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소금> 다시 쓰는 키워드 단상 변증, '천국에도 내가 좋아하는 숭늉이나 누룽지가 있을까?'
천국 식탁
하나님이 만드신 수박, 참외, 홍시 같은 과일이 얼마나 맛있는지. 어떤 건 향취만으로도 고급져 먹고 있으면 천국 식탁에 걸터앉은 듯하다. 이렇게 천국의 모형인 지상에서 때마다 하나님의 빈틈없는 원조를 받고 살다가 적성에 안 맞는 컴컴한 감옥에 갇혀 살려면 준비운동이라도 단단히 해둬야 한다.
천국의 질서
세상사람들은 이웃사랑을 위한 여러 직업들을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의 질서를 열심히 배우고 향유한다. 정치를 하거나 물건을 만들어 팔고 사거나 노래를 짓거나 영화를 찍거나 축구를 하거나 여행객을 돕거나 맛집을 운영하는 게 다 천국생활의 모형이다. 구원을 모르면 들러리로만 끝난다는 게 아쉽지만.
희미한 모형
천국에 있는 직업의 종류에 비하면 이 땅의 직업들은 아예 없는 것과 같다. 사탄은 사람들이 천국을 추상적인 곳으로 여기게 만들어 진짜 세상인 천국 대신 희미한 모형에 불과한 이 땅만 보게 만든다. 일과 휴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룰 천국의 문명에 비하면 이 세상은 쓸데없이 너무 바쁘거나 무료하다.
모든 좋은 것은 다
천국에도 내가 좋아하는 숭늉이나 누룽지가 있을까? 내가 믿기로 죄나 사망과 관련된 것 말고 이 땅의 자연과 문명을 포함해 모든 좋은 것은 천국에도 다 있을 것이다. 천국을 구름 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하는 비현실적인 곳으로 여길수록 잠깐뿐인 이 땅의 것들에 현혹되기 쉬워 영원한 실체를 바로 눈앞에서 놓친다.
진짜 기쁨
모든 사람의 삶의 목적은 '기쁨 누리기'다. 그 기쁨을 한 부류는 하나님 없이 그분이 만든 피조세계에서, 또 한 부류는 하나님 안에서 얻으려 한다. 모든 죄는 기쁨을 어디서 구하느냐로 파생된다. 거짓말, 도둑질, 성추행도 다 자기 기쁨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억지스러운 몸부림이다. 진짜 기쁨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다.
말로 다 표현할 감성
천국에서 성도를 기쁘게 하는 것들 중에 지구와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동식물의 세계도 있겠지만, 한없이 깊고 다양해질 예술의 영역도 포함될 것이다. 이 땅에서 잠깐 맛보게 해주신 것들 중에도 "야, 말로 다 표현 못하겠네!" 하는 게 많지만, 천국에선 말로 다 표현할 감성도 무한해질 것 같다.
도레미파솔라시
음악은 무한하다. 하나님이 무한하셔서 그분을 높이는 그 찬양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도레미파솔라시 7음계 자체가 완전수로 이뤄져 있다. 하나님이 완전하셔서 그분을 높이는 찬양도 완전하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이 사실이 알아졌다. 천국에 가면 제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듯.
동시에 여러 공간에서
천국에서 만나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만 아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익숙한 인물들과 교회사의 신앙선배들, 전 세계의 신실한 주의 사람들을 만나 친밀하게 교제할 것이다. 보좌에 앉아 계신 참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무소부재하신 참사람으로 천국의 각 사람과 동시에 여러 공간에서 교제하실 것 같다.
둘 다가 똑같이 좋아야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이 부끄럽게 여겨지고 나이브하게만 보인다. 이 땅에서 주의 일을 하는 것만 뭔가 더 있어 보이고, 천국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은 뭔가 모자라 보인다. 그러나 둘 다가 똑같이 좋아야 천국 백성답다. 이 땅에서 섬기는 모든 것의 실체가 이미 천국에 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한히 다 합해도
천국에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제대로 안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다 준다 해도 그 천국과 안 바꾼다. 천국은 작은 것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다 영원하지만, 세상에 있는 건 크든 작든 모조리 다 한 순간일 뿐이니까. 한 순간에 속한 것을 무한히 다 합해도 영원한 것 하나만 못하다.
보호막
쾌락의 끝이든 죄악의 끝이든 세상사람들에게는 양극단의 삶마저도 허락되어 있는 것 같다. 천국과 지옥을 이 땅에서 잠시 경험하게 하시는 건지 모른다. 주의 자녀들이 이런 영역에 무디거나 덜 영악한 것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말씀 안에 주신 한 길을 바보처럼 묵묵히 걸어가는 삶이 가장 지혜롭다.
100% 손해
사람이 죽을 때 정말 허망하게 간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가 맞다. 잠시 안개가 떠 있는 그 짧은 찰나에 영원한 무게를 실어야 한다. 영혼이 육체 속에 들어 있는 동안 육체를 위해 영혼을 소진하면 100% 손해다. 영혼육이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지 않는다.
관심사가 달라지면
세상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실감나고 눈에 안 보이는 천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잡다한 백 마디의 교훈을 능가하는 옹골찬 실천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이 땅에서부터 주된 관심사가 달라지면 삶도 달라진다. 하나님이 상과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는 가장 먼저 관심사부터가 달라진다.
환한 비밀
천국에는 세상사람들이 좋게 여겨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있다. 이 땅에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완전한 만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양과 질로 다 갖춰져 있다. 세속적으로 천국을 추구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 진짜 천국에는 눈멀어진다는 게 얼마나 역설적인가. 그래서 천국은 환하게 감춰진 비밀이다.
많이 버릴수록
하늘에 있는 것에 익숙지 못하면 이 땅이 크게 보는 가치에 계속 더 오염된다. 이 땅에서 명예나 재물에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이미 거기에 오염된 상태다. 천국에서는 마치 그 오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산다. 이 땅에서 많이 버릴수록 오염도가 적고 천국의 영광은 더 크다.
상바보
이 땅에서 얼마나 세월을 아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따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지위가 정해진다. 이 땅이 좋다 하는 명예나 재물, 권세도 그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사용하거나, 그 일에 방해가 되면 버리는 데 미련이 없어야 한다. 잠깐뿐인 이 땅의 것에 매여 천국의 가치를 놓치는 자는 상바보다.
땅에 살아도
이 땅에서 소외받는 온갖 모양의 소자들이 주님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다는 증표다. 그 눈에 낀 비늘이 벗겨지는 그때부터 땅에 살아도 천국을 걷는 일상이 시작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이웃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신비가 이 땅에 내려와 있는 천국이다.
정말 알면
천국을 정말 알면 이 세상이 주는 쾌락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천국에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기쁨의 원형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만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 때만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천국의 쾌락은 모두 자기 만족이 아닌 주와의 관계성에서만 충족되는 어떤 것이다.
천국을 사모하는 것으로만
천국에 대해 기뻐하거나 기대하거나 더 나아가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는 자는 거기서 멀다. 신자라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천국을 중시하는 만큼조차도 천국에 관심이 없다면 천국이 그저 만만하거나 세상이 살 만하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면 천국을 사모하는 것으로만 이 땅을 사랑하는 게 자연스럽다.
더 촘촘한 열매
천국의 계산법으로는 작은 교회나 큰 교회 목회자가 받을 상이 구원의 열매를 맺은 비율로 정산될 것 같다. 천 명 교인에 500명이 구원받거나, 100명 교인에 90명이 구원받는 목회를 했다면 후자가 더 큰 상을 받는 식이다. 그렇다면 교인이 적을수록 더 촘촘한 열매로 더 큰 상을 받을 확률이 더 높다.
작별 인사
"여보, 나 가요". " 성주야, 아빠 간다." 아침마다 아내와 딸에게 볼이나 이마에 뽀뽀하며 남기는 작별 인사다. 문득 이렇게 "간다"고 인사하다가 정말 갈 수 있겠구나싶다. 물론 천국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마다 홀연히 주 앞에 갈 수 있다는 전제가 중요하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랑의 실재
나를 위해 찢기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에 깊은 탄식과 항상 새로운 눈물이 있다. 천국에서 주님의 그 손과 발을 보고 만지게 될 때마다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영원히 늘 새로워질 것 같다. 십자가를 통해 내가 주님과 연합된다는 것은 교리의 하나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실재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
구주로서 예수님의 피 값은 원하지만 그분을 왕으로 섬길 마음은 없는 신자들이 많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이 땅에서의 모든 영역이다. 일상에서 주의 주권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도 그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원한 눈물
하나님께서 내 삶과 사역에 허락하시는 고난을 아무도 모르게 그분 앞에서만 눈물로 삼킬 때가 있는데, 그때 그 눈물이 천국의 영원한 보석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종류의 눈물은 내가 아무 때나 흘리고 싶다고 해서 드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님이 친히 특별한 순간으로 봉인하실 때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임종 직후 신자가 남기고 가는 얼굴이 어떠한가에 그의 사후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은 곧 그의 전체 생애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떠했는지도 그대로 드러낸다. 그 얼굴은 자신도 못 속이고 이웃도 못 속이고 하나님도 못 속인다. 매일 매순간은 남 몰래 그 얼굴을 지어가는 시간이다.
- 안환균, <빛과소금>(두란노) 2024년 1월호 '다시 쓰는 키워드 단상 변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