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을 답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일망무제의 들 가운데 취락이 형성되어 있어 사후에는 어디로 모실까? 라는 의문이 오늘도 여지없이 스쳐가지만, 도중에 만난 "지평선 중학교"라는 고운 교명이 여로에 지친 객에게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준다.
선천적으로 길눈이 밝다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낯선 지역에서는 시행착오도 많이도 경험했었는데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은 한반도 서해안 답사객에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 보령의 무영탑 이모님이 중간에서 만나 무량사와,성주사지를 같이 동행하자고 하신다.
참으로 고우시다.
고희를 지내신 분이 얼굴도, 말씀도, 표정도 너무 고우시다. 숨김없이 반갑게 맞이해주시고, 긴 여정을 격려해주시며, 사춘기적 소녀처럼 나보다도 더 만남을 즐거워 하신다.
이제와 생각하니 무량사 입구부터 손을 잡고 답사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들지만, 철없는 조카의 엉석이겠죠?
경주 기림사에도 매월당의 사당이 있지만, 김시습이 운수납자처럼 주유천하 하다 마지막 육신을 묻은 곳이 이 곳 이어서,매월당이 생전에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는 영정을 모신 전각과 부도가 무량사에는 남아 있다.
잠시 매월당의 일생을 살펴보자.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절개의 선비, 생육신(生六臣)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76)를 썼다.
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두산 세계 대백과 99(CD-ROM)에서-
천재가 세상을 잘 못 만났는지, 세상이 천재를 버렸는지 모르지만 일생을 비속비승으로 살다 간 매월당이 무량사에서 운명 후 사리가 나오자, 스님들이 수습하여 부도를 세우고 영정을 모셔 제를 봉사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지만 글쎄? 매월당이 지하에서 과연 웃고만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