nha Trang)에 상륙하여 21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북베트남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진출한 공수사단 예하 제3여단이 있었다. 또한 해안지역의 지방군과 민병대도 아직은 건재하였다.
3월 19일 제1, 2군단 지역을 순시하고 돌아온 키엠(Khiem) 수상은 제2군단장 푸(Phu) 소장의 교체를 티우(Thieu)에게 건의하였으나 이번에는 적당한 인물이 없어서 교체하지 못하였다.
트란 티엔 키엠
남베트남군 22사단의 41, 42연대는 퀴논 서쪽 빈케(Binh Khe)에서 북베트남군 3사단과 밀고 밀리는 접전을 3월 20일까지 계속하였다. 중부 고원지대에서의 패주 소식에도 제22사단 병사들은 끄떡없었다. 그것은 훌륭한 지휘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제22사단 예하 47연대도 탐콴(Tam Quan)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의 남하를 훌륭하게 저지하고 있었다.
3월 18일 푸봉(Phu Bon)에서 남베트남군 철수부대가 차단되었음을 확인한 둥(Dung)은 차후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미 북베트남의 전쟁지도 본부(정치국 중앙 군사위)는 남베트남군 1군단 지역에서도 이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도록 지시하였다.
둥은 예하사단들이 현재의 공격방향 그대로 공격을 계속하여 제3사단은 퀴논, 제320사단은 7번 도로를 따라 투이 호아(Tuy Hoa), 제10사단은 나트랑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군수지원상의 문제점은 없었다. 문제는 전투에 미숙한 병사들의 훈련이었다. 휴전 이후 보충된 많은 신병과 손실에 따라 보충되는 신병들의 훈련문제에 둥이 고심한 것은 그만큼 북베트남군의 전투력이 우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베트남의 전쟁 지휘본부는 전부터 양성해 온 점령지 치안담당 간부요원을 지역 점령이 예상될 때마다 현지에 파견하여 전투부대들의 점령지역 치안부담을 해소시켜 주었다. 또한 전투 간 남베트남군이 유기한 많은 전차, 야포, 차량 등을 수리할 수 있는 300여 명의 기술병, 정비병을 중부 고원지대로 보내었다.
빈케 지역을 돌파하지 못한 북베트남군 제3사단이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퀴논의 주요지역을 차단하기 시작하자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은 방어하고 있던 남베트남군 47연대를 포함하여 전 22사단 병력을 퀴논으로 집결하여 해상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남베트남군 제47연대는 철수 중에 푸캇(Phu Cat) 시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반 이상의 병력이 피해를 입자 연대장 레카우(Le Cau) 대령은 현장에서 자결하였다. 남베트남군 제22사단의 잔여병력들은 퀴논 시가지 남쪽 4마일 지점의 해안에 집결하여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해군 선박에 승선하여 붕타우(Vung Tau)로 4월 1일 철수하였다. 마지막 순간에 2~3천 명의 병력이 승선하지 못하고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도주한 병사들도 많았다.
사이공으로 향하는 붕타우의 피난민들
현재의 상황이 악화되지 않았고 철수한다면 다시는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철수를 거부하였던 제42연대장 구엔 후 통(Nguyen Huu Thong) 대령은 승선하지 않고 자결의 길을 택하였다. 분전했던 제22사단은 약 5,000여 명의 병력이 붕타우에 도착하였다. 모두 완전군장을 하고 있었다.
구엔 후 통 대령
북베트남군 제320사단은 4월 1일 투이 호아를 거의 무혈로 점령하였다. 그러나 제10사단은 칸두옹(Khanh Duong)에서 남베트남군 제3공수여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남베트남군의 최정예부대답게 공수여단은 잘 싸웠으나, 북베트남군이 보급로마저 차단하고 강력한 기갑부대를 집중하여 공격하자 4월 2일에는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2,000여 명의 병력 중 300여 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이미 나트랑의 혼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칸두옹을 공략한 기갑부대를 신속히 기동시켜 4월 2일 당일로 닌호아(Ninh Hoa)와 나트랑을 점령하였다.
나트랑은 이미 무방비의 도시였다. 피난민도 이미 떠났으며 비행장의 공황 사태도 끝났고, 지방군, 민병대, 경찰도 피난민과 같이 제각기 갈 길을 찾아 사라진 뒤였다. 대부분이 탈영병들이었던 2,000여 명의 죄수들이 교도소를 파괴하고 시내에서 약탈, 방화, 강간, 난사 등을 일삼으며 시내를 날뛰고 있었다.
나트랑이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된 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4월 4일 처자식을 찾아 나트랑 시내를 헤매던 남베트남군 포병장교가 북베트남군과는 조우되지 않고 길거리에 버려진 차량에 무전기가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을 보고 사이공 참모본부를 호출하여 자기가 나트랑을 재탈환하였다고 호기를 부렸다. 한동안 사이공이 술렁거렸다. 결국 확인팀을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나트랑 시내에는 이미 북베트남군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점령하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았고 이미 통과하여 사이공 공략에 투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 푸 소장은 4월 2일 18:00에 이미 예하부대와는 접촉이 불가능하다고 참모본부에 보고한 후에 공군기지에 방어편성을 하라는 참모본부의 지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4월 4일에 콩호아(Cong Hoa)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참모본부에 보고 후 저녁도 들기 전에 북베트남군이 나트랑에 쇄도한 것이었다. 이후 제2군단은 해체되었다.
팜 반 푸 소장
첫댓글 정작 열심히 싸운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자결하는 군인들 심정이 어땠을까요.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국전쟁때 자결한 지휘관이 별로 없더군요.
장미/없을수밖에요 3년싸우다 끝난 전쟁과 수십년 싸우다가 패하니까 그동안 쌓아올린 정성이 허탕이 되는걸 보면서 어떤 기분이였을지 비교가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