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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平安道] 강서군[江西郡]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을지문덕[乙支文德]
그대의 신기[神技]한 책략[策略]은 하늘의 이치[理致]를 다했고 [神策究天文]
오묘[奧妙]한 계책[計策]은 땅의 이치[理致]를 다했노라.[妙算窮地理]
전쟁[戰爭]에 이겨 그 공[功] 이미 높으니 [戰勝功旣高]
족[足]함을 알거든 이에 그만두기 바라노라. [知足願云止]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고조선[古朝鮮]의 적장자[嫡長子]로서, 천자[天子]의 나라이며,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포함하여 가장 큰 대제국[大帝國]를 이룩한 역사[歷史]로 기록[記錄] 되고 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살수대첩[薩水大捷]은, 고구려[高句麗]의 위상[位相]과 고구려[高句麗]의 기상[氣像]이 어떠했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韓國]사람이라면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조선[朝鮮]의 세조[世祖]도 인정했던 고구려[高句麗]의 막강하고 강력[强力]한 군세[軍勢],.......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가장 강력[强力]했던 고구려[高句麗]의 군사력[軍事力]과 국력[國力]은, 일천년[一千年]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와 더불어 천제[天帝]의 후손[後孫]으로서, 천하[天下]에 천자국[天子國]의 위엄[威嚴]과 위상[位相]을 유감[遺憾]없이 보여준 우리 역사[歷史]의 금자탑[金字塔] 이었다.
거란[契丹]이 고구려[高句麗]의 구지[舊地]인 서북방[西北方]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고려[高麗]에 대하여, 우리가 고구려[高句麗]을 이어 일어났다고 큰 소리를 친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을 예외[例外]로 하더라도, 고구려[高句麗]는 대륙[大陸]을 가로 지르는 동서[東西] 이만리[二萬里]를 아우르던 천하[天下]의 대제국[大帝國] 이었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기록[記錄]에서, 다른 어느 왕조[王朝]보다도 가장 많은 분량[分量]의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記錄]을 전[傳]해야 하는 것이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굴욕[屈辱]적인 기록[記錄]들과, 고구려[高句麗] 제왕[帝王]들의 릉[陵]소재 조차도, 태반이 사라진 간략[簡略]하고 소략[疏略]한 기록[記錄]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記錄]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가장 강대[强大]한 시기였으며, 나라의 강토[疆土]를 크게 넓히고 대제국[大帝國]의 위용[威容]을 천하[天下]에 유감없이 발휘하여, 무공[武功]이 사해[四海]를 울리고 천하[天下]를 진동[震動]시킨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역사[歷史],........ 살수대첩[薩水大捷] 이전의 역사[歷史]인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용병술[用兵術]이 신출귀몰[神出鬼沒] 했다고 사서[史書]는 적고 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활약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극히 짧고 빈약[貧弱]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웅혼[雄渾]했던 역사[歷史]의 일부[一部]도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을 통해서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만년[一萬年]을 오르내리는 유구[悠久]하고 장구[長久]한 역사[歷史]속에서, 근세[近世]에 나라를 잃고 치욕[恥辱]을 당한 것은 불과 반세기[半世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반만년[半萬年]의 위대[偉大]하고 장엄[莊嚴]한 우리 선대[先代]의 역사[歷史]는, 한줄기 가느다란 희망만을 가슴에 품고 처절하게 무너지고 멸실[滅失] 되고 말았다.
이보다 더 한심[寒心]하고 개탄[慨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은, 우리 조상[祖上]의 역사[歷史]인 선대[先代]의 역사[歷史]를 부정[否定]하고, 역사[歷史]도 아닌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을,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가르치는 한국[韓國] 역사계[歷史界]의 현실[現實]이다, 이는 만고[萬古]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 어떠한 괴변[怪辨]이나 변명[辨明]으로도 용납[容納] 될 수 없는 행태[行態]이다.
이는 선대[先代]와 자라나는 후손[後孫]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업[罪業]을 짓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은, 크게 자각[自覺]하고, 크게 반성[反省]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역사[歷史]가,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역사[歷史]속의 나라들에 대하여 사대[事大]를 하고 속국[屬國]이었다고 하는 것인가 ?
천년[千年]에서 오백년[五百年]을 오르내리는 우리 역사[歷史]의 왕조[王朝]들이, 수백[數百], 수[數] 십년[十年]만에 망해 버린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에게 무엇이 속국[屬國] 노릇을 하며, 무엇이 대대로 사대[事大]를 했단 말인가 ?
무엇이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인가 ? 주[周]나라가 중국[中國]인가 ? 한[漢]나라가 중국[中國]인가 ? 당[唐]나라가 중국[中國]인가 ? 명[明]나라가 중국[中國] 이었던가 ? 이러한 나라들이 있었던 지역[地域]의 위치[位置]는, 하나씩 들어나는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따라 가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歷史]와는 전혀 다른, 태반[太半]이 거짓이었다는 것이 들어나고 있다.
선비[鮮卑]의 계열이라는 당[唐]나라, 몽고족[蒙古族]이라는 원[元]나라, 숙신[肅愼]의 금[金]나라, 북위[北魏], 거란[契丹], 요[遼]나라, 원[元]을 몰아내고 연경[燕京]에 도읍[都邑]을 정한 명[明]나라를 포함하여, 근대[近代]의 조선[朝鮮]과 역사[歷史]를 함께한 청[淸]나라가 어찌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이 될 수 있겠는가 ?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은, 모두 고구려[高句麗]의 내지[內地]에 있던 고구려[高句麗]의 일원 들이었다. 또한, 이 나라들이 위치[位置]했던 지역[地域]은, 요하[遼河]의 서[西]쪽인 요서[遼西], 대륙[大陸]의 서[西]쪽과 서북방[西北方] 지역[地域] 이었다.
은[殷]나라의 기자[箕子]는, 동방[東方]의 고조선[古朝鮮] 평양[平壤]으로 왔다. 은[殷]과 고조선[古朝鮮]은. 이름만 달리 할뿐이지 우리 선대[先代]의 왕조[王朝] 들이다. 이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지금도 수 많은 중국[中國] 사람들이 한족[漢族]이라는 것을 부정[否定]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알고는 있는가 ?
동방[東方]의 성인[聖人]이요. 유학[儒學]]의 선성[先聖]으로 추존[推尊]되는 공자[孔子]는 어느 나라 사람이었을까 ? 우리의 선대[先代]들이 유학[儒學]을 학문[學文]의 정수[精髓]로 삼고, 공자[孔子]를 높이 존숭[尊崇]한 것은, 공자[孔子]는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선대[先代]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깡그리 무시하고, 공자[孔子]는 중국[中國] 사람이며, 한학[漢學]은 중국[中國]의 것이라고 가르쳐온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우리의 역사[歷史]와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 줌 식민[植民]의 쓰레기일 뿐이다.
사기[史記]
사기권사십칠[史記卷四十七]
공자세가제십칠[孔子世家 第十七]
孔子病 子貢請見 孔子方負杖逍遙於門 曰 賜 汝來何 其晚也 孔子因歎 歌曰 太山壞乎 樑柱摧乎 哲人萎乎 因以涕下 [중략]
공자[孔子]는 병이 들었다. 자공[子貢]이 찾아가자 공자[孔子]는 지팡이를 짚고 문앞을 거닐고 있었다. 공자[孔子]는 자공[子貢]을 보자, 너무 늦게 오는구나 ! 공자[孔子]는 길게 탄식[歎息]하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太山]은 무너 지는가 ? 기둥[樑柱]은 부러 지는가 ? 철인[哲人]은 시드는가 ? 노래를 하고 있는 동안에 공자[孔子]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중략]
謂子貢曰 天下無道久矣 莫能宗予 夏人殯於東階 周人於西階 殷人兩柱閒 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予始殷人也 後七日卒 [중략]
듣거라 자공[子貢]아, 천하[天下]의 도[道]가 상실[喪失]된지 이미 오래고 나를 따라오는 자도 없다. 하[夏]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빈소[殯所]를 동계[東階] 모시고, 주[周]나라는 서계[西階]에 모신다. 은[殷]나라는 양주[兩柱] 사이에 모시느니라. 나는 어제 밤에, 양주[兩柱] 사이에 앉아서 제물[祭物]을 받고 있는 꿈을 꾸었다. 나의 선대[先代] 시조[始祖]는 은[殷]나라 사람이니라. 이 일이 있고 칠일[七日] 후[後]에 공자[孔子]는 세상을 떠났다. [중략]
은[殷]나라의 신하[臣下]이며, 은[殷]나라의 제후[諸侯]로, 주[周]나라를 세운 문왕[文王],....... 은[殷]나라가 멸망[滅亡]하고 주[周]나라를 피하여 동[東]쪽의 고조선[古朝鮮]으로 건너온 은[殷]나라의 기자[箕子],........ 문왕[文王]과 기자[箕子]는, 누가 화[華]의 근본[根本]이며, 누가 화[華]의 본체[本體]인가 ? 기자[箕子]가 은[殷]나라를 떠나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펴고 뼈를 묻은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은, 화[華]의 본체[本體]이며, 이 지역[地域]의 인근[隣近]은 화[華]의 중심[中心] 무대였다.
이는 근세[近世]의 조선[朝鮮] 말엽까지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통하여 확고[確固]히 증명[證明]이 되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과 인접한 요동[遼東]을 근거지[根據地]로 하여 일어났던 나라들이, 한결 같이 중국[中國]의 행세[行世]를 한 것은,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척발위론[拓跋魏論]
聖人之法 以中國而夷狄則夷狄之 以夷狄而中國則中國之 中國與夷狄 在其道與政 不在乎疆域也 [중략]
성인[聖人]의 법[法]은, 중국[中國]이면서도 오랑캐와 같은 행동을 하면 오랑캐로 대우하고, 오랑캐이면서도 중국[中國]과 같은 행동을 하면 중국[中國]으로 대우한다. 중국[中國]과 이적[夷狄]의 구분[區分]은 도[道]와 정치[政治]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지 강역[疆域]의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중략]
故周之先 間於獯粥混夷之中 未嘗非夷狄也 而一朝有如太王王季者興 而禮樂文物可述焉則中國之 [중략]
옛 주[周] 나라의 선대[先代]는 훈육[獯鬻]과 곤이[昆夷] 사이에 있었으니 이적[夷狄] 아닐 수 없으나, 하루아침에 태왕[太王], 왕계[王季] 같은 이들이 일어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참신하여지자 중국[中國]으로 대우한 것이다. [중략]
秦之先 伯益之後也 未嘗非中國也 而自非子以來 崇利棄義 不肯與中國和好焉則夷狄之 聖人之處夷夏也 本如是矣 [중략]
진[秦] 나라의 선대[先代]는 백익[伯益]의 후손[後孫]이니 중국[中國]이라 아니할 수 없으나, 비자[非子] 이후로 이[利]만 숭상[崇尙]한 채 의[義]를 외면하고, 중국[中國]의 화호[和好]에 참여하려 하지 않자 이적[夷狄]으로 대우했다. 성인[聖人]이 이[夷]와 하[夏]를 결정짓는 것이 본디 이와 같은 것이다. [중략]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記錄]과는 다른 천년[千年]의 역사[歷史]를 간직한 나라였다. 이러한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흔적[痕迹]은, 키르키즈스탄 과 카자흐스탄, 중국[中國]이 위치[位置]한 천산[天山]의 광범위[廣範圍]한 지역[地域]에 널리 분포[分布]되어 있다. 오늘날 현지[現地]의 키르키즈스탄 사람들이 자신들은 홀본[忽本]의 후예[後裔]들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은, 고구려[高句麗]와 이 지역[地域]에 대한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한마디로 웅변[雄辯]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高句麗] 평안도[平安道]의 강서현[江西縣]에는, 수[數] 천년[千年]을 두고 변함없이 세월의 풍파[風波]를 견디어 온 사찰[寺刹]이 하나 있다. 천층[千層]의 암석[巖石]으로 이루어진, 암벽[巖壁]의 깍아지른 산[山]의 중턱에 세워진 유명한 이 사찰[寺刹]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리에서 요동[遼東]과 평양부[平壤府]를 내려다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찰[寺刹]이 있는 이 지역[地域]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의 형세[形勢]가,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하고 있는, 시[詩]의 내용과 그림과 같이 닮아 있으니, 이는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귀중[貴重]하고 소중[所重]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광대[廣大]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은 깊고도 깊다. 그러므로 태고[太古]의 아득히 깍아지른 암벽[巖壁]의 천년[千年] 고찰[古刹]은, 옛 평양[平壤]의 등화[燈火]을 오늘도 밝히고 있는 것이리라.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평양부[平壤府]
강서현[江西縣]
仁宗十四年 分京畿爲六縣 以梨岳 大垢 甲岳 角墓 禿村 甑山等鄕 合爲本縣 置令 仍爲屬縣 [중략]
인종[仁宗] 14년에 경기[京畿]를 6개 현[縣]으로 나누면서 이악[梨岳], 대구[大垢], 갑악[甲岳], 각묘[角墓], 독촌[禿村], 증산(甑山) 등의 향[鄕]을 합하여 강서현[江西縣]으로 하고 영[令]을 두었으며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중략]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강서현[江西縣]
江西 縣令一人 兼平壤道右翼兵馬 高麗 仁宗十四年丙辰分西京畿爲六縣時 以梨岳 大垢 甲岳 角墓 禿村 甑山等鄕 合爲江西縣 置令 [중략]
강서현[江西縣], 영[令] 1인 평양도[平壤道] 우익 병마[平壤道右翼兵馬]를 겸한다. 고려[高麗] 인종[仁宗] 14년 병진[丙辰]에 서경기[西京畿]를 나누어 6현[縣]으로 만들때, 이악[梨岳], 대구[大垢], 갑악[甲岳], 각묘[角墓], 독촌[禿村], 증산[甑山]등의 향[鄕]을 합쳐서 강서현[江西縣]으로 하여 영[令]을 두었다. [중략]
舞鶴山 在縣北 縣人以爲鎭山 四境 東距平壤七里 西距咸從十里 南距龍岡十五里 北距甑山十二里 [중략]
무학산[舞鶴山]이 현[縣]의 북[北]쪽에 있는데, 현인[縣人]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사방[四方] 경계[境界]는 동[東]쪽으로 평양[平壤]에 이르기 7리, 서[西]쪽으로 함종[咸從]에 이르기 10리, 남[南]쪽으로 용강[龍岡]에 이르기 15리, 북[北]쪽으로 증산[甑山]에 이르기 12리이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平安道]
강서현[江西縣]
동[東]쪽으로는 평양부[平壤府] 경계[境界]까지 13리, 남[南]쪽으로는 용강현[龍 岡縣] 경계[境界]까지 18리, 중화군[中和郡] 경계[境界]까지 29리, 서[西]쪽으로는 함종현[咸從縣] 경계[境界]까지 18리, 북[北]쪽으로는 증산현[甑山縣] 境界[境界]까지 3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1리이다. [중략]
건치연혁[建置沿革]
고려[高麗] 인종[仁宗] 14년에 서경[西京] 경내를 나누어 이악[梨岳], 대구[大垢], 갑악[甲岳], 각묘[角墓], 독촌[禿村], 증산[甑山]등의 고을을 합하여 강서현[江西縣]으로 만들고 영을 두었으며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에 증산[甑山]을 나누어 따로 현령[縣令]을 두었다. [중략]
군명[郡名], 무학[舞鶴]
산천[山川]
무학산[舞鶴山] 현[縣]의 북[北]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구룡산[九龍山] 현[縣]의 남[南]쪽 15리에 있는데 서학산[栖鶴山]이라고도 한다. 학란구[鶴卵丘] 현[縣]의 남[南]쪽 3리에 있는데, 속담에, 술자[術者]가 현[縣]의 진산[鎭山]을 무학[舞鶴]이라 이름하였으므로 이 언덕을 학[鶴]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쌓았다 한다. 물고교포[勿古橋浦] 현[縣]의 남[南]쪽 5리에 있는데 중화현[中和縣] 이진[梨津]으로 들어간다.
학교[學校], 향교[鄕校] 현[縣]의 서[西]쪽 1리에 있다.
누정[樓亭], 무학정[舞鶴亭] 객관 북[北]쪽에 있다.
불우[佛宇]
등고사[登高寺], 무학산[舞鶴山] 꼭대기에 있는데 수천[數千] 장[丈]의 층암[層巖]이 있다. 동림사[東林寺], 중학산[中鶴山]에 있다. 서림사[西林寺], 정림산[正林山]에 있다. [중략]
사묘[祠廟]
사직단[社稷壇], 현[縣]의 서[西]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縣]의 북[北]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현[縣]의 북[北]쪽에 있다. [중략]
제영[題詠]
隱隱山圍一小鄕, 은은히 먼 산은 어떤 작은 고을을 둘러쌌다. 황희[黃喜]의 시[詩]에,.......... 은은[隱隱]히 먼 산은 어떤 작은 고을을 둘러쌌고, 인가[人家]는 물에 임하고 땅은 뽕나무에 알맞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송경지서대인작[松京志序代人作] 계미[癸未]
自高麗以來 統合三韓 幅員無缺 乃其剏業之初 於蜀莫古郡 肇開京邑 號之曰開城 至文宗之世 以平壤爲西京 漢陽爲南京 開城爲中京 而中京之名起焉 [중략]
고려[高麗]로부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지역[地域]이 이지러진 데가 없었다. 그 창업[創業]하던 초기에는 촉막[蜀莫]의 옛 고을에 처음으로 경읍[京邑]을 정하여 개성[開城]이라 부르더니, 문종[文宗] 시대에 와서는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한양[漢陽]을 남경[南京]이라 하고,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이라 하여 중경[中京]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었다. [중략]
我太朝始都中京 後定鼎于漢陽 則中京亦聖朝之舊都 不可曰勝國之遺墟已也 高句麗旣都平壤 復以漢陽爲南平壤 則西京南京 其稱已久 而中京其後出者 [중략]
우리 태조[太祖]는 처음에는 중경[中京]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뒤에 다시 한양[漢陽]에 도읍[都邑]을 정하였다. 그렇다면 중경[中京]은 성조[聖朝]의 구도[舊都]이기도 하니, 이곳을 고려[高麗]의 유허[遺墟]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고구려[高句麗]는 평양[平壤]에 도읍[都邑]하고 나서 다시 한양[漢陽]을 남평양[南平壤]으로 삼았으니, 서경[西京]과 남경[南京]은 그 칭호[稱號]가 이미 오래되었고, 중경[中京]은 그 뒤에 불려진 이름이다.[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압해정승묘변[押海政丞墓辨]
余攷句麗百濟之亡 始以李世勣管西方 劉仁願鎭南方 然未幾皆撤還 唯於西方置安東都督府 以綰其財利 然所謂安東都督府 [중략]
나는 상고[相考]하건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멸망[滅亡]하자 비로소 이세적[李世勣]으로 하여금 서방[西方]을 관리[管理]하게 하였으며,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남방[南方]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모두 철수[撤收]하여 돌아갔고, 오직 서방[西方]에만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設置]하여 그곳의 재리[財利]를 통괄하였다.[중략]
始在平壤 後徙遼東 又徙遼西 日蹙以遠 下逮天寶之亂 遂棄不顧 新羅遂得混一 不復爲內地 [중략]
처음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가 평양[平壤]에 있다가 나중에는 요동[遼東]으로 옮기었고, 또 요서[遼西]로 옮기는 등 날로 퇴축[退縮]되어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아래로 천보[天寶]의 난[亂]에 미쳐서는 드디어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신라[新羅]가 통일[統一] 하여 다시는 당[唐] 나라의 내지[內地]가 되지 않았다. [중략]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송한교리치응사연서시위서장관[送韓校理致應使燕序時爲書狀官]
何以稱焉 有堯舜禹湯之治之謂中國 有孔顏思孟之學之謂中國 今所以謂中國者何存焉 若聖人之治 聖人之學 東國旣得而移之矣 復何必求諸遠哉 [중략]
이른바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두고 일컫는 것인가 ?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의 정치[政治]가 있는 곳을 중국[中國]이라 하고,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학문[學文]이 있는 곳을 중국[中國]이라 하는데, 오늘날 중국[中國]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 성인[聖人]의 정치[政治]와 성인[聖人]의 학문[學文] 같은 것은, 동국[東國]이 이미 취득하여 모두 옮겨왔는데, 다시 멀리에서 이를 구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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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平安道]
증산현[甑山縣]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강서현[江西縣]의 증산향[增山鄕]인데, 본조[本朝] 태조[태조] 3년에 현[縣]으로 나누고 영[令]을 두었다. [중략]
군명[郡名], 서하[西河]
산천[山川]
국령산[國靈山], 현[縣]의 북[北]쪽 1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석다산[石多山]은 현[縣]의 서북[西北]쪽 12리에 있다. 탁유현[卓踰峴], 현[縣]의 북[北]쪽 10리에 있는데 바다와의 거리가 5리다. 바다 현[縣]의 서쪽 20리에 있다. 국령천[國靈川], 현[縣]의 남[南]쪽 5리에 있는데, 국령산[國靈山], 남[南]쪽에서 나와 서[西]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탄곶[炭串]은 현[縣]의 서[西]쪽 35리에 있다. 황통지[黃筒池]가 현[縣]의 남[南]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7천 3백 척이다. 독곶통지[禿串筒池]는 현[縣]의 남[南]쪽 15리에 있는데 둘레가 2천 34척이다. [중략]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증산현(甑山縣)
縣令一人 兼平壤道左翼兵馬 本江西縣所屬甑山鄕 本朝太祖三年甲戌 置令 國靈山 在縣北 縣人以爲鎭山 四境 東北距平壤東六里 北十二里南距江西七里 西距大海十二里 [중략]
현령[縣令]) 1인. 평양도[平壤道] 좌익병마[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강서현[江西縣] 소속[所屬]의 증산향[甑山鄕]인데,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甲戌]에 영[令]을 두었다. 국령산[國靈山]이 현[縣]의 북[北]쪽에 있는데, 현인[縣人]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사방[四方] 경계[境界]는 동북[東北]쪽으로 평양[平壤]에 이르는데, 동[東]쪽이 6리, 북[北]쪽이 12리요, 남[南]쪽으로 강서[江西]에 이르기 7리, 서[西]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2리이다. [중략]
위 지도[地圖]의 표시가 등고사[登高寺]가 있는 지역[地域]이다. 출처 구글어스
우르무치에서 서북[西北]으로 천리[千里]를 달리는 천산[天山]의 주맥[主脈]은 카자흐스탄까지 이어진다. 이 산맥[山脈]의 한 자락에 있는 천층[千層]의 암벽[巖壁]에, 등고사[登高寺]가 자리 잡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불우[佛宇]편에, 등고사[登高寺]는, 무학산[舞鶴山] 꼭대기에 있는데 수천[數千] 장[丈]의 층암[層巖]이 있다. 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찰[寺刹]이다.
이 등고사[登高寺]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산[山] 한 면[面]의 전체가 거대한 암벽[巖壁]으로 되어 있다. 이 암벽[巖壁]으로 된 산[山]의 암벽[巖壁] 중간 지점에, 석굴[石窟]을 파고 거대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석굴[石窟]의 바로 아래에는 사찰[寺刹]의 건물을 지어 놓고 있는데, 현지[現地] 사람들의 전언[傳言]은, 연대[年代]는 모르고, 사찰[寺刹]의 유래[由來]가 오래 되었다는 것에는 일치[一致]하고 있다.
이 암벽[巖壁]으로 돤 거대한 산[山] 일면[一面]의 옆으로는, 천층[千層] 높이의 폭포가 암벽[巖壁]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현지[現地]에서는 이 폭포[瀑布]를 동대당비폭[东大塘飞瀑]으로 부르고 있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사찰[寺刹]은, 수구금불[水沟金佛], 동대당금불[东大塘金佛]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부르고 있는 이러한 이름들은, 본래 사찰[寺刹]의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또 하나, 의미심장[意味深長]한 지명[地名]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지도[地圖]에도 표기[表記]되고 있는, 등파사[登巴斯]라는 지명[地名]이다. 지금 등파사[登巴斯]라고 불리는 이 지명[地名]은, 조선사[朝鮮史]에 기록[記錄]된 등고사[登高寺]의 사찰[寺刹]이름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음은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이 암벽[巖壁]의 사찰[寺刹]이 있는 인근[隣近]의 주변 지역[地域]이, 바로 등파사[登巴斯]의 지역[地域]이기 때문이다.
이 동대당금불[东大塘金佛]이 있는 천산[天山] 준령[峻嶺]의 남[南]쪽 지역은, 천리[千里]의 천산[天山] 평원[平原]으로 이어진다. 이 평원[平原]은, 서[西]쪽으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이어지고, 북[北]쪽으로는 발하슈호에 닿는다.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 강서현[江西縣]에 있는 등고사[登高寺]는, 그 이름만 달리하고, 지금도 그 자리에서 조선사[朝鮮史]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말없이 지켜보며 천년[千年]의 등화[燈火]를 밝히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을지문덕은[乙支文德]은,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다. 이 석다산[石多山]은, 강서현[江西縣]과 인접[隣接]하고 있는 평안도[平安道] 증산현[甑山縣]에 자리 잡고 있다. 수[隋]나라의 백만대군[百萬大軍]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사해[四海]를 진동[震動]시킨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무훈[武勳]은, 천산[天山]의 서릿발 같은 기상[氣像]과 아울러, 세상[世上]의 중심[中心]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막강한 위력[威力]을, 천하[天下]에 다시 보여준 불후[不朽]의 대첩[大捷] 이었다.
조선사[朝鮮史]의 평안도[平安道]는, 조선[朝鮮]의 말엽까지 요동[遼東]과 인접[隣接]하고 있었다. 이는 문집[文集]의 수많은 기록[記錄]들을 통해서 고증[考證]할 수 있으며, 이를 증명[證明]하고도 남는다. 이계집[耳溪集]의 송관서백채백규제공서[送關西伯蔡伯䂓 濟恭 序]에서, 평양[平壤]은 단군[檀君]의 고도[故都]라고 하였으며,[平壤 檀君氏故都也],........관서[關西]는, 북[北]으로 말갈[靺鞨]과 인접[隣接]하고, 서[西]쪽으로는 요계[遼薊]와 서로 지경[地境]을 맞대고 있으며, 평양[平壤]은 무[武]를 실용[實用]으로 하는 곳이다.[關西 北隣靺鞨 西接遼薊 實用武之國]라고 적고 있다.
이계집[耳溪集]의 저자[著者]는, 조선[朝鮮]의 후기[後期]에, 연경[燕京]을 다녀 왔으며,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분이다.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고려[高麗]로부터, 조선[朝鮮]의 말엽까지,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高句麗] 이후로 천년[千年]동안 같은 지역[地域], 같은 내용으로 기록[記錄]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무엇을 더 논[論]하고, 무엇을 더 논증[論證] 하겠는가 ?
오늘날, 한국[韓國]에서는 고구려[高句麗]의 역사[歷史]를 자랑스럽게 말하면서도,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에 가까이 다가서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고구려[高句麗]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피폐[疲弊]하여 멸실[滅失]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륙사[大陸史]를 보더라도, 고구려[高句麗]의 실체[實體]와는 거리가 먼 기록[記錄]들 뿐이다.
고구려[高句麗]의 미천왕[美川王]을 을불적[乙弗敵]이라고 기록[記錄]하고, 서융편[西戎編]에 소국[小國]으로 기술[記述]하고 있는가 하면, 고구려[高句麗]는 산곡[山谷]간에 있었다고 적고 있고, 고구려[高句麗]의 제왕[帝王]들이 대대로 중국[中國]의 나라들에게 작위[爵位]를 받고, 분봉[分封]을 받은 나라로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단편적[斷片的]으로 나타나는 기록[記錄]들 중에, 흉노[匈奴]를 복속[服屬]하고, 숙신[肅愼]을 내지[內地]로 하였으며, 선비]鮮卑]를 복속[服屬]한 기록[記錄]들은, 고구려[高句麗]의 요동[遼東]과 더불어, 고구려[高句麗]가 서토[西土]라고 부르는 지역[地域]을 아울러 이를 살펴보면, 현재[現在]의 역사[歷史] 해설로도 고구려[高句麗]는 중앙아시아를 중심[中心]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들어나지 않고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유적[遺蹟]과 유물[遺物]들을 종합하고, 조선사[朝鮮史]의 희미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더불어 이를 고찰[考察]하여 살펴보면, 고구려[高句麗]는, 천하[天下]를 호령한 천자[天子]의 제국[帝國] 이었음은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고구려[高句麗]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이 하나씩 들어나면서 이러한 희미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분명[分明]한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로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은, 삼국[三國]의 영역[領域]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라들이다. 비록 강역[疆域]의 차이는 있었지만, 고구려[高句麗] 이후로도 요동[遼東]과 관서[關西]를 경계[境界]로 하여,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이러한 나라의 강역[疆域]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누가 반도[半島]의 북방[北方]에서, 고구려[高句麗]가 천년[千年]의 흥망[興亡]의 성쇠[盛衰]를 이었다고 하였는가 ?
불함[不咸]의 천제[天帝] 환웅[桓雄] 사해[四海]의 천하[天下]를 내려 보며
하늘의 지주[支柱] 천산[天山]에서 꽃을 피웠나니
제세이화[濟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도[道]는
태고[太古]의 상서[祥瑞]로운 천산[天山]을 서리어 감돈다.
고귀[高貴]하고 아름다운 천제[天帝]의 명[命] 그 누가 거역하랴.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제왕[帝王]들 무거운 사명[使命] 마쳤나니
내리 오르는 천상천하[天上天下] 옥경[玉鏡]의 용지[龍池]
향목[香木]의 천년[千年] 산릉[山陵]에 서기[瑞氣]만이 가득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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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선, 조선사에 대한 좋은 글과 귀한 정보를 올려 주시는 "환국고려"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곳이 "평양" 이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장수대제때 남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는는 그곳은 오늘날 서안이고 보면 참으로 엄청나게 먼거리로 도읍지를 옮긴것이 되니 역사이래 이렇게 먼곳으로 도읍을 옮긴나라가 세계사에 또 있을까요?
한가지 궁금한것은 현 신강성이나 천산산맥 서부의 중앙아에서 사용되었던 문자는 한자(漢字)이었을까 하는점입니다. 이른바 중국의 여러 나라들(한당송원명청)이 사용했던 문자는 무엇이였으며 한자(漢字)를 사용했다면 경치좋은 어느 계곡 바위에 그 흔적이 남아있을진데 관련 자료나 사진등은 있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조선사와 이른바 중국사(한당송원명청)가 과거 수천년전부터 별개의것으로 이어저 내려온 것인지, 만약에 그렇다면 조선에도 황제요 중국사에도 황제니 팽팽한 두 세력이 통합되었을 경우는 없었던 것일까요...?
그런 두 세력이 1910년과 1911년에 거의 동시에 망하게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약 650리로 나옵니다. 현 서울에서 북한의 평양까지 직선거리로 약 200km정도로 500리 정도니 구불구불한 길을 생각한다면 650리는 될듯합니다. 현 천산산맥 북쪽에 등고사가 있다 하시니 평양도 그 근처인듯합니다. 서울을 서안으로 보았을때 서안에서 등고사가 있는곳까지 직선거리만도 2300km가 넘으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왜곡일까요...
문무 선생님 감사 합니다. 대부여님 감사 합니다. 맑은 영혼님 감사 합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역사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남평양으로 불리는 서안도 장안이고, 고구려의 본 평양에도 장안이 있습니다. 주나라의 도읍지도 호경이고, 평양도 호경 입니다, 조선의 한양도 호경 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들이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는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역사 기록의 전체를 살펴보고, 역사의 사실에 접근해 가면서, 사서의 왜곡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주나라의 호경은 두군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록은 대륙사의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은나라의 기자가 동쪽의 조선에 있는 평양으로 온것은, 수천년의 전하는 기록들로 넘쳐나고 있지요. 주나라의 호경은, 평양의 동쪽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고구려의 평양과 남평양은, 말씀하신 대로 상거가 엄청나게 먼 거리 입니다.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고구려의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평양에 있는 것은, 고구려는 당시에 천하의 그 자체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구려 이후로, 고구려의 내지였던 서북 지역을 회복한 기록이 전무한데, 반도의 일부 유적과 유물은, 들어난 것만 보아도, 불가리아와 관계가 깊습니다. 동서 이만리에 이르는 거리 입니다. 이에 대한 역사의 의문은 앞으로 모두 명확히 고증되고 밝혀 질 것입니다.
맑은 영혼님께서 말씀하신, 당시의 천산과 중아아시아의 문자는 한자가 맞습니다. 이는 고대의 석각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석각은 지금도 이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습니다. 한, 당, 송,명이 사용한 문자는 한자였으며, 원과 청은 한자와 고유의 문자를 같이 사용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문을 통하여 지금도 일부가 현지에 전하고 있습니다.
한,당,송,원,명,청은 별도의 나라가 아닌 조선사의 일원으로 보아도 무방 합니다. 이들 나라들이 있었던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내지였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상,은, 하나라의 내지 였으니 말입니다, 은나라는 부인할수 없는 조선사의 일원 입니다.
은나라는 하나라를 이었으며, 주나라는 은나라를 이었고, 육국을 통합한 진시황의 진나라, 이를 이은 한나라가 어찌 별도의 다른 역사가 될 수 있습니까 ?
지금 전하는 기록과,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역사는, 극히 일부일 뿐 입니다. 터키가 우리와 형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님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터키의 역사 학자들이 자기들의 선조는, 지금의 알타이산맥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는 맞는 말 입니다. 들어나는 역사의 기록으로도 조선사는 제국이지, 단일국가가 아닙니다. 이속에는 언어를 달리하는 여러 민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악용하는 것이 조선사를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현재 전하는 기록을 그대로 올리는 것은, 역사서의 왜곡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일 뿐 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서의 대부분은, 반도의 지명과 거리 방향 등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주요 문집에서도, 같이 나타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는 잘 아시리라 사료 됩니다.
지금 반도의 평안도 강서군에 천층 높이의 암벽이 있는 산이 어디에 있습니까 ? 이러한 산이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 남아 있는 사서들은, 반도에 조선사를 맞추기 위하여 대부분이 왜곡되고 편집된 것이며, 사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고지도라고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무 선생님 항상 강건 하시고 댁내에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대부여님 항상 건강 하시고 댁내에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맑은 영혼님 항상 건강 하시고 댁내에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