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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억류민을 위한 서간”
□ 렘 29,1-9 □
최춘혁(구약학)
A. 본문의 위치 및 단락 구분
예레미야서가 마소라 본문과 헬라역본 사이에 주목할 만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본문의 분량의 차이는 물론(마소라 사본이 대략 칠팔분의 일 정도가 더 많다) 본문의 구성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 그중 열방을 치는 예언이 대표적인 예다.(열방신탁의 나열과 장, 절의 차이는 개론서 참고). 여기서 학자들간에 회자되는 지방본문 이론을 재론할 수는 없다. 비록 헬라역이 원문(原文 / 독어 Vorlage)으로 삼았던 히브리어 본문 전통이 어떤 면에서 현존하는 마소라 본문 전통보다 원래의 모습을 보존, 전승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성경은 마소라 사본의 바탕을 두고 있기에 헬라역과의 편찬은 해석상 중요한 참고 대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해 둔다.
마소라 사본을 따를 때 예레미야서는 도입부와 말미(1장, 52장)를 제외하면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곧 Ⅰ.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는 운문과 설교(2,1~25,24) Ⅱ. 다양한 설화와 전승군(26장~36장) Ⅲ. 예루살렘 함락 및 그 이후(37장~45장) Ⅳ. 열방을 치는 예언신탁(25,15~38 및 46장~51장)
본문은 예레미아서 안에서도 그 문학적 분석이나 기원에 관한 논구가 아주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제2군 중의 한 이야기로서 전통적인 시드기야왕 치하(대략 주전 594년 후반기) 제일차 바벨론 포로민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서간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현형의 본문을 일단 29, 1~23 으로 단락짓는 것은 일치된 견해이긴 하나, 그것의 단일 본문 여부는 이론이 분분하다. 우선 대략적인 구분을 해보면 - 1. 도입(1~3절) 2. 억류민을 위한 신탁(4~9절) 3. 구원신탁(10~14절) 4. 고국에 남은 자들의 운명(16~20절) 5. 거짓 예언자 아합과 시드기야의 저주(21~23)
우선 눈에 띠는 점은 도입부를 제외하고는 양식상 야훼의 일인칭 어법이 전 설
화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과 이를 위해 중간 중간 전형적 도입방식, 소위 사자전언
양식(⌈코 아마르 아도나이⌋ hw"hy> rm;a' hKo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셨다’: 4,
8, 10, 15, 16, 17, 21절)과 종결양식(⌈느움 아도나이⌋ hw"hy>-~aun> ‘주님의 말
씀이라’ : 9, 11, 14, 19, 23절)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적 요소가 본문 단락 구분에 중요한 단서가 됨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양식적 요소가 이끌거나 마무리짓는 소단락이 이웃 단락과 상호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셋째 단락 - ‘코 아마르 아도나이’로 재차 시작되어 세 차례나 ⌈느움 아도나이⌋로 강조되는 10~14절 - 이 선행 단락과는 아주 대조적인 내용을 담은 구원신탁이라는 점이다.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집 짓고, 아들 딸 양육하면서 쇠잔하지 말고 구원을 기다리라는 취지의 첫번째 신탁이 당대엔 참기 어려웠을 ‘유보된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인데 반해, 셋째 단락은 구체적으로 칠십년이란 억류 기간을 전제하는 것으로 미루어 (⌈바티키니눔 엑스 에벤투⌋ (vaticinium ex eventu) 사후예언?) 두 단락이 동시에 기록되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물론 ‘칠십 수’를 역사적 숫자라기보다는 삼대가 함께 한 인간의 한 생애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첫 권고(4~7절)와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열방이 삼대에 걸쳐, 곧 느브갓네살과 그 아들, 손자를 섬길 것이라는 렘27, 7의 야훼의 신탁 참고), 그 보다는 첫 신탁에서 억류 생활이 내내 지속되리라는 인상을 막기 위해 보완 조치를 취한 것 같다.
게다가 헬라역엔 14절 중반부 이하가(느움 아도나이 포함) 없는 것도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개역성경 :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의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 해당하는 부분이 누락됨). 다시 말해 셋째 단락은 귀환을 확신시키는 구원신탁이긴 하나 헬라역엔 누락되어 있을 정도로 본문비평상 본래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전후 분위기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대 편집자의 작업의 일환으로 간주함이 타당해 보인다.
다음 고국에 남아 있는 자들의 운명에 관한 단락도 (16~20절) 본문비평상 앞 단락과 유사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코 아마르 아도나이⌋로 시작하는 본 단락은 같은 도입부가 17절에 반복되는 것과 말미에 ⌈느움 아도나이⌋(19절)와 ‘주님의 말씀’(⌈드바르 아도나이⌋)을 들으라는 명령(20절)으로 끝난다. 반복과 유사 용어의 사용은 차치하고서도 본 단락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헬라역에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일단 원문의 유사 어미로 인한 필사자의 착오
를 들 수 있겠으나(호모 이오톌류톤/Homoioteleuton : 마소라본문 15.20절이
모두 ⌈바벨라⌋(hl'b,B'바벨론으로)로 끝나는데 따른 건너뜀) 이는 너무 단순한
해석이고, 오히려 원래부터 이 부분은 헬라역자가 사용한 히브리 본문 전통(⌈포어라게⌋ Vorlage)에 없었던 것이라 함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형의 마소라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던 자들의 참담한 말로를 목도한 후대 공동체가 편지의 첫 권고를 확증할 의도로 보완한 것이리라. 즉 고국 땅에 남은 자들의 참상을 예고함으로써 조속한 귀환에 대한 환상을 경고하는 의미의 보완을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
여기서 15절의 바른 위치에 대한 번쇄한 논의는 생략한다. 마지막 21~23절의 거짓 예언자 두 명에 대한 저주는 첫 권면의 후반부(8~9절)에 상응하는 확정적 성격의 예고로서 10~14절이나 16~20절과 같은 보완적 성격을 띤다.
이상의 개괄적 묘사로써 잠정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첫 도입부 1~3절로 시작되는 예레미야의 편지글 혹은 서간일화는 실질적으로는 9절까지로 국한되며 나머지 부분은 본문 전승 과정 파생한 편집 보완 작업에 해당하는 만큼 본래적 부분은 아니라는 점이다.(물론 여기서 본래적, 비본래적이란 말은 질의 우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본문의 형성 과정, 곧 역사적 서열에 관한 극히 일반적 표현일 뿐이다). 환언하면 예레미야의 사건은 4~9절에 그 핵심이 집약되어 있으며 그 점에서 우리의 주해 작업은 일단 도입부와 4~9절에 국한해도 전체적 맥락의 이해엔 차질이 없음을 뜻한다.
B. 역사적 배경(도입부 1~3절)
본 구절은 역사적 맥락과 부대적 정황에 대한 정보를 명시함으로써 바벨론에 억류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섭리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려는 편집자의 섬세한 배려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원래 단편적으로 보관, 전수되었을 본 ‘예레미야의 서간’은 편집자에 의해 26장 이후의 다양한 설화와 소 수집서와 결부되면서 주전 597년경 제1차 포로와 587년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는 격동기를 관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부로 그 독특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도입부는 편집자에 대해 아무런
암시도 해주지 않는다. - 흔히 거론되는 서기관 바룩은 여러 가능한 인물중 하나
일 뿐이다. 서두의 단순접속사, ⌈브⌋( (w> ‘그리고’ 헬라역 ⌈카이⌋)’는 한때 바벨론
억류민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혀 예상 밖의 권면을 전했던 예레미야의 편지가 선행 본문 27장, 28장과 같은 흐름에 속해야 한다는 편집자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예레미야서뿐 아니라 전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가장 극적인 대립, 곧 참 예언자, 거짓 예언자, 하나님의 섭리, 인간의 욕망간의 대립 후 마침내 예레미야가 억류민에게 글을 띄어야 했다는 사실은 예언자의 선포가 주로 말로써 이루어졌던 것으로 미루어 특기할 만 하다. 소위 거짓 예언자 하나냐와 논쟁을 통해 드러난 말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예레미야의 부정적 태도, 불신 - 적어도 극우파적 종교지도자들에겐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 과 하나냐의 확신에 찬 태도는 그 당시엔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었다. 오직 결과만이 그 진위를 판단해 줄 것이다. (비교. 가나안 정탐시 여호수아, 갈렙의 확신과 여타 정탐꾼의 회의적 태도)
고국에서 벌인 공허한 쟁변은 당장 이역 땅의 억류민에겐 무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두 지역에 흩어져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했던 지도자들에겐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된 행동 양식, 전략의 확립이 화급한 과제였다. 실상 하나냐와의 쟁론도 대 바벨론 유화정책 채택 여부와 관련된 것이었고, 이것이 미결인 상태에서 두 지역의 동포의 미래를 가늠하기는 전혀 불가능했다. 마소라 본문은 도입부에서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지도부가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었는지 암시하고 있다. 먼저 수신자를 살펴보자.
제일 먼저 거명한 ⌈예테르 지크네 학골라⌋ hl'AGh; ynEq.z rt,y< 라는 말은
흔히 ‘포로민중 남은 장로’라 번역되지만 ⌈예테르⌋ rt,y< 란 용어는 남은 자라는
뜻 외에도 창세기 49장 3절의 예처럼 ‘월등, 탁월’등의 의미가 있다(헬라역엔 단순히 ⌈투스 프레스뷔테루스⌋ (tou.j presbute,rouj‘장로들에게’)로 기록되 해석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은 자로 새길 경우 어떤 상황의 변화로 인해(죽음 혹 처형?) 끌려 간 장로급 인사들의 수효가 줄었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한편, 후
자의 경우는 장로중 주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란 해석이 가능하
다. - 하지만 이 경우 첫 절 마지막 부분인 ⌈콜 하암⌋(~['h'-lKo ‘모든 백성’)이란
부연이 거슬린다. 한편으론 억류된 온 백성을 지칭하면서도 장로중에선 소수의 고위층 인사만을 거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본 서간이 왕실의 외교 행랑을 통한, 대외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때(3절), 우선 소수의 지도층에만 친견이 허락된 문서라 할 수 있고, 이 경우 마지막 부연은 의례적인 것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장로들의 존재에서 억류민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활동상울 추론할 수 있다. 흔히 통용되는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엔 마치 감옥살이같은 어감이 왕 여호야긴이 옥에서 풀려났다는 기사나(렘52, 31), 시드기야왕의 참혹한 말년의 모습(렘 52,10~11)에서 일부 주요한 인물들이 극단적인 행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지만, 다수민은 비록 강제 이주였긴 하지만 자율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일상적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쳤을 장로들에게 대한 언급이 이를 입증한다.
또 다른 수신자로서 ⌈학코하님⌋(~ynIh]Koh‘제사장들’)과⌈한느비임⌋(~yaiybiN>h;
‘예언자들’)이 있다. 이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들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정상적인 제의를 수행할 수 없었던 이방 땅에서의 삶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던 제사장들이나, 민족주의적 예언자들이었으리라는 것은 본장 8,9절
의 엄중한 경고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헬라역은 이미 ⌈프슈드 프로페테스⌋
(yeudoprofh,taj ’거짓예언자)’라고 구체화했으나 역자의 부연 작업의 일부로서 그들 역자의 원본(Vorlage)에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성들, 곧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이 끌고 간] 온 백
성’이 나오는데 헬라역엔 단순히 ⌈프로스 하판타 톤 라온⌋( pro.j a[panta
to.n lao.n ’온 백성에게‘)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 ]부분은 후대에 삽입한 짤
막한 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일반 백성으로 분류되었을지언정 이들은 당시 유대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자들로서(24,1의 방백, 목공, 철공 참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간의 함수 관계를 나름대로 성찰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이미 한 세기 반 이전에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들이 공유했던 땅에 대한 선험적 전제를 담보로 모골이 송연한 심판의 예언을 퍼부을 수 있었다(암 7,17 …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 호 9,3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곧 이방 땅은 부정한 곳이라는 신앙적 판단이 생리화 된 사람들… 그러나 그토록 조속한 시일 내에 귀환을 열망했던 억류민이(시 137 참고) 훗날 귀환을 꺼리어 또 한번 선지자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신앙의 허구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렇다면 본 서간을 보낸 자는 누구인가? 서두는 [예언자]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서신이라 명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보냈다는 사실보다 이 편지가 외교 행랑을 통해 바벨론에 우송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본 사건을 보도하는 편집자의 태도에 유의해야 한다. 비록 본문이 서간을 외형으로 예레미야의 신탁을 담은 것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앞선 28장의 하나냐와 벌인
쟁론을 염두에 두면서 그 연속선상에서 기록, 편집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첫 도입부 ⌈브엘레 디브레 핫세페르⌋ rp,Seh yreb.Di hL,aew> 는 흔히 ‘이것은 …
편지말(혹은 글)이다’로 번역하지만 복수연계형 디브레의 원형 ⌈다바르⌋ rb'D'
란 명사는 ‘말’이란 뜻이외에도 ‘사건, 일’이란 의미도 있는 역동적 단어다. A. 바이저는 여기에 착안, ‘편지 보낸 일(die Geschichte von dem Brief / 편지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했는데 반론에도 불구하고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공동번역 참고. ‘편지를 띄운 일이 있었다’로 우희적으로 표현했음).
편집자는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대항하지 말고 사직을 보전해야 할 것을 시드기야에게 간언한 것과 관련(27장), 예레미야의 서간 작성이 결코 단독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은 당당하게 바벨론을 향한 칙사들의 손을 통해 억류민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된 것이었다. (이미 예레미야의 절대자들도 그 서간 내용을 알고 있었다. 29,26~28) 아마도 시드기야는 열혈당원같은 열정으로 바벨론의 멍에를 꺾고자 했던 하나냐를 대표로 한 극우파의 성화에 시달리면서도 현실적인 결단을 통해 예레미야의 간언을 수용한 것 같다. 밤의 칙사가 바벨론 황제에게 무엇을 전달했는지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하나냐 일당이 중심이 된 일련의 반란 음모가 시드기야와 포로로 끌려간 대신들의 행보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고, 이에 대한 해명의 필요를 느꼈던 유다 왕실이 바벨론 황실에 진사사절단을 보냈을 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대표로 앞날을 도모하는 설득 작업을 억류민에게도 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왕실의 현실적인 정세 판단과 예언자 예레미야의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이해가 서로 수렴하여 구약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신탁이 서간의 형태로 탄생하기에 이른 이면을 보게 된다.
C. 신탁 1. 억류민에 대한 권고(4~7절)
본고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형의 마소라 본문에 따른 예레미야의 서간은, 일견 긴 듯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 핵심은 첫 부분에 집약되어 있고 그 외의 부분은 본체의 부연 내지는 추가라고 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권고의 골자는 간단하다 : 억류된 곳을 집처럼 여기고 뿌리를 내려 살지어다 - 거짓예언자나 복술가의 허망한 말에 속지 말라. 사태의 절박성으로 보아, 원래 예레미야의 서간은 - 편집자의 추가, 보완 작업을 겪기 이전에 서간은 - 분홍빛 미래를 한가하게 추가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헛된 예언으로 설렌 가슴을 안고 있던 억류민들을 혼란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간결함을 그 특징으로 삼는 예언자들의 언어 양식과 전인미답의 혁명적 발상에 따른 도발적인 내용 - 몸담고 살 이방 땅의 평강(샬롬)을 빌 것을 강권함 - 을 염두에 둘 때 본래의 서간은 오직 4~7절에 국한될 것이라는 엄밀한 논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억류민에 대한 권고가 거짓예언자의 준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전후 문맥상(26~28장) 명료한만큼 8~9절을 빠뜨린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양식사적 접근
을 통해 보더래도 9절 말미의 ⌈느움 아도나이⌋는 선행단락의 종료를 명시할 뿐
아니라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yKi)로 도입되는 8~9절은 역사를 주관하는
야훼 하나님의 전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간의 예레미야의 투쟁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선행귀절과 표리의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 4절 >
사자전언양식의 도입부에 당당하게 등장하는 선포의 주체 - 아도나이 ⌈츠바오트 엘로헤 이스라엘⌋(‘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 는 하나님의 온전한 제
의적 명칭으로서, 억류민들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얼른 수긍하기 어려운
신학적 의미를 함장한다. ‘만군’으로 번역한 ⌈츠바오트⌋는 명사 ⌈차바⌋ ab'c'의 복수형으로, 전사(戰士), 전쟁복무, 하늘의 성신(星辰), 하나님을 옹위하는 천군 천사 등의 의미가 있는 말로서, 상천하지의 모든 권세를 장악한 하나님의 진면모
를 한마디로 드러낸다. 이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칙령을 내리신다 : ⌈르콜 학골
라 아셰르 힉레티⌋ ytiyleg>hi-rv,a] hl'AGh;-lk'l. ‘내가 쫓아낸 모든 억류민에
게’). 일인칭 어법으로 명시된 바벨론 추방의 주체를 열방의 노도 앞에 좌초한 억류민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칙령의 주체, 곧 하나님은 변명하지 않는다.
< 5절 >
당신의 백성조차 지켜주지 않았던 만군의 주님의 칙령은 더욱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다 : ⌈브누 바팀 브셰부⌋( Wbvew> ~yTib' WnB. ‘집을 지으라, 그리고
살라!’) ⌈브니트우 간노트 브이클루 엩 - 피르얀⌋(!y"r.Pi-ta, Wlk.aiw> tANg:
W[j.nIw> ‘정원을 가꾸라, 그리고 그 열매를 먹으라!’)
강력한 이인칭명령형식의 첫 네 귀절은 이후 자식들을 위한 배려와 몸담고 살
곳에 평강을 구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한 6, 7절을 암시한다. ⌈바나 바이트⌋
tybhnb 곧 집짓기는 장인의 기예를 통해 구축되는 영역으로서 3, 4대를 포함
하는 항료적 용도의 집을 만듦을 뜻한다(이와 유비할 만한 것은 일시적으로 초막
세우기 {⌈아사 쑥카⌋ qK'su jf'[']나 장막 치기 (⌈나타 오헬⌋ lh,ao hx'n;)을 들
수 있다). 이런 집을 지으라는 명령은 이미 아들 손자를 볼 것을 요구하며, 이와
결부된 나타 간노트(정원가꾸기)도 지속적인 관리를 전제한 것이다. 정원으로 새
긴 간노트는 명사 ⌈간⌋ !G; 의 복수형으로 물을 댄, 타인이 함부로 진입할 수 없도
록 경계를 두른 전원을 의미하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해 제일 먼저 훼손되곤 했던
삶의 바탕이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고 제때 거두는 소산물을 먹으려면 평강
(⌈샬롬⌋ MAlv')이 절대적 전제라는 점에서 7절의 기원은 정원의 소산물과 밀접
한 관계가 있다.
음식물에 관한 규정이 별 의미가 없어진 오늘날, 파종과 수확도 아울러 큰 뜻을 부여하지 않고 있지만 고대인들에겐 그 행위 및 표상 자체가 자기가 섬기는 신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방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주전 8세기 중엽, 선지자 호세아를 그토록 괴롭혔던 바알과 아세라의 풍산제의적 표상을 예레미야 당대의 민중들이 얼마나 극복했는지 미지수인데, 그 갈등의 골이 해소되기 전에, 당대의 일반 대중의 심리 속에 토지의 소산이 야훼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라는 인식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방 땅으로 자의 반 타의 반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에서 있어서 부정한 땅에서 산다는 것과 그 소출을 먹어야 했다는 것은(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해도)종교적 차원에선 엄청난 과제요, 고국 땅에서 바알 신과 씨름할 때 보다 더 큰 위기였다. 결과적으로 이방 땅에서 난민들이 보여 주었던 태도는 대조적이었는데, 그발 강가에서 전혀 예상 밖의 신성의 현현을 경험했던 에스겔이나 시137편의 정서를 공유한 사람들의 태도와 예레미야의 경고를 묵살하면서 오히려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기를 멈추지 않겠노라고 강변했던 당시 애굽에 거주했던 유대 난민들의 태도(렘44장 15절 이하 참고)가 바로 그것이다. 예언자들의 준엄한 질책 앞에서 원치 않았던 땅의 소출로 드려야 했던 제사를 포기하고, 훗날 회당으로 발전하게 된 새로운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구축하게 된 반면, 애굽의 유민은 혼합적 색채의 종교적 표상을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양자간엔 메울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생기고 말았다. 예레미야가 이 몇 마디 간결한 말로 전해 준 것은 단지 이방 땅에서 삶의 터전을 닦으라는 크나 큰 과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 6절 >
다음 구절은 집을 지으라는 앞 절의 명령과 관련하여, 그 집을 채울 후손을
불리는 방법을 일련의 명령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크후(Wxq. < 라카흐
xql, ‘취하라’), ⌈홀리두⌋( WdyliAh < 얄라드 dly ‘낳아라’), ⌈트누⌋(WnT. < ⌈나
탄⌋ !tn ‘주어라’), 르부( Wbr. < ⌈라바⌋ hbr ‘번성하라’) 여기서 핵심은 마지막
부분에 있다. 거기서 번성하라(⌈우르부 샴⌋)! 그리고 쇠하지 말지어다(⌈브알 팀아투⌋)! 같은 뜻을 동사를 달리 쓰며, 용법을 바꾸어 강조하고 있다. 그중 동사 ‘라바’는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며 명하신 다섯 동
사중 하나로서 우리와 친숙한 것이다 : 생육하고(혹은 애낳고) 번성하라로 번역
한 ⌈프루 우르부⌋ Wbr.W WrP. 라는 구절의 순서가 상기한 5절 마지막 명사 ‘프리
( yriP. ’열매‘)’와 같은 것은 우연인가?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 고대
하고 목도할 수 있도록 세월과 함께 벌일 경주를 이길 수 있는 수단, 곧 어떤 재물보다 앞선 후손의 번성이란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이란 무엇인가? 명령은 곧 가능성을 뜻한다. 너는 해야 한다. - 그러니까 할 수 있다. 심판 속에서 하나님은 토지의 소산을 누리고, 여인의 몸의 소산인 후손을 늘리도록 명령함으로써 향후 억류민이 누릴 두 가지 잠재적 복락을 은밀히 드러내었다.
< 7절 >
비록 이방 땅이긴 하지만 한편 순종하면 누리게 될 복락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6절의 명령은 적어도 억류민에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본 구절은 그 명령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파급된다는 점에서 독자를 아
연케 한다. 곧 억류된 성읍(헬라역은 땅)의 평강을 위해 힘쓸 뿐 아니라 더 나
아가 야훼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명령. ⌈브디르슈 엩 슐롬 하이르⌋ ( ry[ih'
~Alv.-ta, Wvr.diw>)’라는 구절에서 개역성경이 ‘힘쓰라’고 번역한 ⌈디르슈⌋는 동
사 ⌈다라쉬⌋ vr'D; 의 2인칭 명령형으로 어감이 더 강렬하다 (참고 창 9,5 :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암 5,4 :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곧 찾다. 추구하다. 묻다. 의도하다 등의 의미). ‘그 성읍의 평강을 추구하라’정도가 요즘 어감에 부합할 것이다. 문제는 원문의 어순이 독자들을 자극한다는데 있다. 추구하라 - 평강을 - 그 성읍의 - 내가 너희를 쫓아냈다 그리로 내가 너희를 쫓아 보낸 그 성읍의 평강을 추구하라. ‘너희가 살게 될 성읍’정도로 충분했을 이 구절이 매우 불손(?)하고, 도발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매우 합리적인 정황 파악과 철저한 자기 이해, 곧 자기 부정, 회개를 전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가정(문자 그대로 집과 뜰, 家庭)이 존속하기 위해선 그곳을 둘러싼 더 큰 울타리인 성읍(혹 땅)의 평강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곳의 터줏대감들만이 애써서 이룩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방관적 자세도,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도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샬롬이다. 그러나 신탁은 이 보다 더 나아가 그 성읍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점층적인 신탁의 강도를 보게 된다 : 집을 짓고(이방 땅에서), 밭을 일구며, 출산하고, 번성하며, 평강을 추구하며, (원수를 위해)기도하라는 크레센도의 흐름. 구약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영역에 이른 것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 예레미야를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의 원수 사랑의 효시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렘 18,19-23의 적대자 저주및 51,61-64의 바벨론 저주 참고). 양자 모두 후대
편집작업의 흔적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예레미야가 사해동포주의자가 아닌 것
은 그가 진정한 의미의 민족주의자였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오히려 이 기도의
명령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 yKi 로 연결되는 다음 구절로 인해 억류민
중심적이라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곧 너희의 평강을 위해 그들 도시의 평강이 필요하다... 그래도 맹목적 국수주의가 판쳤던 당시 이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반역적 발언에 속했을 것이나(이에 대한 격렬한 항의 29,27~28), 상황판단에 앞섰던 당시 왕실은 예레미야에게 손대지 않았다.
D. 신탁2. 거짓 선지자와 복술가에 대한 경고(8~9절)
조속한 귀환에 대한 기대와 그로 인해 빚어진 자포자기적 상황은 비단 억류민 자신의 오판에서 연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예레미야서 두번째 대단락(26~36장)의 첫머리부터 암시된 바다. 민족과 국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예언, 침략자 바벨론에 복종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다릴 것을 권면한 것은 일반 민중은 물론 웬만한 지각의 소유자에게도 반감을 살 만한 일이었다. 때문에 예레미야의 절대 세력은 제1차 추방(주전 587년경)을 전후로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입지를 위해 예레미야를 매장하려고 광분하였고, 그 행동반경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바벨론의 억류민들에게도 확장되었다. 이건 선지자, 복술가들의 준동으로 진퇴양난의 고초를 겪게 된 유대 왕실이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들의 선동으로 황폐해진 억류민들의 정서는 전혀 새로운 내용의 신탁과 거짓예언자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로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8~9절이 4~7절과 본래 한 부분이었음을 말해 준다.
< 8절 >
4절에 이어 다시 등장하는 사자전언양식은 새로운 주제를 암시할 뿐 아니라
재삼 강조해야 할 주제를 지적하는 뜻도 있다. 마소라 본문의 온전한 제의적 명
칭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헬라역엔 단지 ⌈퀴리오스⌋(Ku,rioj ‘주
님’)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후대 부연일 가능성이 많다. 연후 즉시 3인칭 명령형
(jussive) ⌈알 얏쉬우 라켐⌋( mkl Wayvy-la ‘그들이 너희를 속이지 말찐저!
혹 그들이 너희를 속이지 말기를!)의 주어는 바로 선지자(느비임)와 복술가(코스밈)이다.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 선지자들 - 느비임- 은 아주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헬라역이 많은 구절에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칭하지 않고 단지 이름만으로 기록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예레미야가 이 선지자 부
류와 생사의 대결을 벌였음에도 결국 ‘이르므야 한나비 [선지자 예레미야]’로 불
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 하나 코스빔은 동사 ⌈카삼⌋ msq 의 능동분사복수형
으로서 점치는 자들을 의미하며, 8하반절의 해몽가, 꿈장이에 관한 부분은 좀 난해하지만 ‘너희들이(백성들이) 꿈꾸도록 세운 꿈장이’ 혹은 ‘그들이 주는 꿈(헬라역 참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이들 세 부류는 이미 27장 9절에도 등장한 바 있다.
< 9절 >
이들을 경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7하반절의 경우와 같이 접속사 ⌈키⌋ yK
i 로 설명된다. ⌈브셰케르 헴 닙브임 라켐 비슈미⌋( ymiv.Bi ~k,l' ~yaiB.nI
~he rq,v,b. ‘헛되이 - 그들은 - 예언하고 있다 - 너희에게 - 내 이름으로’)에서
명사 ⌈셰케르⌋는 거짓, 기만, 허망함 등을 뜻하는데 여기선 전치사 ⌈브⌋ B 와 더
불어 헛되이, 거짓으로 등의 부사구로 새긴다. 또한 닙브임은 동사 ab 의 재귀
형 ⌈닙바⌋ aB'ni 의 분사 형태로 지금도 그 짓을 하고 있다는 진행의 어감을 풍긴
다. 다시금 신탁의 주체를 암시하는 비슈미(내 이름을 빙자하여)와 대명접미어를
한 ⌈로 슐라흐팀⌋( mytxlv al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으로 신탁은 종
료된다. 예언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선언, 곧 ‘하나님께서 너를 보내지 않으셨다’는 것으로써 거짓예언자들에 대한 경고를 마무리 짓는 것은 아주 간결하여 더 이상의 언급을 거부한다.
E. 메세지
바벨론 억류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은 자기들이 사는 땅에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방 땅에서 삶의 터전을 공고히 하라는 신탁은 신의 사역에 대한 인식적 지평의 확대를 의미한다. 억류민들에게 이 신탁이 서간의 형태로 전해졌을 때, 그 신탁의 참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알 수 없다. 억류민들은 그 나름대로의 처지 때문에 그 참뜻을 삶에 구현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렸을 수도 있고, 또한 정략적인 차원에서 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던 유다 왕실의 위정자들이 그 뜻을 이해한 것 같지도 않다 - 훗날 시드기야가 우파의 아우성에 굴복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친 애굽 정책을 통해 바벨론의 굴레를 벗으려다가 비참한 말로를 겪게 된 것으로 보아서 여기서 신탁이 순수 이타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방 땅에서 이방인과 함께 평강을 누리면서 언젠가 도래할 신의 구원 사역을 기다리라…. 너희가 머무는 땅이 평안할 때 너희도 평안할 것이라는 7절의 부연은 엄밀히 바벨론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님을 명시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 현실적인 감각으로 인해 그 가치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의 화평으로 인한 열매로 풍요할 때, 비로소 넉넉하게 남을 돌볼 수 있는 것이며, 이타주의라는 이념으로 자신을 몰아칠 때 결국 공멸의 길로 빠져들어간다는 것은 구도자의 기본 지식에 속한다. 억류민들이 끈질기게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면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기를 끌고 온 자들의 유업에 평강을 기원한다는 것은, 삶이 몇 마디 단순한 이념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수수께끼라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욥기의 주제를 보라). 이런 수수께끼와도 같은 삶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의 불가해성과 궤도를 같이 한다. 하나님은 때로는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심판을, 소위 원수 나라 민족에겐 번영과 오래 참음의 덕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그에 대해서 아무 변명도 하지 않는다. 신은 신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역사의 대 전환 시기에서 섬광처럼 빛나던 진리의 순간을 포착했던가? 그 이후의 역사로 미루어 볼 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거듭되는 외세의 침략 앞에서 유대인의 정서는 결국 배타적 율법주의로 치달았으며, 그것을 돌이킬 만큼 한가로운 세월을 포로기 이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들에게 비극이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보게 되었지만.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정적 안목에서 지적할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이 본 서간의 핵심을 이루는 신탁을 가치 있는 것으로 남길 수 있었던 때는 언제였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때, 손에 권력을 장악했을 때엔 어떻게 처신했던가? 다윗, 솔로몬 시대에 그들에겐 주변 민족과 함께 평강을 누리며 살자는 자의식이 있었던가? 유감스럽게도 없었다. 주변의 약소국인 모압, 암몬, 에돔이 상대적으로 큰 유다, 이스라엘 왕국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유린되었던가는 사무엘상하 이후의 역사서를 한 번만 읽어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화평을 부르짖은 것은 오직 제 힘이 약했을 때뿐이었다는 것은 너무 우울한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같은 힘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천만 명의 원주민을 학살했던 것이나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유대인들의 간교한 정책을 아직도 우리가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은 약자들에게도 자기 고유의 삶을 지키며 살 권리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소위 강자가(아니 이들은 실제로 유약한 겁쟁이일지 모른다) 인정하고 실천하는 길뿐이다. 그 점에서 본 신탁의 거침들(?), 즉 이방 성읍(혹은 땅)의 평강을 추구하고, 그 땅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부분을 곡해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고 단 지파가 원정때 벌린 참극을 재현하게 될 지 모른다.
…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암 쇼게이트 우보테아르⌋ x:l.boW jq.vo m[; ‘평
화롭고 의심치 않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사사기 18장 19절. 개역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