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군사 정권으로부터 납치, 가택연금, 투옥, 망명 등 탄압
-인권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2000년 12월 10일 김대중 대통령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수상
2000년 6월 15일, 첫 남북 정상 회담을 마치고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한 뒤 발표한 대국민 보고.
김대중 대통령 방북성과 대국민 보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역사적인 방북 임무를 대과 없이 마치고 지금 귀국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밤잠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환호해 주신 국민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려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새 날이 밝아온 것 같습니다. 55년 분단과 적대에 종지부를 찍고 민족사에 새 전기를 열 수 있는 그런 시점에 우리가 이른 것 같습니다. 이번 저의 방북이 한반도에서의 평화, 남북간의 교류 협력, 그리고 우리 조국의 통일로 가는 길을 닦는 데 첫걸음이 됐으면 더 이상 다행이 없겠습니다.
이번에 김정일 위원장은 제가 기대했던 이상의 환대를 저에게 베풀었습니다. 공항에 직접 출영하고, 오늘 돌아올 때 공항에도 환송을 나와 주었습니다. 회담과정에서는 때로는 절망적인 생각을 가질 때가 몇 번 있었지만 우리가 성의껏 노력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상당한 협력을 하고 이렇게 해서 여러분께 바친 합의를 도출했습니다. 평양시에 들어갈 때 60만, 나올 때 30∼40만, 모두 약 100만의 평양 시민이 열광적으로 저를 환영하고 환송해 주었습니다. 평양 역사상 처음 있는 큰 군중의 환영이었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평양 시민의 환영에 대해서, 같은 혈육의 정으로서 환영해 준 그들에 대해서 여러분과 같이 감사의 박수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세계 여론의 한결같은, 거의 한 나라의 예외도 없는 적극적인 성원, 언론들의 보도에 대해서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평양에 있으면서 국내의 TV도 보고 신문도 봤습니다. 아마 우리 역사에 전례가 없을 정도의 대대적인 보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제가 그렇게 보도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죄송하기도 하고 다시 없이 감사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언론이 우리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얼마나 열망하는가 하는 증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우리 언론에 대해서도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우리 양 정상은 민족과 세계에 대한 책임을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성공을 못 했을 때 그 엄청난 파장, 우리가 성공적으로 했을 때 가져올 세계사적 큰 발전과 전환, 이런 것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성공을 위한 노력을 하는데 온갖 성의와 지혜를 다하자 이렇게 다짐을 몇 번 했었습니다. 저를 수행한 우리 보좌진이나 또 특별 수행한 분들도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북측 사람들과 만나서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고 저의 일을 지원하는데 측면 지원의 역할을 많이 해 줬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만난 것이 중요합니다. 평양도 가보니까 우리 땅이었습니다. 평양에 사는 사람도 우리하고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들도 겉으로는 뭐라고 말하고 살아왔건 마음 속으로는 남쪽 동포들에 대해서 그리움과 사랑의 정이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을 조금 말해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반만년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으로서 살아왔습니다. 통일을 이룩한지도 13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 민족이 타의에 의한 불과 55년의 분단 때문에 영원히 서로 외면하거나 정신적으로 남남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번에 가서 현지에서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미래에 화해도 할 수 있고, 협력도 할 수 있고, 통일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북측의 김정일 위원장하고 얘기했습니다. 과거 조선왕조 말엽에 국민이 단합하고 근대화를 서둘러야 할 때 내부가 산산히 분열되고 근대화를 외면하다가 결국 망국의 설움을 얻고 일제 35년 8.15의 분단, 6.25의 전쟁, 지금까지의 철조망을 사이에 놓고 대립, 100년의 앙화를 우리 후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 지금 세계가 지식 정보화 시대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혁명의 시대에 들어가고 있고 경제적 국경이 없는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로 들어가고 있는 이런 때에 우리 같은 민족끼리 내부에서 힘을 탕진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협력해서 당장의 통일은 안 되더라도 남과 북이 서로 협력해서 하늘도 트고, 길도 트고, 항구도 트고, 서로 왕래하고 협력하고 같이 경제 발전시키고 문화 교류, 체육 교류 이렇게 해 나간다면 한국 민족이 가지고 있는 높은 교육적 전통, 문화 창조력 이것이 21세기의 지식기반시대에 가장 적합한 우리의 자산이 아니겠는가. 이제 4대국이 우리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4대국이 우리 시장으로서 우리가 그 한복판에서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시대다.이 때 우리가 정신차려서 남북이 협력하지 않고 우리끼리 싸운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적화 통일도 안 되고 흡수 통일도 안 되고 남북이 서로 공존공영을 하면서 차츰 통일의 길로 나가자. 민족을 이 21세기의 절호의 시대에 세계 일류의 그러한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북한 측에 역설하고 그분들도 동감을 표시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만 모든 것이 다 잘 됐고 아무 걱정 없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가능성을 보고 왔다는 것뿐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또 성의가 필요합니다. 역지사지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안보, 대한민국의 주체성, 여기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되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협력해서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밟아가면서 종국에는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 길입니다.
저는 이번에 북측에 대해서 서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하자고 했고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문서로 만들어서 전달해 주었습니다. 핵 이야기도 했고 미사일 이야기도 했습니다. 주한미군 문제도 나왔고 국가보안법 문제도 나왔습니다. 얘기한 가운데 그 대화가 매우 유익했으며 그중에는 아주 좋은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국민에게 발표한 남북공동선언서에 대해서 간단히 몇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민족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한다, 이것은 7.4공동성명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북한 분들에게 얘기했습니다. 우리 문제는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7.4공동성명 발표한 것이 28년인데 아무 것도 되지 않았느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얘기했는데 아무 것도 안되지 않았느냐. 또 92년 2월에 남북이 합의서를 발표해서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 비핵화 선언 등을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대원칙을 주장하던 7.4공동성명, 구체적인 방안을 주장하던 남북합의서 다 효과를 못 봤다면 이제는 아주 구체적으로 손에 쥔 것부터 실천을 우리가 보여주자. 이 정상회담은 바로 실천을 보여주는 회담이다. 옛날하고 똑같이 민족 자주, 통일, 평화 이런 듣기 좋은 말만해서는 이제는 세계도 우리 민족도 그것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2항 이하에는 좀 구체적인 이야기에 합의를 봤습니다. 실천을 곧 할 수 있는 일에 합의를 봤습니다.
그 2항은 우리가 주장해 온 남북연합입니다. 즉 2체제 2정부를 현재대로 놔두고 남북 양쪽에서 수뇌회의를 구성하고 장관 각료급 회의를 구성하고 국회회의를 구성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합의기관을 만들어서 차츰차츰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자 하는 것이 우리의 연합제입니다.
그에 비해 1980년 북한은 연방제를 주장했습니다. 처음부터 바로 중앙정부가 외교권, 군대통솔권을 다 가져야 한다. 남북 양쪽의 지방정부는 내정권만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전연 이행 불가능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근자에 북한은 이 점을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이름으로 중앙 연방이 갖겠다는 외교와 군사권을 지방정부가 그대로 가져도 좋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우리가 주장한 대로입니다. 이것은 상통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앞으로 양쪽 대표가 한번 같이 문제를 토론해 보자, 학자들도 오고 전문가들도 와서 한 번 얘기해 보자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통일운동 사상에서 아주 구체적인 합의점을 발견하기 위한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셋째는 남과 북은 오는 8.15에 즈음하여 이산가족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께 얘기할 것은 이 문장 해석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실향민, 흩어진 이산 가족들의 문제가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공항에 나오면서 김정일 위원장하고 다시 이 문제를 얘기했습니다. 이번 8.15까지 북에서 여러분이 말하는 대로 통크게 한 번 하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말한 장기수 문제라든가 그런 것도 내가 국민하고 상의해서 처리하겠소. 먼저 잘 하시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6월 달부터 적십자사가 곧 가동을 합니다. 이것도 오늘 합의를 해서 내가 서울 돌아가는 즉시로 적십자에 요청해서 북하고 접촉하라고 하겠다고 했고, 김정일 위원장도 좋다고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이산가족의 상봉 문제는 앞으로 그 범위가 얼마만큼 갈지 아직 다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규모에서 이 문제가 시작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렇게 북한하고 합의봤다는 것을 여러분께 보고 드립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에서도 교류 협력을 증대시키기로 했습니다. 경제 협력 문제를 말씀드리면, 북한이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협력이 도움이 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으로 들어가서 철도를 깔고, 전력 문제를 해결하고, 도로·항만·통신 등을 해 나갈 때, 또 북한에다가 공단을 만들어서 진출할 때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는 남한 내부에서의 경제가 한반도 전체의 경제로 발전되어 나갈 것이고 그런 가운데 북도 남도 다같이 큰 혜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기차가 왜 런던을 못 가고 왜 파리를 못 갑니까? 경의선, 경원선이 끊어졌기 때문에 못 갑니다. 만주에서는 기차들이 자유롭게 가지 않습니까? 경인선은 불과 25킬로 정도밖에 끊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것만 이으면 곧 갈 수 있습니다. 운송비가 30%가 절감이 되고, 수송 날짜가 훨씬 줄어듭니다. 북한하고만 해결되면 우리는 유럽까지 승승장구 뻗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새로운 천년의 실크로드가 생겨나서 남북 양측이 크게 경제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또 북한의 노동력이 대단히 우수하다는 것은 신문에 여러 번 났습니다. 노임도 훨씬 저렴합니다. 남한에서 경쟁력이 약한 중소기업들도 북한에 가면 충분히 경쟁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측이 다 도움이 됩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철칙으로 둬야 할 것은 남만 좋아도 안되고 북만 좋아도 안되고 양쪽이 다 좋아야 오래 가고 그래야 화해가 있고 협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윈윈 정책으로 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류 협력을 경제뿐 아니라 문화, 체육 모든 분야에서 해가기로 김정일 위원장과 확실히 합의를 봤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이 없어서 생략합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인 실천을 처리하기 위해서 남북에서 임명한 당국자들이 곧 북한하고 접촉해서 구체적으로 일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에 대해서는 이것을 합의하는데 좀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하고 합의된 시일 중에 택해서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하는 것을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김정일 위원장한테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서울을 와야 우리 민족이나 세계 사람들이 남북 관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나만 왔다가고 김 위원장은 안 오면 저거 일회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를 잘 아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김 위원장보다도 10여 살 위인데 당신보다 더 나이 먹은 노인이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이 안 온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이런 말도 했습니다.
그러면 이상으로 보고 말씀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북한은 다같은 우리 강산이고, 다같은 우리 민족이 사는 곳이고, 다같은 한국 사람의 생각과 인정과 모든 생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 우리하고 아주 상이한 사상적 토양에서, 그런 정치체제 아래서, 그런 사회주의 제도 하에서 살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한국 사람 특유의 급한 성격을 가지고 풀려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합의만 해놓고 7.4 공동선언이 28년간 안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도 우리 동포다, 그들도 우리하고 같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도 이익이 되고 우리도 이익이 되는 일을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부터 가능한 것부터,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당연히 믿음이 생기고 이해가 일치합니다. 그런 토대만 닦아놓고 내가 물러난다면 또 뒤에 오는 분이 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 " 더 이상 전쟁은 없다, 적화통일도 용납하지 않지만 우리도 북한을 해치지 않겠다, 반드시 같이 공존공영해서 우리 한민족이 한번 새로운 21세기에 같이 손잡고 크게 세계 속에서 일류 국가로 웅비해 보자, 주변 4대국이 이제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전부 우리 시장이다,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지적 기반,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정보화 시대에, 지식기반시대에 이런 거대한 시장을 개척해나가자 " 하는 각오를 가지고 여러분께서 북한을 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보는 철통같이 하되, 그러나 전쟁을 막기 위한 안보, 그리고 결국은 남북이 화해 협력하기 위한 안보, 이런 방향으로 나갈 때 나는 우리 조상들이 도와서 하늘이 도와서 우리 민족의 미래가 열릴 것이 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한반도 전체의 조국을, 번영된 조국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여러분께 다시 한번 그 동안의 성원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저에게 있는 능력껏 힘을 다해서 국민여러분께 봉사하겠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오늘은 적당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줄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건승을 빌고 성원에 감사하면서 저의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의 생애(1924.1.6-2009.8.18)
5·16군사정변(1961)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납치·테러·사형선고·투옥(6년)·망명(10년)·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졌다. '인동초'(忍冬草)·'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2000)을 수상했다.
성장기와 정치 입문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8·15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나자 이 회사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목포일보〉 사장(1948~50)을 지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는 해상방위대 전라남도지구 부대장(1950),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1951), 흥국해운·대양조선공업 사장(1951)을 역임했다. 1954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제4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데 이어 2차례 더 낙선했으며,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 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강제해산되는 바람에 의원등록조차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6·7·8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대변인(1960), 통합야당 민중당 대변인(1965),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1966), 신민당 대변인(1967)을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고난의 행로
마침내 3선개헌 다음해인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되었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의원이 함께 출마해 3파전으로 진행된 이 전당대회에서 소수파인 그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에 밀려 2위에 그쳤으나 2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의 김영삼 지지에 반발한 이철승이 지지표를 몰아줌으로써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선거과정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진 선거부정을 빗대어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 중이던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다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해 대일관계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되었다.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이듬해 3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신정권은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켰다. 그러나 그는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12사태(1979)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도발에 대한 우려는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통해 현실화했다. 이때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었다. 정부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시민군이 무력으로 맞선 5·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일본·독일·프랑스를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집권과정
김대중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그가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이 제12대 총선에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데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29선언으로 후퇴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그는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이듬해(1988)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은 정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요약되는 이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약칭 신민연)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해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했다.
1992년 12월 18일 그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원직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충격적이고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1995년 6·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7월에는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애써 무시하며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의 지위를 굳히자 그는 오직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향해 질주했으며,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평가
김대중의 당선은 건국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해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한편,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국위를 선양했다.
6선 의원을 역임한 김대중은 정치활동 외에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평화를 위하여〉, 〈민족의 내일을 생각하며〉, 〈공화국연합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나의 길 나의 사상〉, 〈후광 김대중대전집〉(전15권), 〈21세기 시민경제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를 냈으며, 1992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아키노의 운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지난 시절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한국의 만델라라고 말하지만, 1980년대 초에는 한국의 아키노(B.S.Aquino)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만델라와 김대중은 긴 억압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전 세계로 신장시켰다는 의미에서 상징적 닮은꼴이지만, 필리핀의 전 상원의원이었던 아키노는 보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비교 조명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리핀 야당 지도자였던 아키노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역정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아키노는 1977년, F.E.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의 독재에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1980년 심장병 수술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아키노는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반 마르크스 운동에 앞장섭니다. 독재자 마르크스에게는 눈에 가시이자 정적 1호였습니다.
아키노는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결심, 1983년 8월 21일 마닐라공항에 도착 하자마자 청부살인자 롤란도 길만에게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갈만 또한 군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피격됨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갈만이 단독 범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나가시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18년 마르크스 장기 집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필리핀 법원은 4년 뒤에야 갈만의 살해 혐의로 16명의 군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망명길에 오르지요.
김대중 대통령도 1980년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지만 국제사회의 압력과 국내 여론이 거세게 일자, 형집행 정지 선고를 내립니다. 1982년 김대중 대통령은 사선을 넘어 생애 두 번째의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김대중은 조국의 현실이 걱정되어, 1985년 2월 8일 죽음을 무릎 쓰고 귀국하게 됩니다. 미국의 민주당 인사들과 정치학자들은 필리핀의 아키노처럼 또 한 번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 귀국 비행기에 같이 탑승하게 됩니다. 만약 아키노암살이라는 세계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오늘 갑자기 아키노의 얼굴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떠오릅니다. 아키노의 부인(코라손 아키노)은 남편의 뒤를 이어 정치가로 변신, 반 마르코스 열풍을 일으키며 일부의 군부세력과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됩니다. 만약 아키노의 죽음이 없었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길에 올라, 신군부에 의해 암살당했다면. 이희호 여사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남편의 뒤를 이어 민주투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만약 과거 역사의 경험이 없었다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되었을까, 아니면. 독재에 맞서 더 빨리 민주화투쟁이 점화되었을 수 있었다는 가정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만델라를 넘어, 한국의 아키노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와 세계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하신 김대중 대통령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대중도서관 옮긴글===
김대중 납치사건(1973.8.8)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입니다.
사건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水葬)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박정희의 최대의 정적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중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정력적으로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한편, 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 그 명예회장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을 결성할 예정이었습니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권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고, 이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외의 비난여론은 일제히 박정권에 집중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권력 개입설을 완강히 거부하던 한국정부는 일본 경시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관련자의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내에서는 <국권 침해>에 대한 강력한 비난여론이 대두,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갑자기 교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간의 막후 절충을 통해 관계정상화가 시도되어
△1등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발생 86일 만에 김대중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지어졌습니다.
이로써 무기연기되었던 한일각료회의가 12월 22일 열리고 중단된 차관사업도 재개되었으나, 주권침해·한국중앙정보부 관련설·범인출두·김대중의 원상회복 문제 등은 사건진상과 더불어 세월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식(2000.12.10)
노벨 평화상( - 平和賞, 스웨덴어: Nobels fredspris, 노르웨이어: Nobels fredspris, 영어: Nobel Peace Prize)은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5가지 부문 중의 하나인 노벨상이다. 국가간의 우호, 군비의 감축, 평화교섭 등에 큰 공헌이 있는 인물이나 단체에게 주어진다. 수상식은 다른 부문과 달리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국회에서 열린다. 1914년~1918년, 1939년~1943년까지는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1966년과 1967년에도 수상자가 없어서 시상식을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가 수상하는 등 정치적 시국과 역행하여 수상기준이 정해지는 경향이 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수십년간 전제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수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