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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8편 2절-3절: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2절: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터가 높다는 것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 믿음이 잘 올라갈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아놓은 기본구원의 터가 높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구원을 생각하면서 33년 동안 하나님 앞에 분초찰나 순간마다 100% 만족을 드린 삶을 사셨기 때문에 인간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 이 삶의 걸음걸이가 아니라면 아무리 십자가를 졌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이 안 되는 거다.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린 삶을 사심으로 사건 환경 존재 등 부딪히는 모든 것 가운데서 당신의 언행심사를 통해 사망권 안에서 생명계로 옮겨놓더라. 당신의 이런 삶 전부가 우리의 기본구원을 닦는 면에 충분하다. 기본구원이라고 할 때 예수님의 이 삶을 통해 되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분초찰나 순간마다 모든 언행심사가 누구를 생각하며 움직이신 거냐? 전부는 성도 나를 위해서다. 당신을 위함보다도 우리 성도를 위한 삶이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인데 나는 영이 죽고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살 수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내 대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주신 거다. 이런 정신들이 기본구원 안에 들어있다. 기본구원을 얻은 자는 이룰구원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건데 우리가 예수님께서 해 주신 기본구원의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룰구원 면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거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 못 진다. 예수님이 ‘네 십자가나 똑바로 지고 넘어지지 말고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했지 남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라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나(예수님)를 위해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말고 너나 좀 똑바로 살아라’ 그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본구원에 대한 감사에서 나오는 감화 감동 감격성이 있다면 그 다음에 ‘하라. 마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들어갈 때 세상이 아무리 불의의 세상이 될지라도 옳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구원을 잘 이뤄가게 되니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광이 되는 거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살아드린다’ 이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성품을 잘 닮으면 주님이 좋아하시니 이게 주님께 영광이다.
기본구원의 터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타산 사고방식 소원 목적 추구성 간구성이 다 들어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으로 모든 죄와 세상의 유혹과 미혹과 마귀의 시험을 다 이겼으니 그 수준이 보통 높은 게 아니다. 기본구원 속에는 이것이 들어있다. 우리를 그 수준에 놓고 이걸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장시키는 거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기본의 터를 알지 못하면 신앙수준이 못 올라간다.
어느 종교의 교주가 이 수준을 닦아 놓겠느냐? 어느 이방종교의 교주가 이 차원으로 닦아 놓겠느냐? 세상의 어느 왕이 이 차원으로 닦아 놓겠느냐?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교회는 이 수준에서 성장이 되는 거다.
우리는 땅의 사고방식의 지혜지식, 그 도덕성을 기초로 해서 신앙 믿음이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도덕성, 예수님의 지혜지식성의 수준에서 올라가는 것이니, 이 기본구원의 터는 땅의 수준이 아니라 하늘의 수준이다. 이 기본구원의 터는 세상의 그 어떤 종교적인 지혜지식의 홍수나, 전쟁바람의 홍수나, 물질바람의 홍수나, 경제바람의 홍수나, 정치바람의 홍수가 나더라도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수준이다. 이게 우리 신앙의 수준이다. 우리는 아무리 신앙이 없다고 해도 이 수준에서부터 올라가는 거다. 신앙이 뭔지 그 정신을 알아라.
주님께서 해 놓으신 우리의 구원의 터는 위치적 가치적 존귀영광적으로 하늘의 수준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바람에 흔들린다면 주님께서 해 놓으신 하늘의 수준에서 스스로 내려가 있는 거다. 자기 신앙의 성격과 성질이 주님께서 해 놓으신 기본구원의 터에 대해 얼마나 감동과 감격이 되고 있느냐? 이게 처음사랑인데, 여기서부터 자기의 신앙이 올라가기 시작하는 거다. 이 맛을 못 보면 못 올라간다. 처음사랑의 맛을 모르면 못 올라간다.
터가 높다는 것은 두 번째로, 가르치는 교훈적인 면에서 그 수준이 높다는 거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아무리 대학공부를 했다고 해도 그 학문적 수준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학문적 수준과 같으냐? 성경은 하늘의 지혜지식적 도덕적 능력적 수준이고, 대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세상 땅의 지혜지식적 도덕적 능력적 수준이다. 교회에서는 기본구원의 터를 기초로 하고 성령의 감화로 되는 감격으로 신적 도덕적 수준으로 성장되어 올라가는 거다. 따라서 교회의 목사는 성도들을 일반수준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 이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세상 종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의 성품으로 성장하고, 자라고, 모든 사고방식 이해타산이 신의 성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 잘 믿어 부자 되고, 예수 잘 믿어 장사 잘 되고, 예수 잘 믿어 공부 잘 하고’ 이건 세상수준이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도 장사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농사도 잘 지어야 하겠지만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려는 목적을 하는 것은 안 된다.
우리는 세상 땅의 것은 목적물이 아니라 자타의 이룰구원에 이용 활용물이다. 세상 땅의 것은 다 불에 타는 건데 이걸 목적으로 하는 신앙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성도를 이렇게 기를 수는 없는 거다. 영적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성장이 되어야지 육적으로 성장이 되면 안 된다 그 말이다. 육의 사람들은 육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지만 영의 사람들은 영적인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것으로 생명이치, 도덕이치, 영적 이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수준 높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 수준이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가는 거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올라가는 역사가 된다. 이건 성령님의 역사요, 성부 하나님의 역사요, 성자 하나님의 역사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역사다. 지금도 이 역사를 하고 있다. 이 역사는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어서 살아나는 역사다. 이 역사는 영적 기능과 지능 면이 자기 속에서 살아난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살아나게 되어있다.
옳은 교훈을 주는 교회에 1년만 다녀보고, 일반교회에 1년만 다닌 후에 어떤 수준의 차이가 나는지 봐라. 같은 것으로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질이 다른 수준으로 큰 차이가 나게 된다. 진리본질의 교훈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속성이요 성품인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이 자기 속에서 살아나서 역사가 되니 그 가운데서 영적 기능과 지능 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서 일반학교에서 배우면 일반적 지식으로 자기 머릿속이 돌아가고 그 면에 유능해지듯이 자기 속에서 영적인 기능과 지능이 자라면 이 사람의 수준은 이성적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도덕성과 능력성에서 되어지는 성령에 붙잡힌 이성의 수준이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자기의 소원 목적으로 갖게 되어서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로되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사람이 되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다. 신의 아들이다. 이것이 자기 신앙 믿음의 실력이 되는 거다. 교회에 다니면 이래야 한다. 수 년,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이게 없다면 뭔가 문제다. 목사님이 못 가르쳐 줬다든지, 목사님은 바로 가르쳤으나 자기가 안 받았다든지, 아니면 교훈적 측면에서 목사님도 엉터리고 너도 엉터리다.
터가 높다는 것은 세 번째로,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면서 진리생명과를 먹는 교회들의 신앙사상의 세계가 높다는 거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온 세계가 즐거워한다는 것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영적 이스라엘, 생명 길을 가는 성도들이 이 세계를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즐거워한다는 거다. 무슨 세계냐? 기본구원의 터 위에서 신적인 성품으로 성장하는 교훈을 받는 영적 이스라엘을 말한다. 각 나라 속에 들어있는 진리교훈을 받는 영적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안 믿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온 세계’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런 신앙의 맛을 보고 가야 하는데 이 신앙의 세계를 모르고, 이 맛을 모르고 그림자 같은 불타질 현상세계만 붙들고 살다가 가는 세상 속화된 교회들이 많다.
교회는 원칙상 그 터가 굉장히 높은 거다. 주님이 이렇게 닦아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이 기본적 구원을 모르니 ‘예수 잘 믿어야 천국 간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 언제 잘 믿어질 거냐? 교회라고 할 때 십자가 붙이고, 교회간판 붙이고, 성경 보고, 찬송 부르고 단순히 이렇게만 보지 말아라. 몸이 아파서 병원을 갈 때 집에서 가깝다고 해서 아무 병원이나 찾아가느냐?
성경에도 있듯이 말세에는 거짓 종들이 많다고 했으니까 말세를 사는 우리는 거짓 인도자에게 속지 않고 참 인도자를 찾는 것도 중요하고, 참 교회를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우리교회에 나온 분들은 혹시 다른 교회로 가더라도 첫째는 인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그리고 바로 믿고 바로 살다가 의로 인해서 되는, 진리로 인해서 되는 자기 몸에 흔적이 있어야 한다. 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기 속에 이런 게 기억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주님 마음 가운데도 기억되고 있는 거다.
3절: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궁에는 왕이 살고 있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왕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안녕과 질서와 행복을 위해 있는 거고, 적의 침략이 들어오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막아야 한다. 아울러 백성들도 단합이 되어야 적을 막을 수 있고, 적을 이길 수 있고, 이기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세상에는 많은 왕들이 있고 지도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백성들이 마음을 둘 수 있는 피난처가 없다. 역사로 보여줬다. 성경에 보면 왕궁에서 날마다 시기질투요, 모함의 연속이요, 살인이 계속 일어났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랬는데, 북조 이스라엘에서는 더 그랬다. 그리고 남조유다에서는 왜 그렇게 산당을 못 없앴는지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부쉈는데 산당은 그대로 두니 백성들이 오히려 거기에 가서 우상을 섬기더라.
산당이 뭐냐? 산당은 숲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람 눈에 안 보인다. 절간은 크니까 멀리서도 잘 보이지만 산당은 숲 속에 조그맣게 있기 때문에 잘 안 보인다. 누구만 아느냐? 자기만 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만 아는 그곳에 들어앉아서 복 달라고 손을 비비고 있다. 이걸 영적으로 보면 사람마다 자기 속에 소원성이 있는데, 뭘 놓고 기도하고, 뭘 놓고 섬기고 있는지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소원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는 이게 산당이다. 우리는 마음 속에 산당이 있으면 안 된다. 목사도 마음 속에 산당이 있으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믿어 부자로 살고, 병 낫고, 세상에서 뭐가 잘 되고’ 하는 건 어림도 없다. 이런 세상 것은 자타의 이룰구원에 이용 활용물이지 목적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라고 하고, 불에 타질 세상 것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짓 종들이 많다. 이건 죄다. 그런데 아예 노골적으로 이런 죄를 지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으로 부자였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영적으로 헐벗었고, 비참하고, 눈이 멀었던 것과 같은 상태다. 영의 눈으로 보면 이런 게 훤히 보인다. 오늘날 거짓된 인도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눈으로 보이는 물질의 풍부성을 놓고 기도하고 있고, 이것 때문에 목회를 하고 있다.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둘 곳이, 우리의 소망을 둘 곳이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에는 도피성이 있었다. 이방나라에는 도피성이 없다. 도피성를 보면 납달리 산지의 게데스,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 기럇 아르바의 헤브론, 르우벤 지파가 사는 곳의 베셀, 갓 지파가 사는 곳의 길르앗 라못, 므낫세 지파가 사는 곳의 골란지역에 도피성이 있었다. 이것은 모두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는 것을 계시로 보여주는 거다. 죄와 사망과 유혹과 미혹에서 온전히 피하여 구원을 얻을 곳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면 죄가 어떤 건지, 사망이 어떤 건지, 부패성이 어떤 건지, 육이 어떤 건지, 생명의 세계가 어떤 건지, 영적인 세계가 어떤 건지, 정복성이 어떤 건지, 멸망이 어떤 건지, 날마다 사는 것이 무엇이며 날마다 죽는 것이 무엇인지, 덧입는 구원이 무엇인지, 성화구원이 무엇인지, 참 부귀 영광이 무엇인지, 참 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참 능력이 뭐냐? 입으로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내고, 소림사에서 하는 장풍을 날리는 게 능력이냐? 목사가 손을 이렇게 하면 교인들이 이쪽으로 넘어지고, 저렇게 하면 저쪽으로 넘어지는 게 능력이냐? 몸 아픈 사람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하며 두들겨 패는 게 능력이냐? 도피성은 신앙 믿음이 무엇인지, 인간 자기를 창조하게 된 원인 동기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곳이다.
이방인들의 종교는 하나님도 없고, 부활도 없고,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도 없고, 영과 육에 대한 분별도 없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분별도 없다. 성령의 역사도 없고, 영적인 면에서 바로 살고자 하는 것도 없고, 있는 것은 심판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의 마음 속의 부패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결국은 참다못해서 마음 속에 있는 것이 폭발하기 마련이고, 결국은 죄로 인해 죽는다.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라고 가르치는 교회는 구약으로 말하면 피난처가 아니다. 강도의 굴혈일 뿐이다. 자기가 이런 교회에 다닌다면 살기 위해서는 도피성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들어가야 한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면 죽음이 못 따라온다. 세상의 모든 유혹과 미혹에서 탈출하려면,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거짓 종들에게서, 사단 마귀의 사망적 꾀임에서 탈출해서 구원을 얻으려면 영적 생명의 세계인 진리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게 도피성이다.
우리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자기 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성질이나, 목사님의 신앙의 성질이 도피성 안에 있는 것인지, 밖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장터에 있는 것인지 이걸 분별해야 한다. ‘재미있다. 사람이 많다’ 이런 것만 보지 말아라. 계:에 보면 성 안에 있는 교회가 있고, 성 밖에 있는 교회가 있다.
우리는 진리이치로 영적 생명의 세계를 향해서 깨달음이 성장해야 하고, 영적 실력적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없이 주님이 해 주셨지만 신앙실력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힘을 써야 한다. 노력을 해야 한다. 시간투자, 물질투자, 노력투자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올라가고, 성장이 되고, 신앙 믿음이 건강하고 병이 안 든다. 이러기 위해서는 정신 면에 강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 강함성은 성경에서 나오는 거다. 그리고 교회의 교훈도 그래야 한다. 안 그러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세상 경제바람으로 살기가 어려워질 때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누가 잘 했네. 못 했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 믿음을 다림질하는 다림줄이다. 경제적 어려움을 통해 ‘네가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느냐?’ 하고 믿는 우리의 신앙 믿음을 달아보는 거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주일만큼은 지켜라. 학생들은 수요일 날 빠질 수도 있는 거다. 그러나 주일날만큼은 빠지지 말아라. 주일날마저 빠진다면 너는 하나님의 애정권에서 제외된다. 이러면 세상으로 세상으로 자꾸 빠져 들어가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이 무서울진저. 이게 무서운 거다.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문화 문명적으로 발전하는 것 같아도 올라가는 게 아니라 물 밑으로 내려가는 거다. 세상 밑으로 내려가면 결국은 죽는 거다. 신앙차원이 올라가지 못한 상태에서 40일 금식기도, 100일 금식기도, 철야기도, 천일기도, 골방기도를 아무리 해 봤자 악령받기 십상이다. 이렇게 하고자 하는 발상 자체가 영이 아닌 육에 속한 거다.
기도를 많이 해서 세상적인 것을 응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전부가 육의 발상이다. 영의 발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서 자기를 진리 인격과 실상화 시키려고 한다. 이건 하나님과 같이 움직이는 거다. 그러나 육의 발상은 무슨 큰일이 닥치면 산이나 굴속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응답을 받겠다고 한다. 그러니 그러는 사이에 사건은 사건대로 흘러가고, 응답을 받기는커녕 마귀가 달려든다. 우리는 사건이 닥쳤을 때 평소에 깨달은 지혜지식으로 그 자리에서 즉시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자기의 삶의 태도가 이렇게 나가야 한다.
진리이치를 바로 깨달아서 주님으로 닮아가는 것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개발되고 성장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주님이 전해주신 천국복음의 세계다. 이건 없이 단순히 종교생활을 한 연수나 따지고, 종교생활을 하면서 이뤄놓은 눈에 보이는 이력이나 업적을 가지고 ‘믿음 좋다. 신앙 좋다’ 한다면 이 사람은 매우 어리석은 거다. 이런 사람은 도피성으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의 신앙이다.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어도 자기의 생각, 마음, 소원, 목적, 취미성, 지향성이 아직까지 진리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게 있다. ‘하나님 말씀대로 바로 고쳐진 것 같은데 이것만큼은 못 고쳤구나’ 하는 게 있다. 이런 것을 깨닫고 말씀을 잡고 하나하나 고쳐나가면 진리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이게 도피성으로 피한 신앙이고, 하나님 품 속에 들어간 거고, 이렇게 되면 그 신앙은 안전한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