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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불법사찰에 웬 중놈이 사나 했더니..." |
언론정보학회, 명진 스님께 길을 묻다 |
"불교가 얘기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벗어나는 겁니다. 하지만 어디로부터 무엇을 벗어나야 하는 걸까요?"
명진 스님이 던진 화두에 언론 관련 학과 교수와 기자 등 참석자들은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불교 용어인 화두(話頭)는 수행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가고 의구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다. 스님의 답도 '모른다'였다.
"모든 화두는 결국 '모른다'는 대답으로 귀결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알려고 애를 쓰지만, 알려고 하면 할수록 결국 모를 수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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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의 상기와 같은 엉터리 설법은 비록 명진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불교가 붓다 본래의 설법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을 지적한 칼럼이 있습니다.
노하우업에서 복원시킨 [류가미의 환상여행] 시리즈에서 류가미님이 바로 저러한 오류를 정확하게 이미 오래전에 지적하였습니다.
▼ 노하우업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knowhowup/Dnrv/34
(33회) 동북아 ⑩ - 선종, 격의불교 인가 교외별전 인가? /
~상략~
선종에서는 무를 공(空)과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색(色)은 유가 됩니다. 이 논리를 그대로 ‘체용론’ 에 적용하면 공은 용(用)이 되고 색은 체(體)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도가에서 체용론을 가지고 왔으면서도 때론 즐건독자님처럼 원래의 체용의 개념을 잊고 체를 실체나 본질이라는 뜻으로 용을 실존이나 현상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을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통일 신라 말기 이후 선종이 힘을 얻은 후부터, 우리나라 불교는 사실상 ‘선불교’ 였습니다. 때문에 선종의 장단점은 우리 불교의 장단점이기도 합니다.
선종의 장점은 그것이 일상적인 삶과 밀착된 민중적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선종의 단점은 원래 불교가 가지고 있던 ‘초월성’ 을 상실했다는 것과 문자를 부정함으로써 무지함이 자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불교는 초월의 종교가 아니라 평상심(平常心)이 곧 깨달음이라는 생활 종교가 되어버렸고, 자기 종교의 교리도 제대로 모르는 스님들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옛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민중들에게 낯선 나라의 종교를 자기 나라 식으로 쉽게 설명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더 이상 장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고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이 아니라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불경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근본불교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사실 지금은 근본불교의 경전을 읽고 그 참모습을 살피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시간을 내서 서점에 가면 됩니다. 더 간단히 하고 싶다면 인터넷으로 주문만하면 됩니다.
사실 선종에 대한 저의 비판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분들이 계셨을 겁니다. 불교의 종파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화 발전합니다. 선종은 그 당시 중국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형성된 종파입니다.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상황과 처지에 맞게 새로운 종파가 생겨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겁니다. 옛날 석산 화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 백 척 되는 장대 끝에서 어떻게 걸어 나갈 것인가? 옛 어른들께서는 백 척 되는 장대 끝에 앉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참경지에 들지 못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백 척 되는 장대 끝에서 앞으로 나아간 다음에야 온 세계가 자신과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어쩌면 선종은 불교의 정상, 백척간두(百尺竿頭)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석산화상의 말대로 백척간두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종의 정신 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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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줍잖게 중국한자 언어체계인 도가' 와 믹스 되버리면서, 붓다 본래의 설법과는 완조니 180도 정반대로 나가버린게 한국선종 입니다.
그야말로 " 모르는게 자랑이다 (?)" - 가 되어 버렸습니다. 붓다가 탄식할 일입니다.
중국식 불교인 '선종' 이 왜 요꼬라지가 됬느냐? 크게 2가지 입니다
1. 첫째 사유- 언어 입니다:
류가미님도 지적했듯이 붓타의 팔리아어를 중국식 한자로 번역및 해독한다는 게 보통 해골 복잡한게 아닙니다. 해골만 굴려가지고도 물론 안되는 것이구요 수행이 따라야 해골도 터득하는 겁니다. - 이른바 불립문자 -이거 땡중들은 엄청 편한 핑계죠. 해골 복잡할 것 없이 그저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2. 둘째사유 - 무림사회와의 공존 때문입니다.
'교종' 스님들은 사사건건 가르치려 들고 깐깐하게 굽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싸가지가 바가지' 죠. 이러니 성질 급한 무사들 칼날에 모가지가 열개라도 남아나질 않습니다. 근데 선종 스님은? 직설을 하지 않습니다. 알듯 모를듯~? 선문답' 입니다. 이거 뭐 해석하기 나름이고, 일본의 단가 하이꾸처럼 짧고 굵은 멋이 있습니다. 이게 생사를 초극하는 무사들에게는 일종의 운치 있는 초극의 겉멋(?) 처럼 용인되는 겁니다.
즉- 살생을 밥먹듯 하는 무사지배 사회 vs 살생을 금기하는 중들이 알콩 달콩 사이좋게 공존하는 방식이 '선종' 입니다.
선종이 널리 전파된 시대 및 사회배경은 각각, 중국의 무림시대, 고려의 무신의 난, 일본의 전국시대 입니다.
종교란 결국 그 시대의 권력이 필요해서 정착된다는 철칙은 선종에서도 어김없는 사례 입니다.
- 종교란 그 자체가 권력의지이다 - 아프로만 어록
각설하고, 명진의 말중에,
무지가 자랑이다 - 이것과 함께 또하나 지적할 점이 뭐냐면,
" 그는 또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 이 대목 입니다.
진실은 없다? - 그렇다면 이말에도 진실은 없다 - 가 되는 겁니다. 이거 전형적인 '순환오류'죠.
중국 장깨들이 붓다를 왜곡해서 다 베려놓은 걸 줏어온게 현재의 한국 선종입니다.
이것은 공(空) 이라는 것을 없을 무 ( 無)로 직역한 무지의 소치인 겁니다.
이러니 무지가 자랑이 된 겁니다.
오마이뉴스 상기 기사에 나오는 명진의 설법이 무슨말 하려는 것인지는 물론 압니다. - 상대성을 배려 하자- 는 얘기지요. 절대성으로 억압하지 말라- 는 취지 입니다. 그렇다면 설법을 제대로 해야지 저렇게 - 모르는게 자랑이다 - 식으로 엉터리 표현하면 저런 땡중 되는 겁니다.
진실과 진리, 상대성과 절대성의 명제는 저 나름대로 아래와 같이 정의하면 된다고 봅니다.
* 절대성? = '인정영역' 입니다, * 상대성? = '존중 영역' 입니다.
어때요? 명확하자나요? 서로 충돌도 없습니다.
간단명료 하자나요? 아니 도대체가 왜 헷갈리는 거야?
" 절대성을 인정하라 그러나 존중은 별개다, 상대성을 존중하라 그러나 인정은 별개다- 아프로만 어록 "
글쓴이: 아프로만 / 2012.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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