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장] 내가 살아온 세상 대목장 전명복 _ 사람이고 집이고 잘 따져서 지어야 이뻐" 구슬 : 전명복 | 정리 : 김선경 | 사진 : 유백영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이야 대목장을 만날 일이 평생에 한 두 번이나 있겠는지요? 무슨 궁궐이네, 사찰이네, 하는 집들을 보러 가면 집의 웅장함에 놀라기는 해도, 누가 지었을까,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집 짓는 기술자가 지었겠지, 하고 돌아 나오고 말았는데 집 짓는 기술자도 그 종류가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등록된 대목수는 700여명 정도 되고 그중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 인물은 단 세 명밖에 없다고 하네요.
하지만 문화재 인증서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지요? 평생 한 눈 팔지 않고 ‘나무집’ 짓는 데 일생을 바쳐온 사람이라면 명실공히 ‘대목장’ 칭호가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전라북도에 있는 대부분의 사찰을 두 손으로 직접 지어온 대목장 전명복(70) 장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좀 있었어
이 일을 헌 지는 상댕히 되지요. 어릴 때부터 했응게. 내 고향이 원래는 금산사요. 금산사 절 옆에. 다섯 살 묵었을 때게 목수들 치목허는 걸 보고 오더니, 먹줄이라고 튕기는 것이 있거덩요? 고걸 어린놈이 봐갖고 어머니한테서 실을 가져다가 숯검정을 종지기에다가 담아서 실을 튕기더라 그것이여. 나는 기억에도 없는디 어머니가 그려.
집안에 목수일 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디, 타고 났는가벼. 그래가지고 열다섯 살 때부터 배왔어요. 본격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우연히 또.
금산사 청도리에 조씨들 문중 제각을 지을라고 목수 한 분이 왔는디, 그때 그 분 나이가 한 칠십 정도 되았지 싶은디, 혼자 오셔 가지고 일헐 사람이 없응게, 도와줄 꼬마둥이 한 명 없냐고 동네사람들한테 물어 보니까, 내가 그것에 소질 있으니까 해보겠다고, 그렇게 해서 일을 배우게 된 것이지.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좀 있었어. 국민학교 댕길 때도 수수깡을 갖다가 집을 곧잘 맹글어서 실력발휘를 했거든. 그 사람 밑에서 한 일 년은 배웠어요. 거기서. 그때만 해도 제재소가 없응게 순전히 톱으로 나무를 켜가지고 해야된게시간이 오래 걸렸지.
그분이랑 저녁에는 함께 자면서 같이 배우고, 그때 내가 열다섯 살이었는디 육이오(전쟁)가 왔거든. 그래서 학교도 안 댕갰어. 원래 우리집이 증산교 집안이라 아버님이 재산 다 없애버리고 학교도 못 댕기게 했어요, 그때만 해도. 증산교에서는 붓글씨 배우면 도둑질 해묵는다고 했거든.
국민학교 4학년까지 댕갰는디, 그것도 아버님 몰래 댕겼어요. 아버님이 알아가지고 집안이 난리가 나고 결국 4학년까지 댕기다가 육이오 와갖고 그만 두고. 용케 제각 지은 데 가서 목수일을 배운 것이지.
집이란 게 워낙 여러 종류라....
그 분 함자가 조만재라고, 궁궐목수였지. 그분허고 같이 일하던 심사열 씨도 있어요. 그분들이 같이 서울서 궁궐목수를 허다가, 우연히 정읍 입암에 차천자(보천교 교주)의 집을 지어주고 이쪽으로 오셔 가지고 내가 그 일을 배우게 됐어요.
그분들이 여기 와서 제자가 아무도 없었던가, 나중에는 나를 수제자로 만들라고 자기한테 있는 기술을 전부 다 내게 다 알려준 거요, 말로. 그렇게 한 1년 동안 배웅께 건축에 대해서 부자재 재료에 대해서 전부 다 알게 되았지. 근디 자재 이름만 외았지 실습을 안 해봐서 몰라요. 같이 일을 도와주기는 했어도, 집이란 게 워낙 여러 종류라, 인자 초기단계는 석기시대 토굴 파서 엮은 삿갓집부터 해서, 판잣집, 통나무집, 폿집, 한 몇 십 가지 되아요.
그 이름을 다 노트에다 적어서 스승님이 나를 줬다고. 집의 모든 종류를 다 적어서. 그런디 그 중요헌 것을 내가 소실해 부렀어. 나 군대 간 사이에. 내가 없으니까 누가 치워서 없애버렸는가 봐요.
지금에 와서 그 이름을 찾으려고 해보니까 도저히 찾을 엄두가 안 나요. 지금 현재 금산사 3층전 미륵전이 있잖아요? 2층까지는 부재 이름이 있는디, 2층 위로는 이름이 없어요. 내 기억에는 그때만 해도 스승님이 이름을 적어놨었지 않나 싶은데.
백제시대 유명한 석공 아사달이 있었듯이 김대성이라는 목수도 있었잖아요? 혹시나 그 분의 건축물이 남아있을까 찾아댕겨 보기도 했는데, 유일하게 전라북도에만 폿집 주두(기둥)에다 조각을 한 집이 있어요. 전라북도에 딱 네 집이 있어. 다른 지역에는 없어.
경상도 지방에 가서 불국사며 어디며 자세히 다녀 봐도 그 흔적이 없어요. 그리고 첨차(처마 밑) 라고 목수가 파서 조각을 허는 것이 있는디, 어떤 문양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목수가 자기 재주껏 허는디, 지금은 대목장이 이런 재주를 부릴 수가 없어요. 왜냐면 천 원짜리나 만 원짜리나 집짓기는 마찬가진데, 왜 다른 사람은 천 원 주라고 하는데 당신은 만 원 주라고 하냐고 당장 그렇게 나오니까. 그러니까 공들여서 집을 지을 수가 없어요. 해보지를 못해.
목수가 생전에 자기 집 한 채 못 지어
원래 대목장은 부자가 못 된다는 말이 있어. 대목들이 허는 일은, 남보다 더 낫게 지을라고 남한테 욕 안 얻어먹게, 쓸 만하게 지을라고 노력허기 때문에 돈을 남길 수가 없어요. 나도 시방 천오백만 원 빚졌어요. 지금 마산 사찰 일주문 공사 허는 것도, 한 이천만 원 이상 모질라요. 그래도 해야죠. 보통 일,이천만 원 손해 보는 건 보통인게.
한쪽에도 좀 벌어다 다른 쪽에 다 부어서 없애버리고...목수가 양심껏 자기의 기능을 다 발휘할라믄 돈을 남길 수가 없어요. 남겨주들 안 혀. 보통 나무 한 사이 3미터 60짜리 치목(나무를 다듬어서 깎는 일)허는데 천오백 원이나 이천 원 주는데, 나처럼 하면 만원은 받아야 돼요. 하루에 두 개 밖에 못 깎아요. 그렇게 하면 일을 헐 수가 없어요.
그래도 무엇인가 남겨놓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 일을 허긴 허지만...왜 그런 말도 있잖여. 목수가 생전에 자기 집 한 채 못 짓고 죽는다고. 목수들은 자기 재능을 발휘할라고 끝까지 파고 들고 노력하고 그러거든. 그런데 요즘은 돈에 너무나 시달려서....밑지고는 할 수가 없거든요. 자기 돈 가져다가 보태는 사람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남겨다가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러기 때문에 작품이 나오질 않고... 또 목수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고....이번 일주문 맡은 것도 억지로 허는 거요.
지금 우리나라에 문화재관리청에 등록된 목수들이 한 700명 될 겁니다. 그중에서 좀 손으로 꼽는 사람은 불과 열사람 정도밖에 안돼요. 인간문화재로 돼있는 사람들이 세 분인데, 고택영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고택영 선생님 인간문화재로 만들 때도 내가 참 힘을 썼는데, 첨에 그 양반이 인간문화재 만들자고 하니까 제자들이 안 나타나요. 자금을 모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 나 혼자서 돈 5백만 원 만들어서 경비로 쓰고 따악 만들어 놓으니까 이제는 여기저기서 제자라고 나타나. 내가 고택영 선생 밑에서 일한 지는 한 20년 되는디,
우리 목조건축은 원본이 없어요
그때만 해도 목수 일거리가 밸라 없었어요. 열다섯 살 때 배우긴 했는디 일거리가 없어서 목공소 직원 일도 허다가 농사도 짓다가 뭐 그렇게 살다가, 한 70년도 되니까 문화재 관리국도 생기고 일거리가 좀 생겼죠. 문화재 지정도 되고 지방문화재도 생기고 그러면서 목수들 일거리가 좀 생겼지. 그 전에는 밸라 일이 없었어요.
나는 주로 사찰 일들을 많이 했어요. 문화재 관리국에서 시키는 보수일 조금씩 해가지고는 밸 기능도 발휘를 못하고 그러니까 사찰 신축하러 많이 댕겼죠. 아마 폿집이라고, 절에 가서 보면 있는 집처럼 생긴 집만 지은 것도 한 수십 채 되어요.
목수에 따라 집을 짓는 공식이 다 달라요. 지금 보면 멋 몰르고 지은 집들이 참 많아요. 대충 배워가지고 지은 집들. 뭐 무슨 세미나에도 가서 들어보면, 다른 것들은 다 원본이 있는디, 왜 우리 목조건축은 원본이 없어요. 처음 지은 집이 없어요. 근데 내가 어렸을 때 노인양반한테 들은 이야긴디, 그때에도 삼사오각법이 있었어요.
말하자면 30센치, 40센치, 50센치, 이렇게 허믄 정사각형이 나온다고. 기역자가. 수직 수평이 이렇게 나와. 우리가 허게 되면 자수로 따져가지고 여섯 자, 여덟 자, 열 자 이렇게 칸수를 그려서 정확하게 만들지. 나는 어려서부터 배운 것인데, 수평을 잡는 초각도 처음에는 이런 항아리 뚜껑에 물을 부어서 수평을 잡다가, 쪼금 인자 머리를 굴려서 항아리 양쪽에 십자각을 쌓아서 이만큼 올라오게 올려놓고 수평을 맞추면 더 정확하더라 이거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떻게 했냐면, 항아리를 더 크게 해서 나무로 구시(구유)를 팠답니다. 더 길게. 그러면 더 정확할 것 아닙니까? 멀리 갈수록 더 정확헝께. 고런 공법도 썼고, 옛날에는 수평 자를 가지고도 했지만은, 돌덩이 주워다가 양쪽에 놓고 하기도 허고...하여튼 수평을 잡아나가는 공법이 있어요.
시골집 구들도 수평을 잡는 방법이 있어요. 기둥을 만들 때 아홉 자면 3미터, 3미터씩 위에서 아래까지 먹줄을 튕겨서 표시를 해야 돼요. 그래가지고 처음에는 돌높이하고 기둥하고 같이 맞게끔 요렇게 해서 연필로 그려가지고 그놈 밑을 파내 버리면 딱 맞아요. 그렇게 하나 세워놓고 아까 삼사오각법이라고, 수평과 수직을 만들어가지고 먹줄로 탁 튕겨서 저쪽 기둥하고 딱 맞추면, 여기서 한 치를 높였으면 저쪽에서도 한 치를 높이고, 그 자수를 합해서 구멍을 뚫어준다고.
건축을 할 때는 수평이 제일 중요해요. 조금만 수평이 어긋나도 집이 틀어져버려요. 양옥집 문틀도 사각을 맞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틀어지잖아요. 보통 목수일을 배우면 선생들도 수평 잡는 걸 안 가르쳐줘요. 절대로 안 가르쳐 주는디 그양반(조만재 선생)은 유독 나한테, 전부 다 가르쳐주고 적어주고 그런 것이, 말하자면 자기 전수생을 만들고 싶었던 것을,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몰랐어요. 몰라서 그냥, 배우고는 싶었어도 대충 그냥 댕겼지, 내가 그때 좀 나이가 들었더라면 확실히 좀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드는디, 내가 내 것으로 못 만들고 버린 것이 많아요.
후리와 조로를 재는 목수가 없어
고택영 선생은 우연히 어떻게 만나 가지고, 서울 숲정문 건축일 할 때부터 만나가지고 명륜당(성균관) 보수도 같이 허고, 여러 군데 많이 같이 댕겼죠. 모시고 댕기면서 간혹 내 일도 허고, 같이 작업도 허고....모르는 것은 손자한테도 배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서로 배우기도 허고 가르치기도 허고, 선생이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고택영 선생이 아흔 살 다 되야서 돌아가셨는지, 대개 목수들이 건강해요. 언젠가 방송에도 한 번 나왔는데, 목수들이 수명이 길다는 말이 나오더라고요. 목수들이 벌어먹고 살라고 그러는 것인가, 일복을 타고 나서 그런가, 하여튼 건강한 편이에요.
보통 사찰 하나 건축하려면 20명도 필요허고 30명도 필요허고...또 어떨 적엔 서너 명이 헐 때도 있고, 규모에 따라서 다르죠.
내가 지은 것을 세자면 헤아릴 수도 없지만 내 공법을 누구한테 자랑하자면, 그 집의 근본, 목조건축의 근본인 후리나 조로(추녀와 사래. 귀서까래 위에 거는 휘어 오른 평고대)가 있어요. 그것이 잘 잽혀야 집이 이쁘고 보기가 좋아요. 쉽게 말해서, 사람으로 보자면, 이발허고 머리 빗어서 면도해 놓은 상태라고 보면 되아요. 그런 식으로 조로, 후리가 중요헙니다.
그런디 그걸 모르고 대충 어떻게 마음대로 지어서 그렇지, 나같이 확실히 하는 사람이 밸라 없지. 추녀라고 귀퉁이에다 허는 것이 있어요. 바닥돌에서 추녀까지 먹줄을 튕겨놓고 그것을 재보면, 아 이건 조로가 몇 자 나온다, 또 인자 관목이라고, 45도 각을 봐서, 원래 여섯 자 여덟치 두 푼 정도 나가면 직각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한 치 두 치 다섯 치, 한 자 이상 이렇게 빼줘요. 그러면 그걸 따지는 것이 뒤로 들어가는 후리 치수가 나와요.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요. 목수들이 그것 재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나 잴까.
원래 조만재 선생한테, 궁궐 지을 적에 조로나 후리가 참 야물딱지게 잘 잽혔답니다. 그런 말을 허더라구요. 그러면서 고것이 제일 중요헌 것이다, 그러셨어요. 그런데 지금 뭐 창덕궁이나 뭐 가서 보면 옛날 그대로 있는 것도 있고 중간에 보수헌 집도 있는디, 많이 변질되야 부렀어요. 특히나 내가 볼 때는 그래요. 우리나라 국보 제1호인 숭례문도 변질돼 있다고 나는 봐요. 제대로 수리가 안 되아 있어. 동대문도 보물 제1호거든. 고것도 인자 보수헐 때 변질이 생겼다고 나는 생각허고.
보수를 헐 때 목수들이 허는데, 원리원칙을 모르고, 그 집의 뿌리를 모르고 보수를 허니까 그런 일이 생겨요. 뿌리를 모르고서는 그 집의 균형을 찾아주지 못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라고 신응수씨, 전흥수, 최기영, 이 세 사람이거든요. 고택영 선생까지 네 분이었지만 이제 고택영 선생은 돌아가셨고...
거기들도 자기 나름대로 집을 짓지, 원리원칙을 아직도 모르더라구요. 후리와 조로는 모르면 못 재거든. 알아야 재지.
경험이 있어야 그런 재주가 나오고 자꾸 생기는디, 대부분의 목수들이 그 짓을 안 해 봤어요. 내가 볼 때 그렇다고 생각해요.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잘 알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변동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원래 사찰도 사람이, 스님이 기거할 집과, 또 사람이 기거하지 않고 부처님을 모신다든지, 그렇잖으면 누각, 이런 것은 후리 조로 이런 것을 별도로 잘 잡아줘야 해요.
그런디 사람이 살 집은 그걸 너무나 잘 잡아주면 모양이 안 좋죠. 그러니까 그 집의 용도에 알맞게 짓는 게 그것이 중요허다고요. 사람이 살 집의 후리와 부처님 모실 집의 후리와...그것을 알맞게 잡아주는 게 목수가 헐 일이고, 찾아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집에는 한 달에 한번이나 찾아갈까 말까
나는 어디 가서 금산사를 창건했다고 말을 해요. 78년부터 해서 98년에 내가 금산사를 나왔습니다. 20년 동안 금산사 스물 여섯 채를 지었어, 금산사 건물을. 전부 다 보수허고. 내 손으로 다 했어. 또 경상도 안동 가서 한 여남은 채 지었고. 한 사찰을 만들고 다녀.
한번 공사 시작하믄 가족들한테는 한 달에 한번씩이나 찾아가나. 목수들은 밥만 먹으면 일을 해야 허니까. 날이나 궂으면 쉴까. 한여름에는 대형 선풍기 틀어놓고, 한겨울에는 난로 쬐어 감서 그렇게 안 쉬고 일을 해요.
제일로 뭣이 나쁘냐 하면, 그 가족들허고 떨어져 있는 거! 강원도 같은데 한번씩 가면 한달이 뭐여. 오직해사 인천 강화도 가면 전등사라는 절이 있는디, 대웅전 추녀 밑이다 여인상을 깎아서 추녀 밑을 받쳐놨어. 일허는 도중에 신랑이 하도 안 오니까 각시가 바람이 났어. 집을 나가 부렀어. 그래서 화가 난 목수가 ‘너는 평생 동안, 죽어서라도 처마만 받치고 있어라’허고는 새겨놨다는 유래가 있어.
나는 결혼을 스무 살 때 했는디, 내가 목수일 허는 것을 원망허지는 않았어. 한번 손에 밴 일이라 바꿀 수도 없고, 나도 좋아하는 일이라 버릴 수가 없었지. 왜 고생들이야 많이 하죠. 근디 따라서 살라믄 어쩔 수가 있간디, 허허!
그때만 해도 살기 위해서 목수를 했지. 뭐 배운 것도 없고, 살기 위해서...꼭 해야겄다, 이것이 아니고. 하기 싫어도 했고, 하고 자퍼도 했고....하기 싫을 때도 많았지.
그래도 힘들 때는 있어도 후회는 안 해요. 내가 죽더라도 후세에 남아 있는 건물들이 많이 있거든. 인자 어디가면 돈을 좀 더 받아서 좀 나슨 집을 지어볼까 허는 생각도 있지만....
집을 짓는다는 것이, 해도 해도 만족감이라는 게 없어요. 한정이 없어요. 언제까지 내가 이일을 할란지 기약은 없지만, 안 허면 심심하니까. 집에서 놀면 밖에 나가면 못해도 2,3만원씩은 나가요. 다방에 가서 차 한 잔만 마셔도, 친구들허고 화투만 쳐도 1,2만원은 나가고...차에 기름 넣고 돌아댕개야 허고...글라믄 2,3만원은 금방이지.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요
붓 만드는 과정이 두 가지가 있어. 묶음 붓하고, 지짐 붓허좋은 목수가 되려면 다른 목수들이 해놓은 것을 첫째 잘 봐야 돼요. 구경도 허고, 그 사람이 헌 것하고 내 것허고 견주어봐서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목수의 헐 일이고, 목수가 배울 점이거든요.
나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아요. 다 배웠다는 것은 헛소리고, 학자들이 다 안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우리도 잘 헌다고 해도 그 위에 또 다른 것이 있어요. 나는 지금도 넘이 해놓은 것 많이 보고 댕개요. 신응수 씨가 해놓은 것도 보고, 전흥수 씨가 해 놓은 것도 보고....많이 보고 댕개요.
옛날에, 지금 저 우리나라에서 3대 사찰에 꼽히는 수덕사 대웅전허고, 봉명사 극락전허고, 무위사 극락보전이, 우리나라에서 젤로 오래된 절이라고 하거든. 목조집으로는.
그런데 세 사찰이 공법이 다 틀려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허라고 해도 못헙니다. 왜냐면 인건비가 더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냥 평범한 공식, 공법으로 빨리 해치워버리는 거지. 지금 누가 뭐 끌로 파가지고 짜개로 깎아가지고 그렇게 집 짓는 사람은 없어요. 기계로 구멍 뚫어가지고 기둥을 박으면 헐렁허니 쏘옥 들어가불지. 집이야 오래 가든지 어쩌든지...그런디 나는 그런 걸 싫어허고. 나도 기계를 쓰지만, 중요헌 디는 다 끌로 파고 그러죠. 지금도 기계로 해도 정확허니 찍어내요. 조그맣게 톱 돌아가는 것으로 이렇게 허믄 정확하게 해요. 먹금도 정확하게 긋고.
대목장 노임 하루에 만 원
나도 인자 인간문화재 해볼라고 서류를 준비하는 중인디, 그 이야기 한번 해보까요? 지난 번에도 한번 준비를 했는디, 다른 사람들은 돈을 좀 썼던가봐. 도청에 문화관광부에 있는 이 머시기허고 현장 답사를 왔더라고. 근디 머 왕 뭔 박사하고 같이 와서 물어보는디, 분명히 나한테 올때게는 내가 제출한 서류를 가져와야 헐 것 아니요? 근디 그것도 안 가져오고 심사를 왔으면 내가 낸 서류를 갖고 와야지 어디다 두셨소? 했더니 아! 아니다고 그래.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뭐냐고 싫은 소리를 해부렀지. 그랬으니 자기들헌테 나쁜 소리를 했으니 좋다고 헐 것이여? 그래서 그냥 말아버렸지.
올해는 인자 문화재관리청으로 넣으려고 혀. 거그에 신청을 하면 지방이 아니고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그런 거지. 돈이 나와서가 아니라 명예지! 대목장 문화재 실력은 무슨 경진대회 같은 것이 아니고 작품전을 통해서 내보이는디, 작품전이라는 것이 모형집 하나 만들어도 몇백만 원 씩 들어가부러요. 그런디 그렇게 돈 들여서 만들어도 쓸모가 없어요. 누가 돈 주고 그것을 사간들 팔리지도 않으니까. 보통 돈 천만원 들여서 지어가지고 그냥 놔둘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사진 찍어가지고 그렇게 해서 작품전 허고 그래요.
목수일 허면서 제일 힘든 것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힘들지요. 일을 헐 때는 돈 생각 안 나요. 인자 노임 줄 때가 생각나지. 선불이 아니고 일이 끝나야 받으니까. 한 달에 한번씩 생활비조로 나오는 돈도 있지만. 일 끝나면 뭐 1,2천만 원은 밑지는 게 보통이니까. 그래도 먹고 사니까 하지, 먹고 못 살면 이 일 허겄소?
그렇게 허다봉께 전라북도 근방 사찰 대웅전은 전부 다 거즘 내가 지었응게. 몇 채 안 빠지고 거즘 다 내가 지었어. 김제, 여산, 저어기 공주까지 댕기면서 지었어요. 채 수로 따지면 몇 채나 될라나? 경기전만 해도 몇 채가 넘는디, 채 수로는 한 2백 채가 넘을 겁니다. 나는 보수를 잘 안 허고 신축을 잘 해요. 경기전 하면서도 한 1년 일 허고 나서 따져봉께 노임이 하루에 만원씩밖에 안 되더라고.
큰아들도 나 따라서 목수일
큰아들은 나 따라서 목수일 허고 있어요 시방. 전준헌이라고. 벌써 마흔 여섯 묵었지. 내가 금산사 일할 적에 중학교 때부터 따라 댕기면서 일을 도왔지. 아르바이트 삼아서 남바(숫자) 붙이면 내가 돈 준다고 해감서 갈쳤지. 가는 시방 쩌어그 보성(전남)에 가 있어. 목수일을 허는데 보성에 가 있어. 아직 나는 제자가 없어. 우리 아들도 나한테 배운 것이 아니고 나 제자헌티 배웠어. 나는 따로 가르쳐 줄 비법도 없어. 20년 넘게 같이 허다 보면 안 가르쳐줘도 다 알어. 다 잘 허고.
78년부터 98년까지 20년 동안 금산사 신축 및 복원공사를 혔고, 저 경북 안동, 거그도 사찰공사였는디, 상당히 오래 했지. 한 2년 했응께. 94년부턴가..한 간디 있는 것이 아니고 왔다 갔다 허니까....안동에서도 절을 하나 만들었고. 홍은사라고. 거그는 완전히 신축이었어.
나는 큰 공사만 허니까 작은 일들을 일로 안 쳐. 대구 팔공산 입구에 보림사라고 있어요. 모두들 댕김서 잘 지었다고 그럽디다. 거그도 신축공사였는디, 한 2000년이나 됐는가, 2001년이나 됐는가, 그 무렵에 공사를 했지. 지금 준비허는 것은 마산에 있는 청평원사라고 사찰 공사여. 경기도에서 치목혀다가 다음 주면 마산으로 내려가, 나무를 깎는 것을 치목이라고 혀. 치목을 해가지고 현장에 가져가요. 일반 목수들 치목허는 공법은 평범하게 허는데, 좀 많이 해온 목수들은 자기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 초각이라고 허는데 그 초각을 허고 그러죠. 일종의 문양이여 문양!
사찰 건물 지을 적엔 전문성이 필요해. 일반 한옥 건축목수들도 사찰목수가 있고 일반 목수고 있고 그래요. 사찰 목수가 일반 목수보다 몇 단계 높다고 봐야 되죠. 양식도 양식이지만 공법이 다르니까. 사찰 목수 공법을 일반 목수들은 잘 몰라요.
책 한 권 남기고 싶은데...
책을 한 권 펴낼까 하고 돌아 댕김서 찍어놓은 사진이 엄청 많은디, 작년엔가 비 때문에 차가 떠내려 가버렸어요. 비 많이 왔을 때 있었죠? 금산사 길 옆에다 차를 놔가지고, 괜찮겠다 하고 카메라랑 장비랑 다 차에다 실어 놨는디, 아침 6시 전까지는 비가 안 왔다고. 그래서 들어가서 잤는디, 그 잘 동안 1시간만에 비가 쏟아진 것이여. 형님 차 떠내려가요, 해서 나와 봤는디, 이미 못 건너 가겄어. 쳐다보고만 있었지. 마지막으로 책이나 하나 써놓고 죽을까 싶어서 한 1년 이상 수집해 놓은 걸 다 떠내려 보내버려서...인자 다시 한번 전국을 다녀야 돼. 목조건축의 공법이나 명칭에 대해서 적어놓고, 어떻게 하면 집이 어떻게 되고, 어떻게 하면 어떻게 되고...이런 내 경험을 살려서 한번 책에다 남겨놓고 싶어.
목수들은 톱, 끌, 망치, 대패...이런 것들은 다 가지고 다녀. 잘 쓰면 한 2,3년은 쓰지. 오래 일한 목수라고 해도 후리하고 조로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어. 중국 건축을 보면 추녀 끝이 바짝 올라가 있고, 일본 것은 지붕이 반듯허니 내려오고, 한국 것은 그 중간이죠. 자연을 따라가죠. 자연 그대로 보기 좋게. 지붕 끝을 둥글게 잡아주는 것을 후리라고 허는데, 그것을 잘 잡아줘야 집 모양이 살아. 거기에도 다 수치가 있어. 그 집의 규모에 따라서 그 집의 추녀를 얼마를 빼주고 조로를 얼마 잡아주고 그것을 맞춰주어야 그 집이 이쁘게 잘 나온다고. 예를 들어서 큰 집을 돌부처에다 삿갓 씌워놓은 것 맹이로 그렇게 해선 안 되고, 언제나 사람이고 뭣이고 균형을 맞춰서 잘 따져야 이쁘고 그러지.
설계도에 그려 있어도 짓다 보면 안 맞어. 재보면 맞지를 않어. 그냥 대충 그려놓은 것이지. 대목장들이 다 알아서 허는 것이지.
내 맘대로 집 한번 지어보고 싶어
내가 지은 집 중에서 제일 좋은 집을 꼽으라면, 그렇게 딱 스치지를 않아요. 인자 그 집에 맞춰서 그 규모에 그 모양에 그 공법이 잘 되면 좋은 집이죠. 집 높이에 따라서 처마길이를 어떻게 허고, 또 그 조로를 만들고 후리를 잡고 기둥높이(물매)를 어떻게 잡아주고....모든 것이 다 어울려져야 좋은 집이 되는 것이지.
나는 불교도 아니고 예수도 아닌데 사찰을 많이 지었지. 사찰하고 가찹게는 살아도 믿지는 않아요. 원래 증산교를 믿고 왔기 때문에. 지금도 금산사 쪽에 집이 있어요. 왔다 갔다 해요. 다섯 남매 다 벌어서 키웠응께 뭐 못 벌었다고 볼 수는 없지. 밥은 먹고 살았응께. 너무 욕심 안 부리고...
나뿐만 아니라 어떤 목수든지간에 꿈은 다 가지고 있을 거요. 나 생전에 집 한 채 잘 지어서 내 마음대로 한번 짓고 싶다~ 그런 집! 내 마음대로, 내 하고자픈 대로, 재주를 마음껏 발휘해서 내 기술, 내 능력을 다 바쳐서, 집 한번 지어보고 싶다~ 그런 소망을 목수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요. 목수들이 못 허는 것이 딱 그것 한 가지거든! 제 마음대로 집 지어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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