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한계
2004년 3월 10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5:17-26
5: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5: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5: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5: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5: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5: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5: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5: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5: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오늘 본문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딴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사람들은 현실감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인생 속에서는 천사도 없고 천사가 전하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래놓고도 그들은 말하기를 현실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바보입니다. 엉뚱한 현실감 속에 살면서도 마치 참 현실을 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인생관이란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오직 자기 살 것만 챙기는데 급급합니다. 즉 교회 밖에서는 생계를 위해서 살고, 교회에 와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삽니다. 그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들은 전혀 다른 현실관을 보고 있습니다. 결코 자기 살기 위해 사도 일을 한다든지,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사도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천사와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로부터 받은 일이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라고 명령받고 있습니다. 즉 사도들은 자신이 기획하고 자신이 꾸민 일은 없습니다. 천사의 지시에 천사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현실을 모르게 되면, 교회가 그저 사람들의 노닥거리는 장소가 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흥미 거리를 찾아 나서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뭘 하고 놉니까? 게임을 하고 놉니다.
그 게임이란 바로 '누가 누가 더 착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게임입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착해질 목표점을 제시해서 경쟁을 붙입니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행함의 열매를 강조하겠지요. 하지만 행함의 열매란 사실,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타인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내세우는 훈장 같은 것입니다.
더덕더덕 훈장들을 달고서 교회에 나와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겁니다. 이런 풍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십자가를 가로등 삼아 밤새 그 밑에서 노닥거리고 잡담이나 늘어놓는 것 같은 짓들입니다. 즉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 사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을 얼마나 편하게 사느냐가 아닙니다. 과연 올바른 길로 가고 있나가 관권입니다. '올바르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이 자기네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이란 윤리나 도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인간의 선행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천사들은 사도들보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시키는 겁니다. 사도들을 옥에서 풀어주는 것은, 그동안 수고했다고 집에 가 쉬라고 휴가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옥에서 풀려 나와 여전히 성전에 나와서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천사의 지시와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청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일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못 벗어남을 분명히 해 두려는 조치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자신을 소유하시면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 취지를 통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이 그 취지와 뜻에서 벗어나고자 애써도 소용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생명의 말씀을 그들을 통해 증거 하시려고 합니까?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4:1-3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전에 이미 사도들은 권세자로 인하여 잡힌 바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저 위협만 하고 풀어준 바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를 체포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나사렛 예수에 관한 내용이 사방팔방에 더 퍼지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목사가 소위 노회라는 데서 축출 당하고 제명 당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복음에 방해되는 일이라고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사도행전 4장에 경우에는, 권세자들이 단지 경고용으로 위협만 하고 그들을 풀어주었지만 오늘 본문 같은 데서는 아예 단단히 파수꾼을 세워 그들을 감금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은 적은 없습니다. 도리어 사도행전 5:12-16절에 보면,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생각하기를, 죽은 자도 살리고 병든 자도 살리는 이 위대한 능력자인 사도를 누가 감히 강압적으로 체포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비록 사도들이 많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어 순순히 그 당시 권세자들에게 체포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졌다고 세상 권세까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능력을 지녔다고 상상해서는 아니 됩니다. 도리어 순순히 잡히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심으로써 진정한 생명의 말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이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오해해서는 아니 됩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선입견과는 정반대로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자신들의 사적인 일 때문에 체포되고 감금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때문에 그들은 붙잡혔고 또 풀려 나와야 했습니다. 사도들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인기나 안위에 대해서 하나님은 관심 없습니다. 오직 그들은 통해 생명의 말씀이 전파되면 그만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들 사도를 죽이시면서 까지 그들을 통해 의도하신 일을 마무리 지우고 마십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사적으로 봐서 실패일까요? 아닙니다. 사도들을 통해 죽은 자로 살리는 그 생명의 능력은 사도 본인들의 죽음을 딛고서도 꾸준히 차질 없이 이 세상에 흐르게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이란 사적인 이득을 챙기는데 관심 두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선행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따내는 기술이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새로운 현실에 눈이 뜨여지고 열려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정말 믿음이 있는 마음가짐의 예를 로마서 12:19절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게임이 지배하고 남과의 경쟁에 매진하면서, 이기고 지는 것에 마음 빼앗기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선행이나 믿음조차 남에게 뒤지지 않는 주특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원수 갚은 것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를 성도의 원수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생명의 능력은 그깟 원수의 세력이나 권세와도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분명히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맹세는 반드시 방해받음이 없이 원만하게 진척된다는 사실을 진짜로 믿는 자만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 주의 사자가 사도들에게 지시하는 그 취지와 합당하는 설교와 명령을 받는 자만이 진정 옳은 성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교회들은 개인적인 자질 경쟁으로 우열을 논하는 겁니까? 그것은 모두다 관심사를 엉뚱한데 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가 따로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진짜로 믿음이 있다면 자신이 고된 인생을 사는 것을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천사도 후원하는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명을 받은 자임을 명심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진행됨을 우리가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이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