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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전쟁이다 ! -2-
1950년 7월초:
전쟁 2주차는 일본 점령군 임무로부터 한국으로 투입된 미군 장병들에게 몹시 비통한 시간이었다. 미 제24사단의 장병들은 남한을 쓸어버리려는 대규모의 공산군에 거의 단신으로 맞서고 있었다. 한국군의 저항은 적의 초기 기습공격에 거의 사라져 버렸다. 투입된 미군들은 단지 비참한 지연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36시간 동안 양동이로 퍼서 붓듯이 내렸던 비는 뚫을 수 없는 은폐물처럼 적군을 엄호해 주었고, 그들에게 많은 전차와 대공포를 집결시킬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공군의 제트 전투기들은 지상의 논과 낮은 구름 사이의 얇은 층에 머무르기 위해 거의 전례 없는 평탄한 각도로 기체를 눕혀 공격을 위해 날아갔다. 구름으로 꽉 찬 산봉우리들이 한국 중앙지역에서 길을 막고 있는 밀집된 전차나 장갑차들만큼 그 비행기들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내가 공산군의 진격을 저지시키려고 애쓰고 있는 제트 전투기를 타고 비행할 기회를 가진 것은 바로 전쟁 2주차가 되는 이때였다. 빌 샘 웨이즈 중령이 내가 탈 전투기인 "슈팅 스타"의 조종사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전 헬멧을 조절하여 맞추고, 낙하산과 산소마스크, 그리고 좌석을 단단히 묶었다. 샘 웨이즈 중령은 우리가 피격되었을 경우 어떻게 조종석으로부터 탈출하는지, 또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고공에 올랐을 때 순수 산소의 흐름을 어떻게 조정하는지 내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든지 나의 몸을 조종간에서 떨어져 있게 하라는 비상지침을 명심하게 했다.
우리 비행기가 다른 4대의 전투기와 합류하기 위해 활주로 끝까지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반짝 빛나는 제트 비행기의 행렬을 따라 서있는 각 비행팀장들 옆을 지날 때, 그들이 나에게 우호적이고 이해한다는 듯 환한 웃음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제트기는 조종석 안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늘 들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샘 웨이즈 중령이 이륙을 위해 연료 조절판을 열었을 때 우리가 마치 커다란 정유공장의 공급 장치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음은 끔찍한 힘의 로켓에 내가 묶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굉장한 감흥이었고 아주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단 몇 초 후에 우리는 수천
피트의 공중에 있었고, 일본이 저 멀리 뒤에 있었다. 샘 웨이즈는 다른 전투기들의 날개 아래로 우리 전투기를 가깝게 붙이고 이 전투기들을 날아다니는 야포로 전환시킨 그 전투기들의 날개에 부착된 두 개의 5인치 로켓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가 지상을 떠나자마자 소음이 사라졌다. 진동도 전혀 없었다. 내 머리 바로 옆에 있는 백미러를 보면서 나는 수분 동안을 내 뒤 조종석에 있는 샘 웨이즈 중령의 사진을 찍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면서 이 제트전투기가 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제작되어 나온 것이 내게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겹겹이 쌓인 구름 사이를 빠져나오자마자 우리는 한국 상공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머리 위의 유리 덮개에 성에가 끼기 시작해서 나는 나의 새로운 지식을 이용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히터를 켜서 성에 제거했다.
사방으로부터 오는 소리가 나의 헬멧을 채웠다. 지금 우리는 공격기들이 합동으로
폭격을 가하는 동안 작은 정찰기에서 타격목표 지역 주위를 돌며 관찰하고 있는 전투기 폭격 통제관들과 무선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륙하기 전 샘 웨이즈 중령과 나는 다른 4명의 폭격기 조종사와 함께 브리핑을
들었다. 각 공격기는 우선 그들의 목표를 폭격하고, 다음으로 로켓 공격을 실시하기로 했다. 공격기들은 우리가 탄 전투기가 대공포에 맞지 않는 한 절대로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었고, 작전 종료 후 연료탱크 분리 투하에 있어서 투하물이 아군과 충돌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연료탱크 투하를 늦추려고 노력할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샘 웨이즈의 손에 달려 있었다.
폭격 관측자가 우리를 위한 몇 개의 좋은 목표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수원 남쪽으로 돌진하는 공산군을 선두에서 이끄는 탱크들이었다.
4대의 제트기가 그들의 삶의 터전인 지붕 없는 세계로부터 강하하기 시작했다. 샘 웨이즈는 선두 전투기를 따라 오른편에서 움직였다. 너무 가까이 날아서 우리가 그 비행기의 꼬리 배기관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앞서 비행하는 그 제트기가 구름 속에 잠깐 뚫린 구멍들 사이로 기체를 기울여 선회하고, 방향을 바꾸며 아래로 내려왔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 붙어서 두 대의 제트기가 한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꼭 들어맞춘 듯이 방향전환 회전 급강하 등을 따라했다.
갑자기 우리는 구름 아래로 빠져나왔다. 아래에는 정성 들여 줄이 쳐진 들과 비에
흠뻑 젖은 언덕들이 펼쳐져 있었다. 광대한 전경 바깥에 하나의 미세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끝에 한 교차로가 있었고, 길들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 나무들이 서 있었다. 탱크 한 대가 그 나무들 뒤에 있었고, 우리는 구름 회랑을 따라 똑바로 탱크를 향해 돌진했다. 첫 번째 폭격을 마치고 빠져나오면서 샘 웨이즈가 여전히 선도 제트기의 후미에 붙어 선회했다.
그리고 다음 로켓 공격을 위해 그를 뒤따랐다. 두 개의 불기둥 띠가 제트기 아래로부터 튀어 올라왔다. 그리고 샘 웨이즈가 그 나무들에 부딪히기 직전에 제트기를 잡아당겨 급상승시켰기 때문에 나는 사진을 찍고 좌석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우리는 시속 600마일 이상의 속도로 날고 있었다.
땅과 하늘, 생과 사,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 그리고 내 머리와 어깨 위에서 등을 따라
내려오며 쏟아지는 천둥·번개가 나를 점점 더 조종석의 밑바닥으로 밀어 넣었다.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 땀은 보통의 땀이 아니라 내 옷과 낙하산을 흠뻑 적시고, 타는 듯한 눈물로 눈을 가득 채운 채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 속에 있는 것 같은 땀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리 눌려졌을 때, 나는 계속해서 내게 말했다. "제발 조종간에 부딪히지 마, 조종간에 부딪히지 말라고" 잠시 후 비행기가 수평을 유지하고 꽉 조이던 바이스가 나를 풀어주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간신히 머리를 들어 무릎과 안전띠 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카나리아 색의 액체 방울들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들은 악다문 나의 이와 코로부터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것
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하고 매우 아름답지만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몸 안 깊이 머물러야만 해. 몸속 무언가가 깨졌음이 틀림없어. 이것들은 그것들이 용해된 부분이야"하고 혼자 생각했다. 고통과 저항 안에서 내 몸은 단순히 인간 동요의 한계 내에서 반응했었고, 나의 신체 시스템은 담즙을 역류시켰다.
샘 웨이즈는 폭격 관측자가 로켓들이 탱크를 명중시켜 폭발하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 혼자 남부군인 특유의 욕을 지껄이며 웃는 바로 그 순간에 두 번째 제트기를 뒤따라
올라갔다. 두 번째 공격은 우리가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첫 번째와 똑같았다. 샘웨이즈가 우리 제트기를 너무 가까이 붙이는 바람에 나는 다른 비행기들의 날개를 카메라 뷰파인더에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공격을 추적하며 촬영을 위해 줄곧 완벽한 위치에서 제트기를 잡고 있었는데 로켓들이 발사되지 않았다. 우리는 로켓이 충돌해 불꽃이 일어나고 가까운 언덕들에서 굉음이 들렸을 때, 휙 소리를 내며 길을 가로질러 다시 곧 수평을 유지했다. 로켓 신관들이 부딪치면서 전체 공격을 불발로 만들었다.
3번 비행기는 다른 쪽 길에서 재빨리 피하고 있는 장갑 트럭을 덮쳤다. 그는 잠시 우리를 기다렸다. 그런 다음에 그 트럭이 깊은 계곡으로 도망갈까 걱정이라도 한 듯이 공격 위치로 튀어 오른 후 급강하하여 그 트럭을 저 세상으로 날려버렸다. 그는 너무 낮은 고도로 공격을 해서 하강 상태로부터 수평 비행으로 돌아올 때 불꽃 파편을 뚫고 날아야만 했다.
4번 제트기는 샘 웨이즈가 선회하여 그의 후미에 붙었을 때 곧바로 급강하 공격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기총소사. 결정적인 또 다른
기회. 목표를 향한 날쌘 움직임, 이번 목표는 장갑차였다. 그리고 날개에 달린 로켓들이 발사되었다. 수분 후 높은 상공에서 나는 좀 더 많은 순수 산소가 나오도록 조정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위한 의도였는지 확신했다.
마지막 공격 시 조종석 바닥으로 다시 웅크리기 전에 나는 조그마한 거울을 통해 샘 웨이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힐끗 보았으나 알아볼 수 없는 한 얼굴을 보았다. 눈꺼풀들이 바닥으로부터 끌어내려 져서 눈이 툭 튀어나오고, 볼이 긴 수직선으로 주름이 접히고, 강물에서 끄집어내 마대처럼 온통 젖고 형태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나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런 그림이." 그런데 바이스가 나의 손을 조여서 카메라도 들 수가 없었다.
비행장으로 돌아오는 활주로에 착륙하면서 나는 윤기 나는 날개와 그 끝에 달린 탄약 같은 연료탱크, 거울 속에 비치는 샘 웨이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말라서 색깔이 없어진 내 무릎 위의 약간 둥근 얼룩들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잠깐 내가 실제로 다른 세상에 살았다는 것을 지금은 나를 넘어서 저 멀리 있는 세상 그리고 다시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제트기가 편대의
자기 자리에 위치하려고 정지했다.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7월 하순 :
내가 그 산을 보았을 때는 이미 공격이 시작되고 24시간이 지난 후였다. 가을은 아직 산허리를 드레스처럼 휘감고 있는 논과 콩밭의 초록빛을 얻게 만들지 못했고, 여름의 해도 산봉우리로부터 뻗어 내린 계곡들에 펼쳐져 있는 얇은 안개를 뚫고 그 힘을 과시하고 있을 때였다. 자그마한 검은 빛을 띤 제비 한 마리가 내 옆을 지나 논 위로 낮게 스치듯 날아가 아주 작은 벌레를 잡아 바로 앞에 있는 미루나무 위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햇빛이 산마루와 내 주변의 들판을 비추어 훈훈하게 느껴졌고,
심지어 전쟁이 멀어진 것 같았다.
얼마 후 난 미루나무가 서 있는 시내를 가로질렀고, 풀들로 덮인 깊은 진흙탕 속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는 한국군 포병들을 보았다. 그들은 한국전쟁 동안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17연대의 포반 병사들이었고, 지금은 산 정상 주변과 거기에 있는 적의 토치카에 75밀리 야포로 직접사격을 할 수 있는 포진지를 파고 있었다.
모든 작전 상황도와 포병 지도에 그 고지의 높이는 626m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산들이 지나갔으나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전쟁이 진행 중이나 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여러분이 명령을 받고 그 언덕 위에 있는 순종적인 한국군 징집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될 만큼 운이 나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탄약통을 지고 그 산속으로 전보다 더 높이 구불구불 올라가는 시골 농부들의 긴 행렬과 비틀거리며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한 무리의 부상병들이 평화의 환상이 거짓임을 산 아래 계곡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서로 응답하듯 차례대로 두 번의 기관총 일제사격 소리가 정상으로부터 아래로 울려 퍼졌다. 이 626고지는 위태로운 부산 방어선에 연결되는 중심축에 해당하는 최전선이었다.
부상자들을 위한 구호소로 이용되고 있는 자그마한 농가 가까이에서 나는 군대의 경고를 모르는 채 자기 집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던 말없이 긴장한 얼굴의 한 시골 여자를 붕대로 감싸주고 있는 두 명의 위생병을 발견했다. 공산군의 폭탄 한 발이 그녀의 머리 안으로 파편을 박히게 했다. 지금 그녀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끄떡없다는 태도로 쪼그리고 앉아서 위생병이 강철 파편조각을 제거하려 애쓰는 동안 그녀에게 바싹 달라붙어 있는 어린 아들에게 아침 젖을 먹이고 있었다.
붕대를 감고 오두막의 벽에 가까이 기대어 서 있는 그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몰라 보였다. 그때 그녀의 이웃이 다가와 내 어깨너머로 그녀에게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불행한 소식의 충격으로 그녀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고,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그녀의 눈은 일그러졌다. 그녀의 또 다른 아들이 조금 전 폭발로 인해 사망했던 것이었다.
구호소 남쪽에 있는 콩밭 가에 낯익은 인물이 나타나 세밀하게 포대의 포상설치 상태를 살펴보고 서 있었다. 그는 17연대가 속해있는 국군 수도사단의 미 군사고문단 대표인 프랭클린 패리스 중령이었다. 그는 예정보다 하루 이상 늦어진 지금 공격을 앞당길 수 있는 어떤 해결책을 찾기를 바라면서 '기계(지명)'에 있는 사단사령부로부터 도착했다.
군사고문단의 기능이 자문 역할로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패리스 중령이나 그의 보좌관 또는 육군본부에 있는 그의 상관까지도 어떤 것이 한국군들이 전선에서 사용할 가장 좋은 방법인지 단지 제안만을 할 수 있었다.
각 고문관은 그 역할을 국한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게다가 "민감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다치게 하지 말 것"을 분명히 하는 지침까지도 받았다. '끝장날 때까지 질질 끄는 형태의 전쟁'의 시대에 거의 전체가 경험이 없는 신생 군대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특히 전술적인 면에서 가장 폭력적이었고 복잡했던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여했던 베테랑들에게도 달성하기 어려운 명령들이었다.
그 산은 실제로 높진 않았지만, 범위가 넓었고 또 구불구불했다. 계곡에서 바라 보았을 때 그 산은 야생의 관목으로 뒤덮인 편자처럼 보였는데, 그 뾰족한 굽 날들이 계곡을 가로질러 오른쪽 아래로 휘어지고, 구호소와 포대가 있는 좁은 도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공격 2일차 아침에 한국군들이 그 산의 두 굽 날의 언덕을 차지했고, 반면에 공산군은 산봉우리와 정상 주변을 감시할 수 있는 토치카를 차지했다. 산봉우리와 산 정상 주변을 차지함으로써 공산군은 이론적으로는 산 전체와 계곡 바닥까지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2일차 아침에 그들은 분명히 포병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깊이 참호를 파고 들어가 있는 소규모의 수비 병력만을 정상 부위에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한국군 포병들은 전혀 전력 손실을 입지 않고 적의 목표에 직접사격을 할 수 있었고, 구호소의 사람들과 보급 트럭의 이동, 그리고 탄약의 추진보급이 적 사격에 대한 추후의 염려도 없이 야지와 도로를 따라 이루어 졌다. 그것은 공격을 위한 교과서적인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그 전날, 동해안의 포항 바로 북쪽의 모래언덕 지대에 있던 한국군 3사단과 함께 공격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는 어떤 사진도 찍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한국 군인들이 매시간 막 밀고 나아갈 듯이 사격을 했었던 박격포와 기관총들을 침묵시키고, 미 해군과 공군의 타격을 기다리면서 모래언덕을 따라 파놓은 참호 안에서 거의 빈틈없이 촘촘히 앉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관심을 잃어버린 나는 8사단이 새로이 재편성되어 경험 없는 부대로 채워졌다는 핑계를 받아들였다. 나는 3사단의 좌측에 있는 전설적인 17연대가 속해 있는 수도사단 쪽으로 장비를 옮겼다. 17연대는 빛나는 전투 성과들을 거두었다고 보고 되었고, 바로 그날도 산허리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282명의 적을 사살했다는 단신이 전해졌었다.
패리스 중령과 함께 공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 있을 626고지의 긴 남쪽 능선을 오르기 바로 직전에 나는 우연히 내 마음속으로부터 밀려오는 모든 오래된 의심들이 일어나는 보고를 들었다. 분명히 내가 연대 지휘소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산의 북쪽 능선을 공격했던 그 장교는 자기 부하들이 정확하게 계획대로 목표를 탈취했다고 보고했었다. 그런데도 사실은 그때 산 정상 부근 천 야드 이내에는 아직 활동하고 있는 한국군이 없었다. 그 연대장은 목표를 탈취했다는 희소식을 사단으로 보고했고, 사단은 군단으로 보고했다.
바로 그 순간에 한국군 지휘부의 긴급 요청에 응답하여 미 공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고폭탄과 소이탄을 달고 산을 선회하고 있는 전투폭격기들이었다. 그들은 평상시의 간결한 질문으로 어디를 폭격하기를 원합니까?" 하고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국군 지휘부는 허위보고를 감추고 또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산은 그들의 것이고 폭격이 더는 필요치 않다고 비행기들과 무선으로 교신했다. 패리스 중령과 나는 오전 중반쯤에 남쪽 능선을 장갑차를 따라 올라가서 626고지의 마지막 공격을 위해 측면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기관총 사수들의 전방 진지에 마침내 도달했다.
깊고 오히려 넓게 조치한 골짜기가 우리를 산 정상 부위와 토치카로부터 분리했다. 바위와 덤불 가운데 누워서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우리 몸을 감싸고 있는 끔찍한 열기로부터 조금이라도 탈출해보려고 애쓰며, 우리는 쌍안경으로 반대편 능선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놀랍고 기쁘게도 한국군들이 멀리 아래 관목 숲 지대를 통해 쏜살같이 목표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래쪽의 흔들리는 그림자들로부터도 위쪽의 토치카로부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오 직전에, 한국군들과 함께 공산군들의 사계청소로 거의 불모지가 되고 돌투성
이의 가파른 둥근 언덕에 도달하기 전에 있는 촘촘한 수목 지대를 기어오르고 있을 때, 갑자기 적막함을 깨뜨리고 산 정상에 섬광과 함께 모든 것들이 난무했다. 계곡 아래로부터 대포와 박격포들이 적이 있는 산 정상 부근에 쉬지 않고 포를 쐈다.
몇 발의 포탄은 거대한 바윗덩어리 같은 적 토치카 바로 위에서 직접 터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능선을 따라 모든 기관총 사수들이 내내 귀를 찢는 듯한 사격을 했는데, 예광탄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반대편 산허리에 부딪혀 번쩍였기에 그 궤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어떤 대응 사격도 없었다. 그런데 경고도 없이 적의 박격포가 산 정상 부근의 은폐된 진지로부터 발사되어 한국군들이 오르고 있는 수목들 사이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한국군들은 토치카를 향해 계속해서 기어 올라가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공산군 박격포수들이 사거리를 줄여 한국군 머리 바로 위에 포탄들을 쏟아 부었다. 패리스 중령과 나는 쌍안경을 통해 공산군들이 진지에서 똑바로 일어서서 언덕 아래로 수류탄을 연속 투척하고, 그 수류탄들이 공격하는 한국군 가운데서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패리스와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도 방향을 돌려 언덕 아래로 후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국군들은 모두 수목 사이에 있는 제법 큰 호박돌이나 작은 바위들 가까이에 몸을 숨기고 어깨를 잔뜩 굽히고 있는 것 같았다. 한국군을 지원하는 포나 기관총들은 한국군들이 626고지 정상 부근에 적과 너무 근접해 있어서 아군의 피해 없이 사격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멈춰야만 했다. 공산군들은 한국군들이 조금 아래로 물러나 참호를 파자마자 곧 사격을 멈췄다.
폭발음의 메아리가 계곡 속으로 사라지고, 산은 조용해졌다. 나는 사진을 찍기엔
너무 멀리 있었고, 한국군 부대가 사살했다고 보고한 공산군 282명의 어떤 증거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래 골짜기를 지나 참호 속에 있는 한국군 바로 뒤에 다다를 수 있는 먼 후면을 오를 생각으로 능선 옆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내가 626고지 옆을 지날 때 해가 산 아래로 지기 시작했다. 나는 종전의 전투에서 너무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한국군 병사들이 스스로 휴대하지 못하고 떨어뜨린 소총들을 등에 지고 구부정하게 이동하는 지게꾼들을 여러 번 만나며 지나쳤다. 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보고했던 적군의 시체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 기관총들이 바로 앞에서 사격을 개시했고, 수류탄들이 가까이에서 터졌다. 박격포 포탄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마다 머리 위 나뭇가지 가까이에서 폭발했고, 나는 30여 분 동안이나 두 개의 돌무더기를 방패삼아 몸을 눕히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울부짖음이 능선 쪽에서 들렸는데 나보다 운이 좋지 않은 누군가가 박격포탄에 맞은 것 같았다. 일제사격이 잠시 그치자마자 나는 다시 관목 숲을 지나 산의 최정상 부근을 향해 뚫고 올라갔다. 내가 첫 번째로 본 한국 군인은 머리를 교통호 아래로 두고 왼쪽 다리와 넓적다리가 박살난 채로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동료 두 명이 덤불로부터 천천히 나와 산 아래로 그를 운반하기 위해 어린나무들과 덩굴을 엮어 임시 들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들것을 만드는 동안 그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눈이 부시는 햇살을 가려주기 위해 나뭇잎으로 그의 눈을 덮어주었다.
식량을 수송하는 보급대가 전선의 장병들에게 가는 도중 아무 말 없이 부상병과 그의 동료들을 조심스럽게 지나쳐 갔다. 나는 이들을 따라나섰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발목이 부서져 말없이 고통을 삭이고 있는 또 다른 부상병이 길을 따라 있는 담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동료는 식사를 마치고 누군가 이 부상병을 한참 아래에 있는 기지까지 같이 운반해 주기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전선"을 향해가는 길은 공산군의 포화가 그들에게 떨어지기 전에 숨을 곳을 찾기에
충분히 빠를 수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지역에 박격포
포탄이 꽤 많이 떨어졌으나 인명손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 산허리를 따라서
252명의 적이 사살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나는 단 한 명도 보진 못했다.
산 정상 근방의 토치카로부터 백 야드도 채 떨어지지 않은 전방 진지에서 한국군
병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저녁밥을 분배받고 있었다. 병사들이 식사하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양쪽의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한국인의
계약'과 같은 무엇이 아마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두 개의 수통을 보았다. 나는 어떻게 한낮의 무더위에서 이것들이 남아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내가 능선을 올라 그들 곁을 지나갈 때 부상병들이 내 다리를 잡을 때 내가 적어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마침내 산 전체에 한국군 병사들이 산재해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만족한 듯이 상부로부터의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단
한 명의 한국군 장교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그들은 정찰 중이거나 아니면 좀 떨어진
통나무에 앉아 식사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분명히 지휘자가 전혀 없는 것 같았고 적의 박격포 공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다 같이 모여 있었다. 아무도 해질녘의 공격에 다시 토치카를 타격할 의도를 갖지 않은 것 같았으나 그들은 최대한 토치카 가까이 접근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렇게 했다.
한국군들과 함께 앉아서 밥을 나누어 먹으면서 나는 모든 미군 보병 중대에 그들 100명씩 편입시키려는 소문에 가까운 제안이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군인의 보통 수준의 리더십과 전우애 정도만 가지면 저 한국 군인들이 분기하여 북으로 반격해 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또한 후퇴하며 지쳐버린 미군들이 피난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로 야기되는 심각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답을 찾는 계기가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내가 산에서 내려올 때는 거의 해 질 녘이었으나 그렇게 어둡지 않아서 구호소에
이르는 길이나 골짜기로 가는 통로 등을 가리키는 좀 더 어두운 빛깔의 표시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구호소에는 부상병이 오기를 기다리는 위생병들은 없었다. 구호소가 있던 오두막은 어두컴컴했고 비어 있었다. 분명히 두 발의 박격포 포탄이 대대 지휘소가 있던 마을 가까이에 떨어졌다. 대대장은 즉시 전부 철수해서 길을 따라 1마일 후방에 지휘소를 신속히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
능선 위에 있는 병사들과의 모든 접촉이 끊어졌다. 부상자들은 이제 아주 거칠고
간단한 의무조치를 받으려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1마일을 더 걷거나 기어서 와야만 했다. 밤이 산 위로 올라왔고, 626고지는 아직 적군의 수중에 있었다.
패리스 중령이 못쓰게 된 구호소 가까이에 나를 위해 남겨놓은 지프를 타고 '기계(지명)'로 돌아가기 위해 막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길은 논 사이로 뚫린 모래 오솔길 같았다.
모든 것이 공산군에게 유리해졌다. 특히 한국군과의 통신선이 너무 과도하게 확대
되는 바람에 모든 교신이 단절되었다. 사단 지휘소에서 나는 패리스 중령이 그의 보좌관과 함께 심각하게 토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 실시하기 위해 제시된 작전 계획들을 지도에 표시해 놓으며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그 사무실의 반대쪽에 있는 방의 분위기는 유쾌하지 못했다.
수도사단의 사단장인 백인엽 대령이 느리고 민감한 목소리로 자기 참모들을 세워놓고 꾸짖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알 필요가 없었다. 나는 먼저 그의 이글거리는 눈과 경멸에 찬 얼굴을 보았고, 다음에 어둑어둑한 어둠을 뚫고 탁자를 가로질러 굳은 얼굴을 하는 그의 부하 장교들을 보았다. 분명히 이들이 지난 이틀간의 형편없는 공격 같지 않은 공격의 책임자들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한국군에서 최고의 공격 전술가로 알려진 사단장에 의해 질책을 받고 있었다. 젊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사단장인 백 대령은 역시 젊은 군대인 한국군에서 거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전쟁이 막 발발했을 때 그는 지금은 자기 사단의 예하에 있는 17연대의 연대장이었다. 그가 이끌었던 전투에서 너무나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그는 한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싸움꾼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승진을 하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최고 부대인 수도사단 전체의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 또한 백인엽 대령은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쇄도해 내려올 때 그들과 싸운 전투에서
부상을 세 번이나 당했다.
전쟁이 일어난 그 날에 17연대는 옹진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공산군이 침공한 첫날 옹진반도는 서울이나 후방과의 모든 통신이 끊겼다. 그때 백 대령은 다른 한국군
지휘관이나 미군 지휘관과는 아주 다르게 이 전쟁에서 아무도 하지 않았던 그 무엇 인가를 했다. 그는 38선을 넘어 공산군을 향해 북쪽으로 공격을 명령했고, 해주시의 핵심부를 점령했다.
그는 침략자들을 공격하여 북으로 퇴각시킨 유일한 한국군 장교였으나 그의 연대는 완전히 적에게 포위되었고, 이번에는 포위를 뚫고 아군이 있는 남으로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연대병력을 데리고 적의 중심부를 공격하여 38선을 다시 넘어온 후 2500명의 연대병력이 다시 북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함으로써 한국군 수뇌부의 전 일반 참모들을 매우 놀라게 했었다.
지금 그의 사단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퀴퀴하고 후미진 옛 교사에서 그는 자기의 지휘소로 온종일 넘쳐흘렀던 작전상황에 대한 진상을 감춘 허황한 보고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산의 능선에 있을 때인 오후 늦게야 백 대령은 직접 진실을 알게 되었었다. 그들이 공격의 실패를 그에게 감추려고 한 것도 충분히 잘못된 사실이었지만, 그들 바로 위에 적들이 있고, 고립되어 후방의 지원을 위한 어떤 직접적인 접촉도 끊어진 626고지 주변 전방 진지에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한 부상병들을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격노케 한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17연대 병사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 그들은 그를 사단장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싸웠고 그들과 함께 피를 흘렸다. 회의실에 있는 누구도 그가 발을 구르고, 아직 멜빵끈을 걸친 왼팔을 휘두르고, 붕대 감은 오른 손으로 문을 잡고 흔들 때, 그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았다. 얼어붙어 있던 참모들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나갔다. 전조등이 켜지고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리더니 그들은 전방으로 출발했다. 나는 패리스가 불참했기에 내가 한국군 스타일의 마지막 군법회의에 입회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고 혼자 생각했다.
1950년 한국 8월 :
8월 7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미 해병대가 최초로 육상공격을 한 과달카날 상륙 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금 다시 이 날짜에 주요 표시를 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에 의한 첫 대규모 지상공격 개시일이 이날로 정해졌고, 한국에
투입된지 일주일도 채 안된 해병대가 함께 서 측방에 있는 진주를 향해 선두에서 진격도록 되어있었다.
수 주 동안 월튼 워커 중장의 미 8군 병사들은 도쿄의 총사령부에서 자랑스럽게 부르는 '부산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황량한 산과 강과 논들로 된 일대를 용맹스럽게 장악하고 있었다. 남쪽의 마산으로부터 반도 중심부의 왜관을 거쳐 동해안의 외진 항구인 포항에 이르는 방어선이 부산을 보호했다. 많은 미군이 부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워커 장군의 사령부가 '군'사령부라고 불리긴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점령군의 편한 역할만 하다가 후퇴-정지, 후퇴-정지, 후퇴-후퇴-후퇴-정지, 부상, 실종, 전사의 악몽으로 갑작스레 내던져진 녀석들이 모인, 경험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으며 병력도 부족한 사단급에 지나지 않는 오합시졸부대였다.
공산군들은 항상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서 방어선을 깊숙이 짓밟았고, 워커의 병사들은 척의 강타를 당해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그들의 발로 비틀거리며 물러나 다시 위치를 정하고 방어선을 유지했다.
만약에 한국에서의 전쟁이 지상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초기 미 8군의 장병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했던 그들의 공군들처럼 미국인들에 의해 미국역사가 알려진 만큼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기억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전쟁은 조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미 8군 장병들은 단순히 이것이 그들의 직업이었고, 그들은 남자였기 때문에 머나먼 나라에서 비참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해병 제1여단이 부츠에 물을 묻히지 않고 해안을 걸어서 한국의 부산에 상륙했을 때 그들은 부산 방어선의 북쪽을 지키는 용감한 군인들 이야기를 일컫게 되었다. 전투훈련을 받은 상륙전의 전문가들로서 여러 병영과 기술학교, 특수 임무 지역과 해외 주재 대사관 경계부대 등 전 세계로부터 소집된 이 제1해병여단 장병들은 '마른 부츠'의 가치를 알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항구 넘어 전방 전선 어딘가에 있는 군인들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해병대가 부츠에 물을 묻히지 않고 상륙하다니....
밤 동안 우리가 있었던 참호가 있는 언덕 사면으로부터 비틀거리며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미 연합 통신의 램버트와 함께 이미 그들의 전투식량 캔을 비틀어 따고 있는 해병
대원들로부터 아침 식사 거리를 찾으려고 멈추었다. 그때 우리 후방의 계곡을 넘어
헬리콥터 한 대가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와 아래쪽의 거의 마른 강바닥에 착륙했다.
거의 같은 시간에 해병대의 신형 퍼싱 전차 10여 대가 굉음을 내고 나아가며 방향을
돌리더니 강둑 위에 부채꼴 대형으로 전개하였다. 우리는 조종사가 헬기를 즉각 이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회전날개를 아직 힘차게 돌리며 착륙용 두 다리를 딱 벌리고 대기하고 있는 논을 가로질러 갔다.
우리는 둘 다 헬기로부터 걸어 내려 오고 있는 눈처럼 하얀 백발의 해병 준장 에드워드 크레이그를 알아보았다. 크레이그 장군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공격을 지휘하면서 출발했다. 크레이그 장군이 자기의 해병대원들이 참호를 깊게 파고 있는 주변의 언덕들을 냉철한 푸른 눈으로 훑어보는 동안 나는 그의 야위고 짙게 탄 얼굴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느린 미소를 바라보면서 저 '이오지마'와 '부정'의 용사가 한국이 부여 할 수 있는 그 어떤 난제도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갑자기 아주 귀에 익숙한 버킷을 흔들며 내는 쌩하는 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압도해 버렸고, 두 발의 박격포 포탄이 강바닥에 떨어졌다. 붉은색의 뜨거운 파편 조각들과 함께 진흙과 자갈로 된 간헐 온천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 헬리콥터도 그렇게 되었다. 다음 포탄이 떨어지기 전에 비행기는 계곡의 중간에 있었다.
크레이그 장군은 산허리에 있는 그의 지휘소로 향하는 지프를 타고 있었고, 램버트와 나는 엄폐하기 위해 옆에 가까이 있는 곡사포 쪽으로 뛰어들었다. 우리가 돌과 진흙으로 만든 오래된 담장과 대포 사이로 미끄러졌을 때 두 발의 포탄이 바로 우리 뒤에서 터졌다. 나는 우리 발뒤꿈치 바로 너머로 꺾여 쓰러지는 포대 사격 통제용 안테나들을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마음에 드는 영상을 포착했다. 그 안테나들은 포탄을 직접 맞은 것이었다.
사격의 정확성과 헬리콥터와 전차가 도착하자마자 즉각 시작된 사격방식 등은
우리 위쪽 험한 바위 사이에 숨어서 관찰하고 있는 적 관측자의 효율성과 적 사수들의 대단한 사격역량을 실제로 충분히 입증했다. 오직 해병대원들이 능선의 어깨 부분 속으로 참호를 아주 깊게 판 사실만이 끔찍한 희생을 줄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산허리를 따라 소용돌이치는 먼지로부터 들려오는 해병대원들의 숨죽인 신음은 슬프게도 다시 한 번 우리 가운데 부상자와 사망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적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대반격"을 시작하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고. 대공세는 동틀녘부터 시작돼 거의 중간쯤에 갖추어졌다. 폭발 시마다 공기를 따라 흩날리는 쓰레기들을 제외하면 내가 본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나의 더러워진 오른손등 위에서 잠깐 균형을 잡고 있다가 강바닥으로 날아가 버린
귀여운 에메랄드빛의 잠자리뿐이었다.
공산군의 탄약 공급이 끝이 없고 그들의 사수가 지치지도 않는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때 새로운 소리가 산 정상 쪽에서 메아리쳐왔다. 그런데 이번 소리는 좋은 징조였다. 해병대의 경함재기인 '코세어' 전투기들이 크레이그 장군의 지휘소로부터 하달된 긴급 무선명령에 응답하면서 상위를 높게 선회하고 있었다.
포병정찰기 한 대가 전선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동해왔다. 정찰기가 표적을 찾는 데는 몇 분이 걸렸지만 곧이어 코세어가 공격을 위해 급강하고, 로켓탄들이 험한 바위들 사이에서
작렬하며 날개 달린 포탄들이 통쾌하게 뿌려져 터지고 또 터졌다. 그리고 적군은 해병대들이 곧 강요하기 시작한 지옥의 맛을 처음으로 겪기 시작했다.
모든 생지옥이 공산군들 위에 쏟아졌지만, 그러나 한국전쟁은 사실 아주 초기였고,
해병대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겪은 견디기 어려웠던 그 지옥보다 더 많은 몫을 앞으로 치러야 했다. 고지전-시가전-후퇴작전 등에 관한 이야기와 알려지지 않은 고통이 아직 남아 있다.
IⅣ. 낙동강 방어선: 고지전
미8군에게 있어 끔찍했던 모든 날 가운데 9월 첫 주의 날들보다 더 위태로웠던 적은 드물었다. 8월 중순쯤부터 북한 공산군들이 아직 병력이 미약하게 배치된 부산 방어선에 총력을 기울여 집중적으로 공격할 준비를 해오고 있는 정황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적군의 공격들은 정밀하게 계획되었고 이어서 포항 가까이 있는 동북부 전선 끝부분을 사수하고자 애쓰고 있었던 한국군 사단들을 거의 궤멸시켰다. 분명히 한국군 병사들의 기진맥진한 육체와 텅 빈 탄약 상자들, 그리고 긴급 투입된 미군 병사들만이 공산군들이 전선을 돌파하고 공격하여 부산항을 차지하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서부전선은 방어선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해서 공산군이 밤의 어둠을 틈타 물에 잠기는 부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 하나의 고지로부터 다른 고지로 이동해가며 미 24사단 병사들을 공격했고, 공격은 효과적이어서 전 전선으로 보내어지는 거의 모든 보급품을 수송하는 주 보급로인 부산-대구를 잇는 대로를 차단할 것 같이 보였다. 대구에는 미 8군의 사령부가 있었고, 비참한 재난으로 수도를 잃어버린 남한의 임시수도로서 중요한 거점이었다.
남쪽에서 미 제1해병여단의 해병대원들은 일찍이 '진주공격'으로 많이 알려진 공격작전에서 손실된 병력을 교대 요원으로 보충하기 위하여 무장하고 장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목표인 진주시를 감제할 수 있는 능선을 따라 전선을 확보하고 막 전투를 끝낼 수 있는 유리한 순간에 불가하게 물러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부산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마산으로 복귀하라는 미 8군의 명령을 받은 해병대원들은 할 수 없이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그들이 되찾기 위해서 매우 필사적으로 조금 전까지 싸워왔던 지역을 거쳐 되돌아 행군할 때 그들은 앞사람의 발뒤꿈치만을 지독하게 내려 쳐다보았다.
그들은 임시 진지로 활용하기 위해 마산 주위에 그들의 2인용 천막을 간신히 흩뿌려 놓았고, 이후에 주 보급로를 위협하는 공산군에 대항하기 위해 북쪽으로 돌진했다.
IV. 낙동강 방어선: 고지전 89
해병대원들은 적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방향을 바꾸게 했으며 그들을 낙동강 쪽으로
몰아냈다. 강가에 있는 마지막 고지에 대한 최종 기습공격은 한국에서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투가 되었다. 이 전투는 미국의 군대 역사에서 "무명
능선 전투"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해병대원들이 공산군의 돌진을 낙동강을 가로질러 박살을 내고, 사계를 통제하면서
병사들에게 강위의 진지로 복귀하도록 하자마자 북한군이 다시 거의 같은 장소를
공격해 왔고, 고자들로부터 방어중인 미 2사단 병사들을 휩쓸고, 그들의 전선을 돌파하고, 다시 한 번 방어선의 중심부를 향해 쇄도해왔다.
이 장의 사진들 "The Hill(고지전)"은 해병대원들이 적군의 돌파를 분쇄하도록 명령을 받았을 때 촬영된 것들이다.
부산에 상륙한 해병대 교대 요원들은 그들 가운데 단지 몇 명만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실제 전투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군인이 되었다가 지금 부산 방어선을 따라 전투에 깊이 참여하고 있는 순진한 젊은이들과는 달리 맨주먹을 꽉 쥐고 뻣뻣하게 곤두선 채로 나아가는 이미 색깔이 바랜 카키복을 입은 이 해병대 젊은이들에게는 두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격렬한 전투경험을 가진 참전용사들인 장교와 부사관에 의해 지휘 통솔되었고, 그 장교와 부사관들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후 직업으로서 해병대에 남기를 원했던 사람 중에서 아주 면밀하게 선택된
해병대원들이었다. 그리고 농장, 공장, 삼림지역, 어선, 약국주인, 부자 등 미국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온 이 젊은이들이 가진 다른 거대한 이점은 어느 한 사람도 강요받지 않은 스스로의 의지가 충만한 지원병이라는 것으로 그들은 "자랑스러운 미합중국의 해병대원들이었다.
그들 해병대원은 머리를 짧게 깎아 귀가 툭 튀어나오게 하고 군화의 끝 주위로 전통적인 카키색 각반을 단단히 묶어 두르고 있었다. 각자는 모두 해병대원이 되려고 애쓴 지원병들이었고, 세상에서 제일 강인한 싸움꾼들이 사는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강력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처음 해병대원이 될 때 생각하던 것이었다. 나중에 첫 훈련을 마친 해병대원이 피를 나눈 형제들이지만 색깔 바랜 카키복을 입지 않은 다른 군인들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그들은 해병대원이었고, 또 죽을 때까지 해병대원으로 남을 것이었다.
보병소의 첫날부터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추적하기는 쉬워 보였다. 그것은 항상 한 노련한 부사관의 성난 눈빛 아래 민간인의 색깔을 벗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병대에서 사용되는 모든 무기를 눈을 가리고 분해하고 나서 재조립하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밤에는 완전군장으로 비틀거리면서 캐롤라이나나 버지니아의 늪지대를 통과하여 가는 강행군을 하면서 또 캘리포니아의 사막과 산을 가로질러 가면서 보내졌을 터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두가 미합중국만큼이나 오래된 해병대의 전통을 이어왔다.
해병대원 중에 많은 인원이 가까운 시내에 있는 문신 가게를 방문하기 위해 꼼꼼히 돈을 모아서 주말 자유 시간을 택해 '어머니', '불명예보다 죽음', '미 해병대 아니면 그냥 미국국기를 그들의 이두박근이나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이러한 문신들은 새롭고
비밀스러운 남자의 굉장한 상징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단어들과 색깔들은 그들의 훈련이 그들 깊숙이 남은 것처럼 전혀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선으로 이동하는 첫 단계는 문제가 없었지만 너무 느렸다. 부대를 수송하는 기차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할 때 쓰던 것으로 튼튼했지만 오래된 목제 객차였다. 악의 때문인지 또는 단지 습관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 것 같았는데 남한의 기관사들은 보이는
신호나 마을도 없는데 계속해서 비어있는 궤도를 따라 기차를 정지시켰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가도록 기관사에게 강요했고 때로는 권총으로 위협도 가했지만 우리는
다른 기차를 만나지도 않았고 차가 지연되어야 할 어떤 다른 이유도 보지 못했다.
안에 있는 해병대원들은 천천히 지나가는 풍경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식량을 먹었고 무기들을 기름칠하였으며 소총을 가까이 두고서 객차 사이의 연결로 공간에서 잠을 잤다. 그들은 단순히 일하러 가기 위해 차를 타고 있는 전문가들 같았다.
늦은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태양의 열기가 여전히 철모를 통해 바로 아래로 도달하여 위장을 낚아채 병사의 두뇌까지 홱 잡아당기려 하였다. 습기도 많았는데 특히 병사들이 열차와 트럭을 떠나 낙동강 방어선의 서쪽 끝 깊이 길을 가로질러 행군을 시작한 후에 더욱 심해졌다. 길을 따라 서 있는 몇 그루의 가로수 그늘에 길게 누워 휴식하는 동안 적과 진주 대공세에서 싸웠던 다른 해병대원들이 새로운 대원들에게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나빴다고 얘기했지만 사실 믿기는 어려웠다.
해병 제1여단장인 에드워드 크레이그 준장은 무더위와 습기는 공격을 위해 협조해야 할 그의 지휘 하에 있는 모든 부대가 이미 산악지형만으로도 어려운 앞으로의
임무에서 만나게 될 또 다른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병 제1여단이 배에 타기 작전
에 미국에서 돌아온 크레이그 장군은 그의 해병대원 모두를 집합시켜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주었다. 해병대원들은 이미 보도를 통해 사진을 봤고 또 전장에서
공산군에 의해 부상을 당한 병사들의 기사를 읽었기 때문인지 무표정하게 행동했다.
크레이그 장군은 그들 나라인 미국이 긴급사태를 만났을 때 해병대의 역사적 역할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다음으로 크레이그 장군은 그의 옆에 여단 의무참모를 서 있게 하고서 한국에서 아직 총을 쏠 수 있거나 수류탄을 던질 수 있는 살아있는 해병대원이 있는 한 부상당했거나 전사한 다른 해병대원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000명 이상의 해병대원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기분 좋게 서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행복
하게 웃고, 도대체 언제 그들이 배를 탈 것인지를 궁금해 했다.
지금 낙동강가의 방어선으로 가는 길 위에서 여전히 곁에 여단 의무참모를 대동한 크레이그 장군은 콩 통조림을 먹으며 다가올 전투에서 부딪칠 수 있는 위기와 예견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처리하는 임무와 전사자들을 보충하는 임무 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했다.
돌풍을 동반한 소나기가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해병대원들의 대열을 쓸어내렸는데, 그 비는 이미 남쪽 바다를 강타하고 있는 태풍의 상륙과 또한 가을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해병대원들은 발아래 길이 깊은 진창이 되는 것을 무시하며 욕을 섞어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 비는 무더위를 끝내주는 진짜 고마운 비였다. 경기관총 사수들로 보강된 해병대의 커다란 퍼싱 전차가 도로에 접해있는 작은 마을과 농가등에 은폐하고 있던 적들로부터 산발적인 요란사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경기관총 사수들이 불타는 건물의 화염이 적군의 포들을 침묵시킬 때까지 예광탄과
전차포를 적의 각 저항지점에 쏟아부었다. 정찰병들이 길에 인접한 밭을 통과하여
이동했고, 대열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해병대원들에 의해 배치되고 장전된 모든 무기가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적을 쏘아
버릴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고, 정찰대가 도로를 따라 접해있는 밭을 가로질러 고지
위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들은 여전히 중기관총을 배치해놓고 행군 대일의 앞쪽 능선에 있는 진지로부터 길 아래쪽을 향해 집중사격을 했고 총탄들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해병대원들의 행렬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해병대원들은 아름답고 거대하고 독한 냄새가 나며 쇠로 만들어진 그들의 단짝 친구 탱크들의 철컥거리는 궤도 가까이에 붙어서 길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 전차들은 적들의 사격이 집중되고 있었던 도로의 보다 넓게 펼쳐진 지역을 가로질러 해병대원들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가끔은 해병대원들이 육중하고 든든한 전차의 뒤를 떠나 뛰어서만 지나갈 수 있는 때와 장소가 여전히 산재해 있었다.
다행히 공산군의 첫 번째 기관총 사격은 거의 최대 사거리 밖에서 개시되었고 정확도도
역시 낮아서 아주 적은 인원만이 피해를 보았으며, 치명적인 부상자는 없었다. 실탄을
사용한 실전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새내기 해병대원들은 대부분 이것이 적 기관총
사수로부터 첫 번째로 맛본 사격이었다. 이제부터 모두가 몇 달간의 진지한 훈련의 결과 덕을 볼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름을 올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훈련받은 대로 그 새내기 해병대원은 도로에 연해 있는 논으로 뛰어들어 아주 빠르게
달리며 공산군의 기관총 사격으로부터 완전히 교묘하게 벗어났다. 그러나 병영생활과 특별 훈련과정 등 지금까지의 그의 모든 경험 중에서 적군을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리는 충격을 대비토록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해병대원의 총탄을 맞아 머리의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죽은 적군을 맞닥뜨리는 놀라움! 아마 전투에서 이제까지 해왔던 어떤 것보다도 그의 탄통을 단단히 쥐고 적군의 시체를 넘어 기어 올라가야 하는 그 어린 해병대원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용기가 요구되었고, 그는
이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왜냐하면 그와 똑같이 적의 사격 하에 있는 다른 해병 대원들의 길목을 그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해병대원들은 베테랑이었고, 흙탕물이 튀기는 몸 아래쪽에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고 적 기관총을 향해 일어서서 곧 바로 돌격했다. 가볍게 무장한 정찰대가 행렬의 전방과 측방을 샅샅이 수색했다. 조우했던 공산군들은 대부분 교전 없이 물러났다.
그들 역시 전진하는 적의 병력을 성찰해서 알아 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해병대원들이 사살된 소수의 공산군을 신중하게 정밀조사를 하며 적들이 실제로 죽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너무 심하게 부상을 입어서 정찰대가 지나가자마자 수류탄을 던지거나 날쌔게 움직일 수조차 없었는지를 신속히 점검했다. 전진하는 해병대의 본대에 배속된 의무병들은 부상당한 적들을 아군과 마찬가지로 돌봐주었다.
행렬을 정지시키고, 고지 정상을 둘러싸고 참호를 구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
베테랑이든 새내기이든 해병대원들 모두가 곧 적과 맞닥뜨릴 것이고 치열한 교전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한개 대대는 참호를 파지 말고, 오히려 멀리 앞쪽 희미하게 보이는 능선 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명령은 좀 더 높은 곳에서 고지들 쪽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사람들의 가느다란 줄처럼 간신히 들려왔다. 각 대원은 자기 짐을 지고 계속해서 오르고, 자신의 생각은 삼켜버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부대원 모두가 적의 돌파를 저지할 목적으로 시행하는 반격에서 그들이 선두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은 더는 식사시간에 나누는 열띤 주제 따위가 아닌 현실이었다. 공산군들이 다음 고지를 넘고 다음 계곡을 넘어, 또는 빈약한 나무들의 다음 덤불 안에서 공격할지... 그렇지 않으면 해병대가 공산군들을 공격하는 대신에 공산군들이 크레이그 장군과 대령과 대위와 중위와 부사관, 그리고 전체 저주받은 무리를 속이고 오솔길의 다음 굽이 주변에서 매복했다가 그들의 코를 찌르듯이 그들을 습격할 것인지... 각자가 생각할 때처럼 단순하게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생각으로 게임을 하는 끊임없는 '질의응답' 경기였다.
계속해서 그들은 산을 올랐고, 침목을 지
켰다. 공산군들은 크레이그 장군이나 대령이나 해병여단의 그 누구도 속이지 못했다. 그들은 한 팀으로서 아마 최전선에서 작전 중인 미군의 가장 우수한 정찰대원인 건장한 대위와 포병 부사관의 직접적인 감시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대위는 나중에 서울 공격을 위한 최종 정찰 기간에 한강을 수영으로 도강하면서 크게 다치게 되고... 그 포병부사관은 다른 정찰대의 선두에서 작전하다가 세 번째로 총격을 당하게 된다. 어쨌든 이번에 공산군의 돌파를 저지하기 위한 반격 작전 동안 그들은 해병여단과 대대에 적의 모든 동태를 완벽하게 알려주었다.
간결한 명령이 대대를 통해 내려왔고, 한 개 중대는 단독으로 계속해서 전방으로 이동했다. 해병 5연대 1대대의 베이커 중대가 뽑혀서 바로 앞의 전방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는데 선두에 서게 되었다. 해병대원들은 무거운 오후의 대기를 채우고 있는 숨과 소리를 죽이고 있는 고요함에 속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적들이 이 시간에 그들을 대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거의 모두 짐작했다.
그들 중 많은 대원이 거의 나무가 없는 산꼭대기 위로 진격하는 데 필요한 발끝 디딤대 따위의 활용방법 같은 기본지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새내기 대원들까지도 그것의 형태에 대해 저 아래 야지에서 그들이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의 마지막 모금을 빨면서 충분히 들었고, 또 자세히 살폈었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살벌한 "무명능선을 마주하고 있는 고지를 공격했다.
처음에 좀 더 아래쪽 기슭에서 분대가 아주 신중하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때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해병대원들 모두가 이미 아주 자그마한 흙무더기나 밭고랑 골 뒤에 피해있었기 때문에... 기복 있는 불모지를 아직 이동하고 있는 대원들은 그들의 심장을 똑바로 겨누는 소총의 가늠자 너머로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최적의 사정거리에 발을 들여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적의 눈을 사방에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일은 침묵을 깨고 순식간에 일어났다. 기관총들이 앞 능선을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을 때 정적은 영원히 깨졌다. 해병대의 기관총들도 응사했다. 다른 해병대원들은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사격을 하며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으로부터 몰아닥친 폭풍이 고지 정상을 넘어 낮게 스쳐 지나가는 거품이 이는 것 같은 구름을 가져왔고,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 시야는 점점 나빠졌고, 모든 무선 통신이 끊겼다. 중대장인 아이크 펜튼은 빗소리와 총소리와 다른 사람들의 잡음 가운데에서 명령을 외치며 사선 가까이 서 있었다.
고지 가장자리에 있는 관측자들이 공산군들이 무명 능선 정상을 넘어 진격하는 해병대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미 해병대원들은 아래쪽 계곡을 가로질러 고지의 정면 경사면을 기어올라 산 정상 부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적 기관총 사수와 박격포병들은 공격하는 해병대의
앞 곳곳에 사격을 쏟아 붓고 있었다.
다른 공산군 소총수들은 기관총사수들을 지원
하고 있었고, 왼쪽 어딘가로부터 그들은 고지능선을 따라 쇳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포탄을 보내는 자주포 속사를 개시했다. 펜튼 대위는 무용지물이 된 무전기를 무시하고, 손을 깔때기 모양으로 만들어 입에 대고 카빈총을 들고, 몸을 구부리고 잠시
경직되어있는 해병대원들에게 명령을 외쳤다.
"공격!" 해병대원들 모두가 전진을 시작했다. 해병대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수류탄을 투척
하고, 다른 해병대원들이 폭발로 노출된 공산군들을 쏘기 위해 그들의 팔위로 일어
설 때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었다.
점점 더 많은 해병대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 점점 더 많은 수류탄이 산꼭대기
위 목화밭으로 빙글빙글 돌며 솟구쳐 오르거나 목화밭을 지나 떨어지거나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아이크 펜튼 대위는 고지 정상을 탈취하기 위해 마지막 돌진을 하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외쳤다. 그들에게 보내는 명령은 모두가 현 위치에서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격의 성공과 낙동강 방어선의 만회는 그들이 이 고지를 탈취해서 장악하는 것에 달려 있었고, 고지의 점령 없이는 이 모든 일이 불가능 할 터였다. 아이크 대위는 이 작고 시시한 것 같은 고지가 공산군들의 돌파를 분쇄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과 부하 해병대원들이 죽을 수도 있는 크레이그 장군의 공격작전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크 펜튼 대위는 이 고지의 방어를 구축하기 위해 능선의 반대 사면에 머물러야만 했다. 비가 소대들과의 휴대용 무전기 망까지 마비시켰고, 측방과의 유일한 통신은 전령 뿐이었으며, 후방과는 아무 통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에 레오날드 영 상사가 소총병들과 함께 고지 정상부로 기어 올라왔다. 그는 능선을 가장 잘 확보할 수 있도록 각 화기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시야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쏟아지는 적의 사격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일어서서 침착하게 고지 정상부를 따라 오르내리며 각 대원을 신중하게 배치했다.
레오날드 영 상사가 총에 맞았다. 기관총탄 한 발이 그를 진창 속으로 처박히게 하면서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러나 그가 한명의 노련한 부사관으로서 자신이 중대장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아이크 펜튼에게 주기 전은 아니었다. 그는 해병대원들이 그를 기슭을 가로질러 끌고 왔을 때까지 살아있었다.
대원들이 그를 거친 판초 들것 위에 눕혔을 때 그는 흠뻑 젖은 캔버스 같은 판초를 손으로 만지고 서있는 펜튼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중대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물러나게 하지 마십시오. 제발 물러나게 하지 마십시오." 펜튼은 들것을
나르는 짐꾼들이 빗속으로 사라져 고지로부터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른 해병대원들도 사선을 따라 쓰러졌다. 몇 명은 다리와 허벅지에 총을 맞았지만
계속해서 수류탄을 던지고 사격을 했고, 또 다른 대원들은 팔과 어깨에 총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생병들이 도달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싸우려고 애썼다. 위생병들이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처지인데도... 또 몇몇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매번 한명이 맞았고, 사선에 있는 다른 해병대원들이 그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다른 부상병들을 치료하지 않고 있다면 쓰러진 병사에게 응급처치하기 위해 비무장으로 고지의 열린 정면을 기어서 올라올 위생병을 부르는 끊임없는 외침이 있었다.
비가 고지 정상을 맹렬히 강타했고 살기 위해 싸우고 있는 아직 다치지 않은 해병대원들 위에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구름조차 낮게 깔려서 거의 밤처럼 어두웠다. 북한공산군들은 전사면 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았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세 번째 보병공격 후에 물러났고 모든 중화기의 방향을 고지 정상부를 향해 전환했기 때문이다.
박격포탄이 진지 위와 후사면 아래 등 곳곳에서 폭발했다.공산군 기관총 사수 한 명이 정확한 유효 사거 리로 해병대원들이 포복해서 사격하는 목화밭의 목화 줄기들을 기관총 사격으로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의 아주 긴 집중사격이 능선을 써레질하듯 훑고 또다시 훑었다.
그리고 마치 그가 해병대원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는 듯이 세 번째로 다시 써레질했다. 그의 두 번째 집중사격이 정확하게 한 해병대원의 복부를 관통하여 그를 반쯤 일어서게 했고 마지막 한 발이 다시 그의 가슴을 관통하여 그를 목화밭으로 내동댕이쳤고 그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점점 더 많은 대원이 쓰러졌고, 전선에서 자신의 사격 위치로부터 부상당한 다른
대원을 이동시키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탄약운반 지게꾼으로 활동하던 남한의
농부들이 부상자들을 나르기 위한 들것 운반조에 편입되었다. 농부들, 무감각한
동양인의 표정들은 그들 뒤에서 맹렬히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대해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팔로 부상당한 사나운 해병대원을
감싸 안고 무릎이 뭉개져 버린 병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쓰고 있는 거친 농부의 모습은 자비와 온화함 그 자체였고, 그들 얼굴에 겉으로 나타난 냉담함이 거짓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레오날드 헤이워스 상병이라 불리는 기관총 사수가 고지 정상부로부터 슬슬 미끄러져 넘어갔다가 수류탄을 갖고 돌아왔다. 헤이워스 상병과 다른 해병대원들은 그들의 정면으로 다시 전진하고 있는 공산군들을 사살하기 위해 능선의 가장자리 너머로 수류탄을 세게 내던졌다. 헤이워스 상병의 기관총은 탄약이 바닥난 상태였고, 전사자나 부상자를 대신할 보충병도 없었으며, 심지어 후방과의 통신도 두절된 상태였다.
그의 눈은 능선을 따라 자세히 살피며 움직였고, 그러고 나서는 비 오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굵은 눈물이 그의 볼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마치 그의 입술로 말할 힘도 없는 것처럼 각 단어를 발음하여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숨막히듯 말했다.
“적들이 보이지 않아. 여기엔 오직 우리 둘뿐이야. 적들이 안보여. 나머지는 죽었고 부상당했어. 수류탄! 수류탄! 그들이 안 보여, 비 때문에 적들을 볼 수 없어. 안 보여! 우리를 계속 죽이고 있어. 제기랄. 도대체 박격포는 어디에 있는 거야?" 박격포 사격 관측수들이 모두 부상당했거나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헤이워스 상병은 잠시 얼어있는 것 같더니 더듬거리며 수류탄과 박격포와 소총 탄약을 더 달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도 자기 위치를 사수하고 있는 전우들에게 무언가를 갖다 줄 수 있기만을 원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서 담뱃갑조차도 비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관총 사수인 헤이워스 상병에게 모든 희망이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보였을 때 턱이 검은 고참 해병대원 한 사람이 웃으며 막 부상자를 끌어내렸던 곳으로부터 기어왔다. 그는 젊은 상병과 어깨를 맞대고 침착하게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그들이 아직 전선을 지탱하고 있는지. 그리고 세상의 어떤 외국의 적들도 미 해병대를 돌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얼굴이 더러워진 고참 해병대원은 상병의 얼굴에 옅은 미소로 대꾸했다. 헬멧 아래
상병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비에도 지워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고참 해병대원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마침내 상병이 머리를 들고 다시 한 번
물었다. 보충병들이 도착했는지... 아니면 추가적인 탄약이나 수류탄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이라도 있는지? 매 질문마다 고참 해병대원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젊은 해병대 상병은 다시 일어서서 그의 빈 소총을 집어 들더니 총검에 묻은 진흙을 닦으면서 잠시 서 있었다. 고참 해병대원은 헤이워스 상병이 착하면서 반은 자기한테 얘기하듯이 "좋아. 내가 그들을 기다릴 거야 하며 중얼거리는 것을 아마 전혀 듣지 못하고 이미 능선 정상부를 따라 그의 길을 가고 있었다.
박격포탄 한 발이 거의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그는 막 방어선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멍해진 그는 계속 서 있었다. 그리고 계속 비틀거렸다.
그러나 거의 똑바로 서서 사격 진지로 바로 물러났다. 운이 나빴던 다른 두 명의
해병대원들은 좀 더 폭발지점에 가까이 있었다. 포탄 파편들이 한 명의 사타구니로
박혔다. 그도 역시 비틀거렸으나 아직 서 있었다.
두 번째 해병대원은 파편에 맞진 않았으나 충격으로 인해 눈이 흐릿하고 멍한 상태가 되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파편들이 빗발치듯 그들 주위에 떨어졌다. 그가 쓰려졌을 때 위생병이 아주 가까이 있었으나 반쯤만 보이는 밭에서 다른 해병대원의 상처들을 감싸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갑자기 비틀거리며 후사면으로 떨어졌을 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늦은 오후, 공산군들은 다시 한 번 고지 정상의 아군으로부터 두들겨 맞았다. 그들의 사격 역시 약화되어서 단지 기관총탄과 박격포탄이 이따금 짓뭉개진 정상부에 떨어졌다. 그 무렵 비에 흠뻑 젖어 턱수염으로부터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고 있는 아이크 펜튼 대위가 소식을 들었다. 그의 갈가리 부서진 베이커중대 해병대원들은 그들의 탄피에 단지 몇 발의 총탄만이 있을 뿐이고. 만약 공산군들이 다시 한 번 공격해온다면 베이커 중대원들은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적을 막아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소식을...
다른 부대와의 모든 통신은 아직도 불통이었다. 전령들이 이미 오래전에 대대로 파견됐고, 그리고 보충병과 보급물자들이 오는 중이라는 소식을 갖고 돌아왔다. 그러나 도중에 다른 관측자들이 베이커 중대를 완전히 고립시킬 수도 있는 적군의 대대적인 측면공격 움직임을 보고했고, 다른 병력과 화기가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전환됐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후사면은 자신들의 몸으로부터 전투의 오물들을 흔들어
털고 있는 해병대원들로 얼룩덜룩해졌다. 작은 소규모 해병대원들이 부상당한 전우들을 후방으로 후송해줄 구급지프가 있는 길 쪽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다른 해병대원들은 계속해서 고지 위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박격포탄에 의해 생긴 새로운 상처들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그리고 능선의 가장자리에 아주 드문드문 배치된 해병대원들이 적의 공격을 이제는 단 한 번 정도밖에 막을 수 없는 아주 미약한 화력의 무기들을 갖고 그들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전우들의 주김 위에 날아든 독수리와 고지를 차지했는지 아니면 빼앗겼는지도 모른 채 누워 있는 전우들이 있었다.
이겼다. 적군은 더는 공격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충 병력과 탄약들, 그리고 전투식량이 고지에 쇄도했다. 통신도 측방에서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는 부대들과 다시 연결되었고, 후방의 본부와도 연결되었다. 바까지 멈추었고, 맑은 하늘은 내일에는
공격하는 보병들을 아주 근접해서 전투기들이 공중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해주는 것 같았다.
미국이 기대했던 크레이그 장군의 약속은 훌륭히 지켜졌다. 살아남은 해병대원들은 그들 자신이 전사했을 때 다른 동료들이 해주듯이, 이번 전장에서 전사한 해병대원들을 보호하고 매장하기 위해 그들을 조심스럽게 기슭 아래로 옮겼다.
구글지프는 후방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천천히 진창길을 기어갔다. 그때 운전병들은 구급차 안 들것에 묶여 누워있는 전우들이 좀 더 편안할 수 있도록 애쓰며 차를 몰았다.
긴급 구호소 밖에는 해병대원 몇몇이 줄곧 서 있었다. 그들은 적과 대치하고 있던 진지와 화기들을 보충병으로 온 다른 해병대원들에게 넘겨주자마자 고지 위의 사선으로부터 내려온 병력이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긴급구호소로 사용되고 있는 허름한 작은 오두막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의 순서가 끝났을 때 그들은 다시 고지 위로 돌아가야 했고, 다른 해병대원들이 그들처럼 내려와 역시 오두막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우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