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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사로잡힘 14:1~12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5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롯을 구한 아브람 14:13~16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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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해설
[오늘의 말씀 요약]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의 네 왕이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다섯 왕과 싸워 이깁니다. 이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갈 때, 소돔에 거주하는 롯도 함께 사로잡힙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훈련된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 롯 가족과 재물을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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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포로가 된 롯(14:1~12)
약속의 땅 가나안은 강대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곳입니다. 동방의 네 왕들은 사해 남부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핑계로 가나안을 침입합니다. 대상들의 교역로인 왕의 대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반란과 관계없는
동요르단과 네게브, 즉 남방에 거하는 족속들도 공격합니다. 구약에서 처음으로 전쟁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약속의 땅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는데,
동방의 왕들이 종주권을 주장하며 나타난 것입니다. 반란의 주동이 된 도시는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애굽 땅에 견줄 만큼 비옥한 소돔과 고모라는 동방 왕들의 표적이 되었고,
이곳에 거주하던 롯은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이것이 약속 대신 현실을 택한 결과입니다.
● 묵상 질문
약속 대신 현실을 택한 롯의 결국은 어떠한가요?
● 적용 질문
현실이 아닌 약속을 선택하기 위해 미련 없이 포기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 아브람이 롯을 구함(14:13~16)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가나안 땅의 미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동방 4개국 왕들과
사해 남부 5개 도시국가들이 전쟁하는 동안, 아브람은 헤브론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롯이 끌려간 소식을 듣고 신속하게 대처합니다. 아브람은 약속을 무작정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을 대비해 종들을 무장시키고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아브람은 소규모의 군사이지만
효과적인 전술로 롯을 포함한 친척들을 구출합니다. 이는 빚 때문에 곤경에 빠진 친족을 가장 가까운 친척이
속량하는 제도(고엘)의 정신을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레 25:25~28, 47~53). 하
나님은 약속의 상속자 아브람을 통해 위기에 빠진 가나안 땅을 구원하십니다.
● 묵상 질문
아브람에게 318명의 훈련된 가신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어떤 면을 보여 주나요?
● 적용 질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내가 조금씩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약속 대신 현실의 쾌락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거룩한 통찰력을 주셔서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 선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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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2
하나님아버지, 오늘 이 땅에서 처음으로 너무나 큰 전쟁이 벌어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사로잡혀갑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아서 하나님의 지혜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말씀해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쉴 새 없이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전쟁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세상 전쟁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1. 쩐의 전쟁이다.
1절 2절 읽기도 어려운 왕의 이름들이 계속 나온다. 성경은 왜 이렇게 어려운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을까. 제가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이런 본문을 만나면 이런 말씀으로 어떻게 큐티를 하나 한다. 그러나 이름 하나하나에도 그 의미가 다 담겨있다. 오늘 1절과 2절에 전쟁을 일으키는 왕들의 이름들도 그렇다. 월신의 종, 두려움, 큰 불, 죄의 아들, 악의 아들 등등 그 이름만 보아도 딱 세상적이다. 그런데 남부의 다섯 왕이 왜 전쟁을 일으켰는가. 4절에 보듯이 이들이 십이 년 동안 북부의 맹장인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배반한 것이다. 잘 섬기다가 왜 배반하는가? 복종하다가 힘이 좀 생기니까 그게 싫다. 자기들끼리 뭉치면 대적할 수 있겠다 싶었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내가 가진 것 없으면 배우자고, 부모고, 윗사람에게 복종하지만, 돈이 좀 생기고 힘이 생기면 곧장 대적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전쟁은 다름 아닌 쩐의 전쟁이다. 그 끝에 다 돈이 있다. 부부간에 고부간에 형제간에 기업간에 나라간에 심지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그렇다. 각자 이권이 달려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지금 어떤 전쟁을 치르고 있는가? 그 끝에 결국 돈이 있다는 것이 인정되는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2. 오기로 싸우다 망한다.
5절~7절 북부의 왕 그돌라오멜은 반기를 든 남부의 다섯 왕을 물리치기 전에 먼저 주변의 족속들을 쳐버린다. 왜 그랬을까. 이 족속들이 남부의 나라들보다 더 약하니 본보기로 미리 친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남부의 왕들이 반기를 들려다가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는가? 8절에 소돔 왕을 비롯한 남부의 왕들은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친다. 그리고 9절에서는 북부의 네 왕이 남부의 다섯 왕과 맞섰다고 한다. 그런데 10절에서 곧장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났다고 한다. 치고받고 싸웠다는 얘기가 없다.
남부 다섯 왕이 싸움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참패했다는 것이다. 빨리 항복했으면 될 것을 오기로 맞서다가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도망간 것이다. 우리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죽는다. 큰 전쟁이 아니라 아주 자자란 문제를 가지고도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자초한다. 주일에 온 가족이 예배 잘 드리고 기분 좋게 점심까지 먹고 집에 오다가도 말 한마디 잘못 해서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갑자기 전쟁이 난다.
돌아서면 후회할 일을 순간 참지 못하고 이렇게 오기를 부리다가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왜 오기를 부리는가?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연약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으니 오기를 부린다. 내가 약한 걸 인정하면 오기 부릴 일이 없다. 전쟁이 일어날 일도 없다. 10절에서 남부의 군사들이 싯딤 골짜기에 있는 역청 구더기에 빠진 것도 그렇다. 이 역청 구더기는 남부에 있는 것이어서 남부의 왕들에게는 이로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패배하는 원인이 된다.
여러분은 어떤가, 내 장점만 믿다가 실패한 일은 무엇인가? 내가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것은 무엇인가? 그런 오기를 부리다 오히려 손해를 본 적은 없는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3. 그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이 된다.
12절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한다. 이렇게 쩐의 전쟁, 오기로 싸우다가 처참히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 롯이 있다. 지난 13장에서 아브람과 롯의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14장에 전쟁 기사가 나오고 12절에 갑자기 롯이 언급된다. 왜인가. 약속의 땅에서 살아야 할 자식 같은 롯이 소돔의 쾌락에 깊게 빠져들었으니 이제 하나님이 롯을 손보실 차례라는 것이다. 롯이 너무 못 내려놓으니까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켜 그 재물까지 노략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롯 때문에 롯의 구원을 위해 일으키신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람과 등을 돌리고 소돔으로 간 롯이 망하는 것을 보고 거참 잘됐다, 샘통이다! 한다. 그러나 롯은 결코 남이 아니다. 내 자녀이고, 내 부모 형제다.
남편이 망하고 자녀가 가출하고 부모 형제가 쓰러져도 거기에 내가 연류되어 있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이 전쟁 속에 있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내가 눈물 흘리며 기도하면 그 전쟁터는 곧 구원의 장소가 된다. 그 전쟁터에도 천국이 임한다.
적용질문, 지금 내 배우자, 내 자녀, 내 부모형제가 치르고 있는 전쟁은 무엇인가? 내 가족이 치르고 있는 실직과 불합격, 질병의 고난 가운데 내가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는가? 그 한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쩐의 전쟁이다. 그 끝에 돈이 있다. 오기로 싸우며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 모든 전쟁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다. 그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이 된다. 오늘 말씀도 그렇다. 표면상으로는 북부 왕들과 남부 왕들이 싸웠지만 이 전쟁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소돔에 빠진 롯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세상 왕들은 그저 수고만 했다. 내가 예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나를 망하게 하신다. 이걸 아셔야 한다.
하나님아버지, 지금 집 안에서 직장에서 나라 안팎에서 무슨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우리를 은혜로 불러주시고 이 전쟁의 근원을 해석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전쟁 뒤에 돈이 있고 오기로 싸우며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전쟁의 목적이 오직 구원때문이라고 하시는데 그럼에도 날마다 집안에서 직장에서 나라 안팎에서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배반을 하고 그 알량한 역청 구더기만 믿고 오기를 부리며 피 흘리는 전쟁을 치릅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이 시간 마음 안에 있는 원망과 배신과 복수의 마음들을 다 내려놓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마다 이기고 이기려고 쳐놓은 진들도 다 허물기 원합니다. 이제는 이 모든 가정과 직장과 나라 안의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으로 선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부터 눈물 흘리며 기도함으로 이 모든 전쟁터가 구원의 장소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이 나라를 살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내 죄 때문에 회개하는 한 사람을 세워주시옵소서.
1. 롯을 찾아오다 (13-16절)
318명에 불과한 아브람의 기병(騎兵)과 북쪽 네 왕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전쟁을 한다. 아브람은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면서 여전한 방식으로 주변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강력한 동맹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 318명이 겉보기에는 이름 없는 기병이지만, '공동체에서 잘 훈련된 그들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군사'였다. 아무리 초라한 곳에 있더라도 주어진 환경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지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며 말씀으로 무장한 공동체'를 이룬다면, 힘든 사람이 잦아와 도움을 청할 때 '세상을 함께 이겨내는 군대가 될 것'이다. 내가 세상에 사로잡히고 빼앗긴 것이 있다면 말씀 동맹 공동체에서 훈련되어야만 회복할 수 있다.
●나에게는 고난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며 힘든 싸움을 말씀으로 같이 싸워줄 믿음의 공동체가 있는가? (13-16절)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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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체 12년 동안 주인 행세를 했어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권력이란 곧 없어질 연기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에 왕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징계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함입니다(로마서 13장 3~4절). 그러나 세상의 권세자들은 오히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죽이고 빼앗는 데 혈안이 되어 전쟁을 일삼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를 가르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들의 탐욕과 불법 행위들을 바라보며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내야 할 삶의 원리들은 무엇입니까?
13-16절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심으로 ‘약속의 땅’을 다스릴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 보여주십니다. 아브람은 동방 왕들이 가나안에서 약탈한 모든 것을 회복합니다. 롯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사병 318명과 자신과 동맹한 자들을(24절) 데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그들이 약탈한 모든 것을 빼앗고 롯뿐 아니라 포로로 잡힌 모든 이를 구출합니다. 가나안의 왕들은 자기 치부를 위해 싸우고 제 백성을 희생시키지만, 아브람은 자신을 희생하여 싸우면서도 전리품 하나조차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전체 힘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 나라에 참 평화는 없습니다. 사해 인근 나라들이 오랜 세월 쥐 죽은 듯 섬긴 종주국과의 전쟁을 각오했다는 것은, 종속국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사해 인근을 침략한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은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반기를 든 속국들을 일거에 제압합니다. 종주국에게는 통쾌한 응징이고 당연한 보복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힘의 원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결코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어제의 원수들이 동맹을 맺을 수도 있고, 약하고 힘이 없어 위협이 되지 않는데도 온갖 명분을 붙여 압제하고 섬기기를 강요합니다. 혹시 우리의 평화를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힘의 논리를 지지하지 않는지 돌아보십시오.
12절 아브람과의 작은 분쟁을 피해 소돔 땅으로 이주해왔지만, 오히려 큰 분쟁이 롯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보다 풍요의 땅을, 하나님의 언약보다 자기 판단을 신뢰한 결과, 롯에게 남은 것은 참혹한 실패와 부끄러움뿐이었습니다. 내 판단과 선택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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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전체 동방의 왕들과 가나안 왕들의 전쟁으로 롯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가나안의 다섯 왕들이 동방 왕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자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쟁에서 그돌라오멜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의 왕들이 승리합니다. 그 결과 소돔에 거주하던 롯이 포로로 잡히고 재물도 약탈당합니다. 전쟁은 이해관계에 있는 이들뿐 아니라 제삼자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힘없는 백성이 고통당하고, 패한 쪽의 백성은 살육과 노략의 대상이 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국가와 지역, 민족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또 나와는 상관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런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전체 전쟁은 아브람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거친 산간 지방인 헤브론으로 이주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때(13:18)에 일어났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곳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며 보여주신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며 믿음으로 받은 땅이지만, 전쟁과 노략이 그치지 않는 분쟁의 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곳으로 부르시고, 그 땅에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의 약속은 우리가 감당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보내신 곳이 늘 평화롭고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일구고 경작할 때 우리에게 주신 땅이 ‘복’이 될 것입니다.
12절 롯은 보기 좋았던 땅 근처에 머무르다 결국 그곳에 거주합니다. 그 땅은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탐나는 땅입니다. 그래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쉽고 편합니다(마 7:13).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보기 좋은 땅이 아니라 척박하고 메말라서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가서 그 땅을 일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치와 기준에 부족하여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들이 있는 곳, 그래서 더욱 섬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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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6 가나안 땅의 미래 주인
아브람이 애굽에서 돌아와 그들의 소유가 많아 조카 롯과 동거할 수 없었다.(13:6)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3:9)하며
소돔과고무라동편으로 옮기고 서로 떠났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 땅에 최초로 연합군의 전쟁이 일어난다.
성경에 마지막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전쟁은 싯딤 골짜기 전쟁이였다.(3)
시날왕 연합군과(1) 소돔 왕 연합군이(2) 싯딤 골짜기에서 싸웠다.(3)
전쟁의 원인은 12년 동안 조공을 바치다가 13년째에 배반을 했다.(4)
그래서 14년째 되는 해에 지금 연합군 전쟁이 일어났다.(5)
전쟁은 지형 지물을 잘 알고 있던 소돔 연합 군이 패한다.(10)
싯딤 골짜기에 역청 구덩이가 있는 것을 소돔과 고모라 왕이 훨씬 잘 알았을텐데
결과는 오히려 참패를 하게 되었다.
모든 재물과 양식을 다 빼앗기고(11)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히고 그 재물도 다 노략질을 당했다.(12)
소돔과 고모라는 자기 집 앞 마당에서 싸움을 했는데 왜 졌을까?
많은 전쟁터가 있을 수 있는데 왜 소돔 땅이 였을까?
왜 롯이 사로잡히고 그 재물을 다 노략질 당했을까?
우연히 일어 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느껴진다.
세상에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우연히 일어나는 일 같지만 섭리가 있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있다.
죄악으로 관영한 땅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경고 이기도 하고
인간적 물질적 불신앙적인 관점에서 세속적 이기적인 선택을 한
조카 롯에 대한 징벌이기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선택한 결과는 언제나 이렇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치시는 것 같다.
하나님의 약속 대신 현실을 선택한 자의 결국은 이렇다.
가까운 친척 가운데 결혼에 대한 상담을 해 온다.
이런 저런 조건을 이야기 한다. 한 참을 들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 온다.
한 마디만 대답해 주었다. 그 청년의 신앙생활은 어떠하냐고?
세상적인 조건은 화려하지만 인간의 욕심따라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잘 선택하라고 만 알려 주었다.
롯 처럼 선택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조카 롯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아브람이 듣는다.(14)
아브람의 행동이 놀랍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보다 더 신속한 작전을 진행한다.
자기 집에서 기른 훈련된 병사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추적한다.(14)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15)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부녀자들과 모든 사람들 다 찾아 온다.(16)
아브람은 어디서 이런 담대한 용기가 있었을까?
자기 집에서 기른 병사가 318명이면 얼마나 큰 거부 였을까?
야간 기습 공격의 전술은 누가 가르쳐 주셨을까?
조카 롯을 사랑하는 아브람의 마음이 이런 용기를 내게하지 않았을까?
시날 왕을 포함한 동맹군에 대항해서 개인이 싸움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이지 않았을까?
자기 생명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행하게하는 사랑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지 않을까?
이것이 목자의 마음이지 않을까?
이것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지 않겠는가?
오늘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한다.
그 크신 은혜에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린다.
하나님 아버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선택한 자의 모습을 봅니다.
약속과 말씀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상식과 인간적이요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결과들이 어떠한가를 봅니다.
믿음을 따라 약속을 따라 말씀의 기준을 따라
선택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지혜를 부어 주옵소서.
조카 롯을 사랑하여 생명까지도 거는 아브람의 사랑을 봅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싸움인 것 같지만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아버지의 마음은 영원한 사랑이심을
다시 한 번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조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생명을 거는 아브람의 용기
나도 배우기 원합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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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나안 땅에서 벌어진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벌이는 전쟁이었습니다. 12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서쪽 연합군들(소돔 왕 베라, 고모라 왕 비르사, 아드마 왕 시납, 스보임 왕 세메벨, 소알 왕 벨라)이 배반하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동쪽 연합군들을 모아 서쪽 연합군들을 징벌하는 전쟁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성을 차지하여 자신의 권세를 보여주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잡기 위하여 배반을 하고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징벌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분쟁과 다툼 속에 아무런 이유 없이 연관될 때가 있습니다.
소돔에 정착했던 롯은 전쟁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단 지역의 풍요로움을 따라 움직였던 롯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었던 소돔에 거했기 때문에 세상의 분쟁과 다툼에 더 쉽게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롯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롯이 아브라함의 손으로 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롯이 구함을 받은 이유가 아브라함의 용맹했기 때문일까요?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전쟁에 승리한 이유가 자신이 아브라함의 방패요, 큰 상급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롯을 구하셨을까요? 롯은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을 동쪽 연합군으로부터 구함으로써 가나안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쪽 연합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롯처럼 세상의 포로가 되어 근심과 유혹에 빠져 헤매는 우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사람으로 동쪽 연합군을 쳐부수고 롯을 구한 것은 기드온이 300명으로 미디안 족속을 쳐부순 것과 같이 기적과 같은 승리입니다. 이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승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하나님 백성들을 사망 권세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승리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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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휘말린 롯(14:1-12절)
우리가 무엇을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할 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적당히 어깨너머로, 혹은 눈대중으로 적당히 흉내 낸다는 의미입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은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기에 내 몸이 편 한대로 내 생각이 편 한대로 재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기류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류가 굳어지면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는 잘못된 습관이 됩니다. 그것이 운동이든 사고방식의 문제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적용될 때 어깨너머 신앙이 됩니다. 어깨너머 신앙이란 성도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감에 있어서 올바르게 복음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출석하는 날부터 수많은 세월을 어깨너머로 배워서 생긴 신앙을 말합니다. 이런 신앙은 예수 믿고 구원이라는 근본 원리에 있어서는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내용을 파고 들어가 보면 내 생각에다가 기독교 신앙의 색채를 약간 혼합해 놓은 이상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롯의 신앙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롯이 소돔을 택해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실 소돔은 롯의 눈에 여호와의 동산처럼 보였는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곧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실 만큼 죄악이 관영한 땅이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그곳이 학군이 좋고 생활이 편해도 얼마 살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깨너머 신앙의 사람들은 그런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가 거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문에 앉을 정도로 위치까지 꿰찹니다. 이것은 소돔 사람과 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소돔화 된 것도 아닙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성문에 앉는 권한은 주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롯은 그들에게 이방인이요 섞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윤리관이 그의 삶을 아직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깨너머 신앙은 복음의 선명한 기준을 처음부터 알기를 원치도 않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마음으로 옳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세상 어디를 가도 잘 섞입니다. 좋지 않은 방법으로 지위도 얻습니다. 세상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 아니냐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좀 더 발전하면 적당한 자선과 선행으로 그런 죄책감쯤은 충분히 보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깨너머 신앙은 교회에서는 늘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관전자의 입장을 취하지만, 세상과는 잘 섞이는 특성을 갖습니다. 원래 성도는 세상에서 구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어두움의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부른 사람들입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과 어두움을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깨너머 신앙의 소유자들은 오히려 세상이 더 편합니다. 잘 섞입니다. 교회가 불편할 뿐입니다. 예배도 찬송도 다 불편합니다. 억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롯은 스스로 경건 생활을 꾸려갈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그로하여금 세상과 섞이는 일에 대한 부담을 주지 못하는 신앙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소돔은 견디기 힘든 타락한 세상이 아니라 그런대로 함께 살아갈 만한 좋은 곳이었습니다. 세상과도 잘 섞이는 신앙이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신앙은 맛잃은 소금과 같아서 종래에는 세상에 짓밟히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롯은 세상정신에 충만해서 냉정하게 계산한다고 계산하고 아브람의 곁을 떠나갔지만, 결과는 그가 생각한 것처럼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롯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롯은 빠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더 잘살아보겠다고 더 많은 재산을 일궈보겠다고 나선 길이 그냥 그 인생을 끝내는 결과를 초래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꼭 죽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롯은 평생 노예가 되어서 살아야 할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생각하면서 거기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동산 같다던 그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11절에 의하면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갔습니다. 12절에는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아서 그 재물까지 노략질해 갔습니다. 뭡니까? 알거지가 된 것입니다. 뭐 알거지가 된 것이야 다시 노력해서 복구한다지만 필경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노예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뭡니까? 롯은 원래 소돔 주민이 아니었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한 결과 그들과 동류로 취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믿음에 관한 문제를 살피고 지나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삶에서 세상에 관한 부분을 포기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롯은 소돔 성의 상황이 자신이 느껴 온 자신이 겪어 온, 그리고 믿어 온 신앙에 비추어 잘못되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곳이 제공하는 편안함, 안락함, 쾌락, 육체의 즐거움이 좋아서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그는 더욱 깊숙이 그곳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게 어깨너머 신앙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소돔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아예 체질에 맞지 않아 금방 나온던지 이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소돔이 주는 즐거움보다 말씀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깨너머 신앙의 소유자들은 그냥 그렇게 엉거주춤 섞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소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도도 아닌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롯에게 한 가지 축복이 있다면 믿음의 원리대로 살기 위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작은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롯이 떠날 때 그 삶의 방식이 싫어서 떠났지만, 그 작은 아버지의 신실성이 결국은 롯 자신을 구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롯이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될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이 그 자신의 선택이며 그 선택의 결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롯이 그렇게 된 사실을 13절에 의하면 도망한 사람이 와서 아브람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롯과 연관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부러 아브람에게 올 리가 없습니다. 본문은 친절하게 가나안 사람과 구분하는 말로 히브리 사람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자, 이제 선택의 문제는 또다시 우리의 주인공인 아브람에게로 넘어왔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거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이 설명합니다. 본토 사람들과 동맹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집에서 길리운 가신들이 318명이었다는 말은 거느린 식구들이 도대체 얼마라는 말입니까? 아브람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거부가 되어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비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브람과 함께 하란을 떠났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람이 느꼈을 허탈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의지할 데 없는 조카를 참 어쩔 수 없어서 거뒀습니다. 자신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길을 함께 데리고 떠나왔습니다. 정말 기근이 들어서 먹고 사는 일이 갑갑할 때도 이 조카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 조금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애굽에서도 이 조카 롯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가 애굽에서 나와 돈이 좀 모여지자 자신의 사랑과 신뢰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저만 잘살아보겠노라고 좋은 땅을 택해서 떠나 버렸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얼마나 소돔에 머물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소식 한 장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껏 들려온다는 소식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의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객관적 상황은 아브람이 좀 거부가 되기는 했어도 상대는 네 도시국가의 연합군입니다. 이미 전쟁도 치러본 군인들입니다. 자신의 가신들은 전쟁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롯의 계산 방식으로 하면 이런 상황은 재고의 여지가 없는 상황입니다. “어쩌겠습니까? 자신이 선택한 길인 것을 말입니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롯을 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죽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산사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에그 그 녀석 당해 싸지 뭡니까? 그렇게 은혜를 배반하고 떠나더니 결국 그 모양이 되었군요.”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는 이런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브람은 어려운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저는 이렇게 어려운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작 아브람 본인은 고민할 시간조차도 아깝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구하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이고 뭐고 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카가 고통당하고 있을 생각을 하면 말입니다.
사실 아브람은 이미 조카 롯을 그렇게 아름답게 떠나보낼 때 현실보다 더 큰 사랑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조카 롯을 서운한 마음이나 불편한 마음을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축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롯보다 훨씬 큰마음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게 어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 속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롯이 잡혀간 상황에 무슨 괘씸하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이 떠오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의 그런 행동을 이미 그때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따라서 지금 롯의 소식을 전해 듣자 앞 뒤 계산할 겨를도 아까워서 무조건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롯이 포로로 잡혀 있는 곳은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서 무려 180Km나 떨어져 있는 단이었습니다(14절). 뭐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좋았던 사회도 아니고 그저 그대로 포기하기 적당한 구실도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모든 좋지 않은 조건들을 개의치 않고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곧바로 행동에 들어갑니다. 아브람은 이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엄청난 손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컷던 것입니다.
왜 성경은 이 사건을 여기 이렇게 크게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단순히 조카 롯을 구출하는 사건, 즉 혈육의 문제라면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창12~24장까지는 아브람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으로 훈련되어가는가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훈련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역시 우리는 믿음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조카 롯을 생명을 걸고 가서 구출하는 아브람에게서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어떤 점을 볼 수 있습니까?
사실 아브람은 이미 롯이 떠날 때 롯을 용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롯을 구출하면서 아브람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연약한 롯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다음 사건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삽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빚어지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럴 때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며 용서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 용서를 바탕으로 자신을 배반했던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생명의 값을 지불 할 용의를 갖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용서는 항상 손해 보는 선택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지체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소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함께 짐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조카 롯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구해야 할 친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족이라고 해서 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원리를 따라 훈련되어가는 아브람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시작과 끝이 믿음의 원리를 따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략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한 것은 아마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뒷날 아브람이 이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이 작전은 대단히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아브람이 용서의 삶을, 손해 보는 선택의 삶을 훈련받고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14장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아브람이 믿음의 원리를 따라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장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원리는 삶을 관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무엇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념적인 것도 아니고 마음의 위안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삶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믿음의 원리를 따라 성장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의 원리를 따라 용서와 손해 보는 선택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깨끗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그 믿음이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시류나 이익을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리를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추격해 가서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하는 일은 냉정하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이 믿음의 원리가 그것을 하라고 할 때 기꺼이 순종할 의지를 갖는 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롯에게서 어깨너머 신앙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도적인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스스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시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와야 할 소돔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타협해야 할 상황에서 타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깨너머로 따라 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스스로 결단하고 주도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