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도민일보 2024년 6월 21일 금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이것만 쓰네
이기철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山房에 벗어놓은 흰 고무신 안에 혼자 놀다 간 낮달을
내게로 날아오다 제 앉을 자리가 아닌 줄 미리 알고 되돌아간 노랑나비를
단풍잎 다진 뒤에 혼자 남아 글썽이는 가을 하늘을
한 해 여름을 제 앞치마에 싸서 일찌감치 풀숲 속으로 이사를 간 엉겅퀴 꽃씨를
내 언어로는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사월 달래순이 묵은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힘을 본 것도 같은데
저를 좀 옮겨달라고 내 바지 자락에 매달리는, 어언 한 해를 다 살아버린 풀씨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같은데
아직도 흙 이불로 돌아가지 못한 고욤 열매의 추위를 느낀 것도 같은데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 ㅡㅡㅡㅡㅡ 인생은 아는 만큼 살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알고, 얼마만큼의 능력과 경험으로, 얼마만큼 누리며 살다 갈 수 있을까?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시를 읽고 쓴다. 보고 들리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느껴지는 모든 대상을 관찰하고, 존재의 이치를 시로 표현해야하는 시인들은 변화무쌍한 자연과 수많은 생명체들의 끊임없는 진화와 각각의 사연들을 얼마만큼 알고, 얼마만큼 대변할 수 있을까? 아는 만큼 쓸 수 있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이 있다.
‘다 쓸 수 없어 이것만 쓰네’
이제 웬만큼 터득했지만 적확한 언어가 모자라 이것만 쓴다는 원로시인의 고백이 겸손으로 읽히는 동시에, 얕은 소견으로 어설픈 시를 마구 생산하는 시인들에게 넌지시 던지는 충고로도 읽을수 있겠다.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