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시집 부산 출간
이 책에 대하여
부산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요, 선물인 시집!
한 장 한 장 넘기면 보이는 세계의 속살을 천천히 매만지면 되살아나는 부산, 부산 사람, 부산말, 그리고 포근한 부산의 품을 만날 수 있다. 억수로 치솟아 올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눈물 되어 흘러내린다. 부산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요 선물이다.
― 정훈 문학평론가
김홍희의 시집에 수록된 시제들에 나오는 지명만 훑어봐도 얼마나 이곳 부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작가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황령산, 해운대, 자갈치, 이기대, 오륙도, 서면, 복천동, 산복도로, 문현동, 몰운대, 달맞이 언덕, 낙동강, 기장 등이 그렇다. 이름만 들어도 정겹고, 아련하고, 그립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기분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부산을 말해왔고, 부산을 썼으며, 부산을 전시했다. ‘부산학’의 열풍이 2000년대 이후 이곳 부산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전국에 부산을 알리기도 했다. 이 나라 제2의 도시라거나 최대의 항만도시라는 상투화된 캐치프레이즈만으로 부산을 말하기는 택도 없다.
나에게 부산은 개인의 애증사이지만, 크게는 민족의 시련을 송두리째 받아들이고 넉넉히 채워준 가마솥이다. 전쟁으로 밀어닥친 피난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안아준 넉넉한 터이자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열사를 낳은 곳이다.
바깥으로는 물건을 내다 파는 관문으로, 안으로는 민족의 주린 배를 채우는 입의 역할을 건강하게 해온 불 밝힌 항구다. 정치적 멸시와 천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야당으로 살기를 수십 년. 그래도 꿋꿋하기만 하고 뒤끝 없는 사내들의 바다이자 억척스런 삶을 시장바닥에서 보낼지언정 자식만은 당당히 키워낸 어머니들의 땅이다.
― 「부산」 부분
미천한 재주를 한탄하며 바위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어느새 도시는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사람이 만든 불이 일시에 바다를 드러내고, 어두운 산들을 드러내고, 새로운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모두 집으로 집으로 이어졌다. 바위틈을 빠져나온 나는 어둠 속에서 카메라를 챙기며 홀로 말했다.
“그래, 동쪽이면 어떻고 서쪽이면 어떠냐? 사람이 살지 않으면 별인들 무슨 소용이고 봉수댄들 무슨 소용이냐? 카메라는 온 우주를 다 담아도 그 무게 하나를 더하지 않는 법.”
― 「황령산」 부분
기억해낼 수 없는 어제는 눈을 감고 되새겨야 한다. 눈을 감은 곳에 길이 있다. 해녀들은 원망과 체념의 말 대신 오늘 집을 나서며 있었던 집안 이야기로 공허한 폐허를 메운다.
그럼! 절망으로 메울 수는 없지. 일상으로 메워야지.
밤이 되자 등대에 여지없이 불이 들어온다. 폐허 전의, 기억의 불을, 사랑하는 당신이 밝혔다.
― 「오륙도 등대」 부분
상처받은 길에 대한 사랑은 사람들의 발걸음이다. 욕망은 청춘을 상처주고 상처받은 청춘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아문다. 욕망으로 상처받고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단단히 아문 것이 길이다. 아물지 않은 것은 아직 길이 아니다. 단단히 아문 것만이 다른 상처를 치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은 단절을 넘어 연결을 꿈꾸는 자다.
― 「산복도로」 부분
그런 날 있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사랑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 도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에 미련하기만 했던 부끄러운 기억의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날.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밤새 입술을 맡겼던 눈 밑 검은 소주잔을 내던지고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겨 옛 길을 더듬다 어두운 기억의 긴 통로 끝에서 마주치는 눈빛.
― 「낙동강역」 부분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구절이다.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 경전선 낙동강역 부근이 눈에 훤하다. 작가는 “그런 날 있지 않은가? 까마득한 옛사랑이 불현듯 떠오르는 날, 도무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랑에 미련하기만 했던 부끄러운 기억의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날,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라 자문하듯 진술했다. 그런 날이 왜 없지 않겠는가. 시인이 자문하듯 불쑥 직접적으로 내뱉은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마구 후벼 판다. 강가 흐르는 물속 깊은 곳에서 북받쳐 오르는 설움 같은 사랑의 맹세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흐느적거리는 눈길을 따라, 먼 곳으로 흘러가 버린 듯한 먹먹한 추억의 시간을 따라 지나가면서 지금 우리에게 손짓을 한다. 지나가 버렸지만 늘 앞선 곳에서 다시 우리를 부르는 아름다운 사람과 풍경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바다와 산과 강이 우리를 저 높은 곳으로 보듬어 올리고선 천천히 우리 보금자리에 뉜다. 그 포근하고 따뜻한 손길이 있어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김홍희는 그런 따뜻하고 온정이 넘치는 자리에서 둘러보면서 기록하고 새기는 사람이다. 그에게서 결코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시간의 품은 나날이 또렷해지고 명확해짐에 틀림이 없다. 천천히 흐르는 산허리의 각도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북받쳐 오르는 사랑의 감정에 흐느끼면서도 아픈 자리 놓치지 않는 서늘한 눈매를 지닌 사람이 김홍희다. 그는 사진작가 이전에 평범한 부산 사람이며, 시인이기 전에 부산말로 노래하고 대화를 나누는 이웃집 아저씨다. 그는 예술가이기 전에 부산의 품에서 노닐면서 그림을 그리는 천진난만한 소년이다. 이 소년은 자신을 키워준 곳, 바로 이곳 부산이 내어준 모든 꿈과 희망과 사랑을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의리 넘치는 청년이다. 한 줄 빛처럼 은혜처럼 내리 꽂히는 예술의 영감이 그를 휘돌아 나갈 때면 또다시 새로워진 공간과 풍경이 그 앞에 오랜 나무처럼 서 있을 것이다. 이 나무는 지나간 시간 속에서 아우성치며 애타게 불렀던 이웃들의 입술과 옷자락이 스쳐 간 일기장이다. 한 장 한 장 넘기면 보이는 세계의 속살을 천천히 매만지면 되살아나는 부산, 부산 사람, 부산말, 그리고 포근한 부산의 품을 만날 수 있다. 억수로 치솟아 올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눈물 되어 흘러내린다. 부산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요 선물이다.
― 김홍희 시집 『부산』,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4,000원
― 김홍희 시집 『부산』,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