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는 영양(榮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안과 같이 공부하여 공손과 겸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논리의 벼리를 훌륭하게 표명하고, 의문 나고 막힌 점은 슬기롭게 풀이할 수 있었다.
석씨(石氏)의 난으로 인하여 문도들을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덕을 사모하는 파한(巴漢)의 선비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양양(襄陽)이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촉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양평사(陽平寺)에 머물렀다. 그 후 금여곡(金輿谷)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도안과 더불어 산마루에 올라가, 눈길이 닿는 끝까지 두루 바라보다가 슬퍼하였다.
“이 산은 높이 솟아, 노닐며 바라보는 사람이 많네. 세월이 흘러 한 번 변화하면, 마침내 누가 이 산임을 헤아리겠나?”
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마음에 지닌 것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뒷사람들을 걱정하는가? 만약 지혜로운 마음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후 도안과 함께 새로 나온 경전을 자세히 정리하고 글 뜻을 참작하여 바로잡았다.
이 무렵 위진(僞晋)의 왕 요서(姚緖)가 초청하여, 포판(蒲坂)에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 제자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세속 안에서의 번뇌와 고루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라.”
곧 의복을 바로 하고 불상을 빙 돌아 예배하였다. 다시 본래의 자리에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