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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의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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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2/10/27 작성자: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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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의 비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usan.kbs.co.kr%2Fbbs%2Fsystem%2Fdb%2Fk_ulsancol4%2Fupload%2F21%2F%EC%84%A4%EC%95%85%EC%98%81%EB%9E%91%EC%B5%9C%ED%98%B81.jpg) (위의 사진은 속초시 영랑호의 일몰 모습, 뒤쪽 능선은 설악산. 좌측 고봉이 대청봉임)
"영랑호의 비밀"
속초시의 영랑호는 속초의 명승지로서 그 아름다운 자연은 설악산과 함께 영원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지금은 도시 속의 석호 호수가 되었지만 자연이 남아 있던 시절은 아름다움이 지금 보다 훨씬 더 했을 것이다.
영랑호에 대해 기록한 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간성군(杆城郡)편을 보면, 산천조에,
"永郞湖在郡南五十五里 영랑호는 고을 남쪽 55리에 있다 周三十餘里 주위가 30여리인데 汀回渚曲 물가가 굽이쳐 돌아오고 岩石奇怪 암석이 기괴하다. 湖東小峯來入湖心 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호수 가운데로 뻗었는데 有古亭基是永郞仙徒 遊賞之地 옛 정자터가 있으니 영랑 무리가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
라고 했다.
간성군은 고성군에 속해지고 다시 국토분단으로 나뉘면서, 어촌이던 속초가 시로 발전하면서 영랑호는 도심의 호수가 되었다. 신라시대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영랑(永郞)이 찾아온 그 시절 바닷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바닷가에 해당화는 피었고 끝없이 잔디밭이 펼쳐지고 백사청송(白沙靑松)의 솔밭에는 아름다운 새소리가 파도소리와 한바탕 어울렸다.
세월이 흘러 영랑의 무리는 간 곳 없고 영랑은 호수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상기 기록과 오늘의 영랑호를 비교하면, 오늘의 영랑호는 둘레가 5킬로미터(약 10리여)에 불과하다. 조선초기의 영랑호는 '周三十餘里'로 지금보다 두 배이상 긴 약 12킬로미터의 둘레이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의 영랑호의 크기는 절반 크기로 줄었다.
그러면 신라때의 영랑호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영랑을 서기 6세기의 인물로 볼 때, 1,500년전의 영랑호는 지금보다 3~4배의 크기였다. 상기 기록에 '湖東小峯來入湖心(호수 동쪽 작은 봉우리가 호수 가운데로 들어 갔는데...)'의 소봉은 오늘의 영금정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육지화된 속초시 중앙동과 동명동 일원이 당시에는 영랑호 호수였음을 이 귀절이 알린다. 영랑은 아름다운 영금정 일원지역의 바위에서 낭도들과 함께 놀았던 것이다.
동해안에 전해오는 전설속의 신라 4선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祥)이다. 이 네 화랑은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구전으로 전해왔고 조선시대 초기 기록으로 옮겨졌다. 이들이 화랑세기에 등장하지 않음은 사선들이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라벌 왕실과 교유하고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세하던 풍월주 급은 아니었다.
화랑의 계급은 상선(上仙, 은퇴한 풍월주, 고문급) 풍월주(風月主) 부제(副弟) 낭두(郎頭) 낭도(郎徒) 순인데 4선은 낭두급이었다. 낭두로서 산하의 낭도를 이끌고 동해안의 절경지를 찾아간 것이다.
4선의 낭도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이 여자들을 유화(遊花)라고 불렀는데 실제는 낭도의 아내들이었다. 모계시대의 유풍이 남아 여자들의 성적인 지위가 높았던 신라시대였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유화는 자신의 남편이외에, 남편들이 모시는 낭두들과 '예를 갖추지 않은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이는 집단교혼(集團交婚)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祥)의 네 화랑은 풍월주가 아니었으나 서라벌 젊은 남녀들의 높은 인기와 신망을 받았던 서기 6~7세기의 유명한 화랑들이었음이 확실하다.
영랑의 생존연대를 언제로 볼 것인가? 지금의 북부동해안이 완전한 신라의 땅이 된 것은 진흥왕 때이다. 진흥왕 29년(568년)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면에 황초령순수비를 세우고 동년10월에 이원군 동면에 마운령순수비를 세우면서 동해안이 완전 신라땅으로 평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랑은 6세기 말과 7세기 초의 인물로 봐야 한다.
화랑 영랑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백률사(栢栗寺) 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에서는 안상(安祥)을 준영랑(俊永郞)의 낭도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영랑(永郞)의 낭도(郎徒)에는 오직 진재(眞才), 번완(繁完) 만이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그 역시 내력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世謂安常爲俊永郞徒不之審也永郞徒唯眞才繁完等知名皆赤不測人也)」
국보 147호인 울산 천전리서석(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소재)에 『戌年永郞成業』(영랑은 술년(戌年)에 성업(成業)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술년이 어느 해인지 불확실하다. 풍월의 화랑도를 깨쳐 성업한 곳이 울산의 천전리서석임이 확실할 뿐이다. 영랑이 신라산천을 주유하고, 명승과 절경을 구경하며 유람하는 유상(遊賞)을 했는데 울산 천전리서석으로 돌아와 성업한 것이다. 당시 영랑은 유명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사람은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다. 영랑은 그의 젊은 시절 낭도들과 함께 세상을 순회하고 명승지에서 수도하여 스스로를 키웠다. 그는 이 천전리서석에 돌아와 마침내 그토록 바라왔던 도를 깨친 것이다. 화랑을 선랑(仙郞)이라고도 하듯 영랑은 선도(仙道)를 깨우친 것이다. 속초 영랑호와 울산천전리 서석 간의 가깝지 않은 천여리 거리를 내왕한 영랑과 그 무리들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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