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에
조지훈
모든 것이 뒤바뀌어 질서를 잃을지라도
성진(星辰)의 운행만은 변하지 않는 법도를 지니나니
또 삼백예순날이 다 가고 사람 사는 땅 위에
새해 새아침이 열려오누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영겁(永劫)의 둘레를
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지었던가.
뜻 두고 이루지 못하는 恨은
태초 이래로 있었나보다
다시 한번 의욕을 불태워
스스로를 채찍질하라고
그 불퇴전의 결의를 위하여
새아침은 오는가.
낡은 것과 새것을 의와 불의를
삶과 죽음을 ㅡ
그것만을 생각하다가 또 삼백예순날은 가리라
굽이치는 산맥 위에 보랏빛 하늘이 열리듯이
출렁이는 파도 위에 이글이글 태양이 솟듯이
그렇게 열리라 또 그렇게 솟으라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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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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岩穴의 노래
조지훈
야위면 야윌수록
살찌는 혼(魂)
별과 달이 부서진
샘물을 마신다.
젊음이 내게 준
서릿발 칼을 맞고
創痍를 어루만지며
내 홀로 쫓겨 왔으나
세상에 남은 보람이
오히려 크기에
풀을 뜯으며
나는 우노라
꿈이여 오늘도
광야를 달리거라
깊은 산골에
잎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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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人
조지훈
그대의 함함이 빗은 머릿결에는
새빨간 동백이 핀다.
그대의 파르란 옷자락에는
상깃한 풀내음새가 난다.
바람이 부는 것은 그대의 머리칼과
옷고름을 가벼이 날리기 위함이라
그대가 고요히 걸어가는 곳엔
바람도 아리따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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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화삼
조지훈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움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 마을에 저녁 노을이여
이밤 자면 저 마을의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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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를 불면
조지훈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萬里 구름길에
鶴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적은 풀잎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데
물 우에 바람이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피리를 불면
꽃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리어
바라뵈는 紫霞山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뜯는
사슴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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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론 (幸福論)
조지훈
1.
멀리서 보면
寶石인 듯
주워서 보면
돌멩이 같은 것
울면서 찾아갔던
산 너머 저 쪽
2.
아무데도 없다
幸福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
마음 속에 만들어 놓고
혼자서 들여다 보며
가만히 웃음 짓는 것
3.
아아 ! 이게 모두
과일나무였던가
웃으며 돌아온
草家 三間
가지가 찢어지게
열매가 익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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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湖水)
조지훈
장독대 위로 흰 달 솟고
새빨간 봉선화 이우는 밤
작은 호수로 가는 길에
호이 호이 휘파람 날려 보다
머리칼 하얀 옷고름
바람이 가져가고
사슴이처럼 향긋한
그림자 따라
산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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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체개현(花體開顯)
조지훈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않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흙과 바람
조지훈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넣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사이
햇살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 생전
살의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었노라고
첫댓글 내일 뵙겠습니다... ^^*...
해방 이후의 시인을 소개하는 글을 올리면서, 이름만 들었고, 시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약력과 시를 올리면서
그 분들의 시를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업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