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에너지 공부를 하면서 막연히 문제라고 생각했던 핵발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어려서부터 ‘원자력 발전’이라 배우고 말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무감하게 만드는 언어적 술책임을 알게 된다. 꺼지지 않는 불, 다룰 수조차 없는 것을 만드는 인간의 오만함과 다음 세대에 그 처리의 책임을 떠넘기는 그 무책임 앞에서 나의 자세와 책임을 생각한다. 작년 ‘계승’이 삶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아이들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무엇을 계승해 줄 것인가. 오만함이 아닌, 생명 앞에서의 겸손함을 물려주고 싶고 무책임함이 아닌, 관계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의 모습을 계승하고 싶다. 하지만 공부를 하며 부끄러웠다. 밀양에서 생명을 지키고자 치열하게 싸워 오신 어르신들의 걸음과 마음에 얼마나 공감하고 관심을 가졌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밀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알긴 했지만, 그래서 관심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그게 너무도 얕고 잠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권영이 학생이 발제를 하며 경계해야 할 것이 익숙해지는 것이라 했는데, 그렇게 그 절규와 외침에 익숙해져 점차 감각을 잃어간 것은 아니었나 부끄러워졌다. 끼익, 끼익 가이거 계수 소리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았다. 연약한 생명의 외침에 무감각해지면 어찌 겸손할 수 있고, 어찌 책임을 지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익숙해져버린 삶을 계승하는 것은 재앙이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오만함과 무책임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 익숙해져선 안 된다. 생명을 유린하고 파괴하는 세상의 교묘하고 거대한 술수에 익숙해져선, 놀아나선 안 된다. 다소 학생의 눈물이 마음에 남는다. 그 눈물에서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본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될수록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약해지고 공감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대하는 태도가 더 겸손해지고 그 생명 앞에서 더욱 책임 있는 모습으로 있고 싶다. 연약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친구로 살고 싶다.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다. 자, 더 힘을 내자.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이리도 유쾌할 수 있을까. 함께 하는 이들이 있으니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전기가 없어도 살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가 전기를 사용한 것은 역사상 극히 짧은 시간이지 않는가. 전기 없이 살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은, 전기에 익숙해져 창의적인 생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전남 보성의 촌구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아궁이에 불을 때며 지냈다. 화장실은 재래식이었고, 인분으로 거름을 만들어 사용했다. 소에게 먹일 꼴을 배러 다녔고, 나무를 하러 산을 탔다. 가끔 전기가 나갔다. 촛불을 켜면 되었다. 농촌에서의 삶의 양식이라면 전기가 없는 삶은 그리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도시의 삶은 다르다. 전기가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토론 주제를 접했을 때 처음엔 농촌에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함께 토론을 하면서 삶의 양식보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함께 한다면, 그 관계성 안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내면 되기 때문에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 사용을 최소화 하는 것, 인터넷 모뎀을 끄고 자는 것, 스마트폰 사용을 최소화하여 충전에 드는 전기를 아끼는 것, 물을 아껴 쓰는 것, 청소기 대신 빗자루를 사용하는 것. 에너지를 아끼는 대안을 생각하며 나눈 것들이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선 대안을 살 수 없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불편함엔 익숙해져야 한다.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러울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부정적인 생각과 싸워야 한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찌 달라지겠냐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 ‘대안’은 여기서 출발한다.
나하나 꽃피어
조동화
나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너도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꽃밭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나도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은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첫댓글 울릉도 최초의 사람에게 산신령이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열심히 나무를 심어 어느덧 100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산신령이 찾아 와 나무를 세 보니 밤나무가 99그루 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낙담해 있는 사람에게 저편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저도 밤나무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어있던 밤나무 한 그루 자리를 채워 준 나무는 그때부터 '너도밤나무'라 불렸습니다.
나도 너도 꽃으로 피어나다보면 빈 들판 채워주는 꽃 한 송이 언제고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함께 봄!
이 시 노래가 있답니다. ^ ^
봉실 선생님이 불러 주셨던 그 노래!
오, 노래 들어보고 싶어요!
전기없이 사는 삶을 같이 얘기하며 신나서 흥분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함께하는 이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해나갈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던 것 같네요! 대안적인 삶을 생각하며 혼자 결단하고, 바꾸려 했던 사고방식을 함께 해결해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꾸는것부터 해나가야겠습니다^^
불편함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 그래서 '대안'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 길을 함께 가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더 든든해지고 자신감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