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가장 먼저 하는 얘기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사도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를 번역한 말인데,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이 사도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이겨서 그 사람의 눈에 바르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까요? 다른 곳에 가서 씻으면 안 됩니까?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 받았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이름을 가진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은 소경이 눈을 뜨는 것처럼 영적인 소경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로 가면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실로암과 예수님은 보냄을 받았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것처럼 바울은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입니다. 사도는 자기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보낸 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이었던 것처럼 바울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지금도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선교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는 자기를 위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파송된 어떤 선지자가 있는데 열심히 자기 일만 챙기더라”라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 일에 급급한 사람은 스스로 선교사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예전에 선교사에는 가는 선교사와 보내는 선교사가 있다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는 선교사는 선교지로 직접 가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말하고 보내는 선교사는 그 선교사를 위해서 후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 표현에는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선교 사역에 대한 부담감을 호소하는 표현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현장에 나간 선교사들이 자기의 전 인생을 선교에 헌신하는 것과 같은 비중의 열심으로 물질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고 사명감을 가지고 기도에 힘쓰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하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크게 부담 되지도 않는 액수를 헌금하고, 어쩌다 생각날 때 가끔 기도하는 것으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선교 사명을 다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오산입니다.
예전에 ‘어차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선교사로 쓰시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맞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선교사로 부르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합니까? 하나님이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싫은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어? 나도 내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하는 건가?”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가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언제나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자기에게는 그 말씀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언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