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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6절-7절: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6절: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일반지식에서는 일반적인 지혜가 나온다. 일반적인 지식은 경험에서, 또 남의 소리를 듣고 보고 느낀 데서 생긴다. 이 일반적인 지식은 땅의 지식이다. 땅의 것을 보고 듣고 경험을 해서 땅의 것에 대한 지식을 얻어서 미래적인 일을 지혜롭게 생각을 한다.
땅의 지식은 땅의 것에 대한 지혜가 나오고, 하늘의 지식은 영원히 가는 하늘의 지혜가 나오는데, 하늘의 지식은 경험에서 되는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이치의 말씀이라야 지혜가 나온다.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의 목적대로 영원히 손해 보지 않게 만드는 지혜다.
세상지혜는 물질에 관한 지혜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에 관한 지혜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성경을 배우는 것은 사람에 관한 지식이요, 사람에 관한 지혜를 배우는 거다. 성경을 가르칠 때는 이것을 선포하고 이 지혜가 내 속에서 생겨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이게 아닌 세상과 세상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이것은 사람에 관한 지식도 아니고 지혜도 아닌 물질에 관한 지식이요, 물질에 관한 지혜밖에 안 된다. 이건 천국복음이 아니다. 천국복음은 사람에 관한 거고 영원히 가는 것인데, 세상에 관한 지혜는 전부가 세상에서 물질을 이용 응용 활용하는 지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에게 지혜가 나와야 한다. 사람을 보는 지혜, 사람을 다스리는 지혜.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 물질세상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거다. 그리고 사람이 바로 깨달아지면 자기 할 일을 자기가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아닌 깨닫지를 못해서 남으로부터 명령만 받는 인간이라면 사는 게 힘들어서 쓰겠느냐?
‘지혜’의 일반적인 뜻은 사리를 밝히고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없으면 일반적인 지혜가 안 나온다. 영적인 신앙 면에서도 지혜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이치를 많이 깨달음으로써 지혜가 생기는 거다.
인간 자기는 이 세상에 살다가 짐승처럼 가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도덕성을 가진 인격자요, 자유가 있는 자요, 따라서 심판이 있는 존재다. 그리고 신령세계에 들어갈 자기이다.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서 무로 돌아간다거나 금수로 변해질 것 같으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짓지 않았을 것이다.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은 어떻게 보아도 금수와는 다른 존재다.
인간은 도덕성자로 인격자로 지어졌기 때문에 자유가 있고 심판이 있는 존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볼 때도 이해타산 평가성이 있고 가치판단을 하는 존재다. 이건 일반적이지만 예수 믿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치판단 평가를 깨달아서 이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 인간을 왜 이렇게 지었느냐?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게 뭐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받는 거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것을 잘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것을 받지도 못하고, 진리이치의 말씀을 받지도 못한 채 이방신을 섬기는 것처럼 맨날 금식이나 하고 손을 비비며 세상 것을 구하는 기도나 하는 것은 믿는 게 아니다.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다.
일반적인 교회에 다니면 예언 방언을 할 요소가 충분하다. 교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믿지 않도록 고차원적인 진리지식의 교훈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건 안 주고, 모르고 맨 펄펄 뛰고 예언 방언을 하며 돌아가게 하면 교회가 뭐가 되겠느냐?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가르치는 목사는 저주다. 옳은 진리지식을 줘도 사람이 바로 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데 오히려 그런 짓을 하라고 멍석을 깔아놓고 가르치고, 그렇게 하라고 충동을 하고, 그런 사람을 띠워주고 있다면 이런 목사는 저주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진실이다. 이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영원 궁극적 결과적 최종적 목적적으로 죽음 저 넘어가서도 영원히 후회가 없는 지혜로운 영생의 삶이다. 이 영생의 삶을, 영원히 살 수 있는 지혜나 지식이나 선이나 사랑이나 모든 도덕성을 여기서 닦아서 가는 거다.
교회에서 교육을 하는 것 모두가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고, 사망권에서 풀어내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만들어지게 하고, 자유자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교회의 교훈이다. 사망권 라인 안에 들어있는 것을, 죽음의 라인 안에 들어있는 것을 자꾸 영생 쪽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진리진실로 지혜로운 자로 살아가야지 몰라서 죄를 짓고, 몰라서 답답하게 죽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된다. 옳은 진리이치를 듣다보면 자기 처세술이 나오는데, 이 처세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이게 지혜다. 예수를 믿으면서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를 바로 배우면 모든 삶에서 생산이다. 손으로 만지고 만나는 것마다 생산이다. 죽는 게 아니라, 사망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생명이다. 영생이다. 교회에서는 성도가 이런 자로 살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손만 가면 멀쩡하던 물건도 부숴버리는데 어떤 사람은 그 손만 가면 고장이 난 것도 튼튼하게 잘 고쳐 놓는다. 이러면 손이 문제냐, 그 사람의 속 중심이 문제냐? 속 중심, 실력이 문제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진리이치를 바로 배워서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생산적이 되고 건설적이 되어야지 안 믿는 사람들처럼 날마다 ‘못 살겠다. 힘들어 죽겠다’ 라는 사고방식으로 살면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가는 곳마다 사람 사는 맛이 나야 한다. 말에도 옳은 말, 행동에도 옳은 행동이 나가야 한다.
진리지식에서 나온 모든 언행심사는 진실이다. 진실한 행동이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저주의 말을 했는데, 이것은 어디서 나온 거냐? 세례요한이 평소에 욕을 잘 해서 거기에서 나온 거냐? 단순히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느냐?’ 이게 문제다. 세례요한은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거다.
7절: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우슬초는 박하식물의 일종이다. 민19:11-19, 레14:4-7에 보면 시체를 만진 사람이나, 뼈나 무덤을 만진 사람이나, 문둥병자는 하나님 앞에 부정한 고로 우슬초를 취해서 물에 찍어 그들에게 뿌려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했다. 출12:22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전에 우슬초를 취하여 양의 피에 찍어 인방과 양쪽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애굽을 탈출했다. 이것은 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어떤 피냐? 피는 그 분의 생명을 의미하고, 그 분의 생명은 그 분의 일생을 의미하고, 그 분이 살으심과 소원과 목적과 정신과 사상과 마음과 그 분의 희로애락과 그 분의 이해타산 평가와 판단은 다 우리의 구원에 있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사셨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하더라도,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무슨 계획을 하더라도 전부는 우리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살으신 삶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격 전 삶은 우리의 구원에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구원도 들어있고, 이룰구원 성화구원도 복합적으로 들어있는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로 신령천국을 상속받고 그 신령천국을 당신처럼 누리게 하려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사건 환경을 통해 영능의 실력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모든 원리와 이치와 그 실력이 당신의 일생의 전폭 속에 들어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라고 하는 거다.
단순히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려놓고 ‘그 다음은 모르겠다’ 이런 식이 아니라 영 죽은 우리의 영을 살려놓고 우리의 생명도, 취미도, 도덕성도, 진실도 모든 것을 하나님을 닮도록 하게 해 주는 삶이었다. 이 전체를 구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사람 자체를 당신처럼 만들어 놓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님 속에는 우리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면의 그 구원, 또 만들어져서 실력적으로 천국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구원이 들어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우리가 인격과 성품적으로 예수님처럼 만들어진다면 이 사람에게는 천국도 자기 것, 세상도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세상 사는 것이 뭐가 두렵겠느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놓고 지키고 다스리며 영능의 실력을 키우라고 하셨는데 남을 다스리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못 다스려서 걸핏하면 신경질을 낸다면 이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리겠느냐? 사회를 다스리겠느냐? 세상사람들은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아무리 학식이 박식이라도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는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느냐? 조금은 다스리느냐? 자기가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봐도 애국자다.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이치를 모른다.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어지게 해 주려니 예수님이 도성인신 해야 했고, 이 땅에 33동안 사시면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아야 했고, 죄를 이겨야 했고, 모든 유혹과 미혹을 이겨야 했고, 세상을 이겨야 했고, 고난과 죽음을 이겨야 했고, 사단과 마귀를 정복하여 이겨야 했고, 부활로써 이 모든 것을 이겼다고 하는 것을 증명을 해야 했다. 여기서 이긴다는 것은 칼로 이기는 게 아니라 머리싸움을 말한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세상과 세상 것을, 그리고 마귀를, 죽음을 이겼다는 선포다. 이기지 못하면 부활 승천이 안 된다.
이렇게 살으신 그 분의 33년간의 피와 땀과 노력은 죽은 것이 없고, 죽을 것도 없고, 사망계로 죽어나간 것도 없고 전부는 부활이 된 생명의 피다. 그래서 아닌 말로 의사가 주사바늘로 예수님의 피를 한 방울 뽑아서 확인을 한다면 그 피는 죽은 피가 아니라 산 피다. 그 피를 암이 걸린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넣는다면 이 예수님의 피가 그 암을 다 정복할 거다.
피는 생명이니 예수님의 이 피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을 살리고, 영적 실력을 키워주려고 훈련 연단을 시키고, 영능의 실력자로 진리 인격화 자체화로 만들어 주심이다. 곧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자로 만드신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냥 십자가에서 빨갛게 흐르는 피가 아니라 우리가 신령천국에서 영광중에 그 세계를 영원히 누릴 수 있는 모든 존귀 영광성과 영생이 함축되어 들어있는 생명과 영생의 피다.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피다. 누가 이렇게 신경을 써서 우리로 이런 자로 만들어 주시겠느냐? 부모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죄’라고 할 때 눈에 보이는 죄는 이미 행동으로 나타난 죄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죄가 있는데, 그것은 마음으로 지은 죄요, 생각만으로 지은 죄요, 본인만 알고 있고 하나님도 알고 계시는 죄다. 이런 죄만 있는 게 아니라 본인 자신도 감쪽같이 모르는 죄가 있는데,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계시로만 알 수 있다. 자기가 자타에게 행동 죄를 지었을 때 남은 몰라도 자기는 의식을 한다. 마음으로 지은 것도 자기가 양심적으로 의식을 한다. 그런데 성경계시가 아니면 모르는 죄도 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행동 죄, 즉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을 하지 않았으면 자기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왜 죄인이냐? 행동 죄를 짓지 않았어도 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악과는 몇 천 년 전에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과 세상 것에 속해있는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생긴 것에 소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를 계속 따먹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선악과를 계속 따먹고 있으니 이게 죄다. 성경이 아니면 이걸 모른다.
또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만 다니고, 주일 날 예배를 한 시간 드리면 하나님 앞에 다 한 것으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지지 않고 여전히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상과 세상 것에 대한 소원 목적으로 사는 것 역시도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것이니 이것도 죄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예수를 잘 믿어야 되겠다’ 라고 하며 ‘잘 믿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면 ‘못 믿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그런데 그 말 자체보다도 성경 한 절을 더 봐라. 또는 설교를 한 번 더 들어라. 이러면 예수님을 잘 믿어지는 것이 자동적으로 쌓여져 들어간다. 기도보다 훨씬 좋은 것이 실천을 하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이질적인 신앙은 비진리요 세상적인 신앙이다. 이 세상적인 신앙은 종교적인 사업에 목적이 되어있다. 종교적 사업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일만 죽도록 하는 거다. 일반 이치적으로 학교에 가면 공부를 배우는 열심이 있어야 하고, 노동판에 가면 일하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 노동판에 가서 학교공부를 배우겠다고 하면 안 된다. 또한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는 안 하고 노동판에서 일하듯이 일을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최우선이다. 우리교회에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머리를 갖도록 하는 거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 교인들은 깨달은 대로 네가 알아서 움직여라.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모르고, 없고 종교적인 사업을 목적으로 나가는 것은 죄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것을 죄로 여기지 못하더라.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예수 믿으면서 종교적인 사업은 열심히 하면서 사람 만들어지는 것이 없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그러니 회개를 할 수 없는 거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고 하며 그 일을 정당화 시키게 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신앙을 자기 인격화, 자기 성품화 시키는 신앙은 정결케 된 신앙이다. 이것이 없는 종교 사업주의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이 된 것인데, 이 길로 나가는 사람은 자기가 이탈이 된 신앙인 줄을 모른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깨끗하게 되는 거냐? 자기가 깨끗하게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목욕을 하면 되는 거냐?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행동적으로 지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며 용서해 달라고 회개를 하면 죄가 사함 받고 깨끗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건 종별적 회개다. 일종의 반성에 불과한 거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런 죄를 몸과 마음으로 짓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속에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이 소원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행동적으로 잘못한 것을 회개할지라도 이 사람은 회개가 안 된 거다. 바른 회개란 소원과 목적적으로 세상을 향했던 것을 하나님, 천국 쪽으로 돌리는 거다. 이것을 방향회개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정결케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사고방식과 종교적 사업주의로 나가던 것을 하나님 쪽으로, 천국 쪽으로 돌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거다. 신앙이 세상 쪽으로 되어있으면 이 사람은 종교적 사업주의로 나가게 된다. 충성봉사 많이 하고, 예배당을 몇 개 짓고, 헌금을 많이 내고 하는 면으로 움직인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식의 신앙이라면 이게 회개가 된 거냐, 안 된 거냐? 회개가 안 됐다. 이런 신앙을 천국 쪽으로 돌려놓으려면 우선 소원 목적을 천국 쪽으로 돌려야 한다.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한다. 소원 목적이 천국 쪽으로 되어있는 목사를 찾아가야 한다. 이런 목사에게서는 진리이치가 나오게 되어있다.
진리이치의 설교는 언제나 사람에게 들어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깨닫고 만들어지는 면으로 되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말씀을 듣고 이 노선으로 나가는 것이 회개가 바로 된 거다. 방향과 목적이 바로 잡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바른 회개란 자기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이 세상으로 향했던 것을 하나님 쪽으로, 천국 쪽으로 돌리는 거다.
여러 친구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출발해서 부산까지 갈 때 자기들끼리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할지라도 이 기차를 타고 있으면 부산에 도착을 한다. 그런데 만일 부산을 가려고 하는데 목포 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서 자기들끼리 욕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면 부산에 도착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을 신앙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성도가 예수 믿고 천국 쪽으로 가면서 간혹 세상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천국을 향한 신앙의 방향과 목적만은 변치 않는 사람과, 그 누구보다 더 열심을 내며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신앙정신이 세상을 목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바로 만들어지겠느냐? 전자다. 그러니까 바른 회개란 종별적인 잘못을 회개하기에 앞서서 자기 신앙의 방향을 천국 쪽으로 돌리는 거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예수님께서 도성인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왜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유대종교의 세상을 펼치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종교적 사업 목적이었다면 당시 유대인들을 압제하고 있던 로마를 쳐부수고 유대종교를 거대하게 만들었을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종교 지도자들, 바리새교인들에게 외식자들이라고 하며 화를 선언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교인들에게 외식자들이라고 화를 선언한 것일까? 바른 신앙이 어떤 것이기에 이들이 종교적 사업을 잘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외식자들이라고 한 것일까?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사업 주의로 나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왜 외식자들이라고 선언을 한 것인지 해석을 해 봐라.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예언하신대로 예수님 부활 승천 후 이방군대를 불러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어 버렸다. 만능의 능력을 가진 분이 하나밖에 없는 성전을 보호를 해 주시지 왜 이방군대를 불러서 허물어 버린 거냐? 예수 믿는 것이 종교사업 목적이라면 보호를 해 줘야 할 게 아니겠느냐? 그런데 왜 허물어 버린 거냐?
우리는 종교사업 위주로 나갈 게 아니라 신앙정신과 사상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이 된 비진리적 세상적인 정신 사상을 진리로, 즉 주님의 피의 사상으로 정결케 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말하자면 교회는 주님의 정신 사상이 들어가야 깨끗해진다. 우리가 다른 교회에 다니면서 교인들끼리 패가 갈려서 싸우고 멱살 잡고, 맨 돈을 가지고 종교적 행사를 크게 하고, 물질을 가지고 키워나가고 끌어당기고 하는 걸 경험했지 않느냐? 이런 게 교회냐?
교회가 이렇게 하는 것은 전부가 죄 아래 놓여있고 사망적인 거다. 이것을 깨끗케 하려면 교인들 속에 예수님의 정신을 넣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생명의 말씀으로 된 주님의 피의 구속으로 정결케 되면 깨끗해진다. 거룩해진다. 그리고 사람이 거룩한 정신 사상을 가지게 되면 잡된 생각을 안 한다. 잡된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돼버린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전부가 사람에 관한 거고, 하나님의 뜻에 관한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주님처럼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일을 하게 되면 정신 자체가 생명적이고 영생적이기 때문에 세상염려 걱정 때문에 머리 아픈 일은 없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정결케 되는 건데, 어디에서 깨끗해지느냐? 일반적인 죄를 지은 것에서 깨끗해지느냐? 물론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이보다 더 올라가서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전부가 이질성인데, 우리 속에 예수님의 정신이 들어가면 이 이질에서 깨끗해진다. 모든 사고방식이 거룩해진다. 사람이 정결하게 된다.
사람이 깨끗한 물에 목욕을 하면 웬만한 피부병이 낫지만 오염된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더 발산이 된다. 그런 것처럼 성도가 세상 일반적인 지식에 목욕을 하면 사람이 추해져 버리고 질이 낮아진다. 아무리 오래 예수를 믿어도 남만 비판하고 자기는 하나도 못 고친다. 이건 못 쓴다. 그러니 어떻게 되느냐? 고집쟁이가 된다. 반대로 신앙의 질이 하나님의 본질로 나가게 되면 거룩한 신앙이 되는데, 이 거룩성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되는 거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사람의 몸이나 옷에 때가 끼고 더러우면 목욕도 하고 세탁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육적이고 부패성적인 세상정신의 때가 끼면 하나님께서 사건의 몽둥이를 들고 세탁을 하신다. 이 때 자기의 속을 고치지 않으면 고통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사건적으로 얻어맞고, 환경적으로 얻어맞는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뭘로 씻기느냐?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로 씻는 거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자꾸 씻겨져 나가야 한다. 고쳐져야 한다. 바꿔져야 한다. 안 바꿔 넣으면 사람이 깨끗하게 되어지지를 않는다. 성경을 왜 보는 거냐? 말씀의 사람으로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다. 말씀의 사람으로 무장을 하기 위해서다. 말씀의 사람으로 건강하게 성장이 되기 위해서다. 영능의 실력이 자라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외식운동을 할 수 없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